논산 걷기 - 솔바람길과 탑정호 수변공원
논산 걷기..이번 주제는 황산벌과 탑정호..
먼저 탑정호 수문으로 갔더니, 벌써 계백장군이 와계시다..
일단 탑정호 솔숲까지 상견례를 하고 탑정호 수변생태공원에 차를 주차한다..
거대한 딸기가 환영하는데, 요즘 부근에선 하우스 딸기를 본격 시판하고 있다..
네 정체가 물닭이냐, 논병아리냐?
물닭이 맞다..
수변생태공원을 돌아보고 오늘의 주 코스인 논산 솔바람길로 간다..
논산 솔바람길은 돈암서원 - 백제군사박물관-계백장군묘 - 휴정서원으로 이어지는 5km..
오늘 코스는 수변생태공원 - 충곡서원 - 솔바람길 - 백제군사박물관-계백장군묘 - 휴정서원 - 수변생태공원으로 원점회귀하는 10km를 걸을 예정이다..
수변공원을 나와 차길로 충곡사로 가다가 보니 얼래 차 없는 농로가 보인다..그래서 얼릉 그 길로 들어선다..
그렇게 가면 충곡서원을 들러 솔바람길을 갈수 잇는 요 표지판을 만난다..
충곡서원은 계백장군과 사육신을 모시는 서원이다..
출입을 못하게 막아놨다..걷기 코스의 유적지는 잘관리하여 참배할 수 있으면 역사교육의 현장이 될텐데..
마을을 돌아 나가면 솔바람길 오르는 표지판이 있다..
매화가 움트고 잇다.,
이 길 표지판 직전에서 길이 헛갈리더니 이 표지판을 보고서 또 헛갈린다..
돈암서원방향 표지에 집착하여 반대방향이 휴정서원이라 짐작했으나 반대방향으로 가다보니 지도와 맞지 않는다..
네이버 지도를 켜고 곰곰히 따져보니..솔바람길을 만나려면 표지방향으로 더 올라가야 한다..
제대로 표지를 하려면 " 솔바람길, 돈암서원,휴정서원 방향"이라고 표시해야 옳다..
드디어 솔바람길에 들어섰다..
이 능선과 저능선 사이 보이는 벌판의 우측편으로 황산벌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의 평에 의하면 주전장은 황산벌 동편 능선 3개의 산성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백제군사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소나무가 지대루 자라서 솔바람을 흠씬 즐긴다..
장군!! 아직도 못다한 충정으로 칼을 뽑았소?
1500년전의 결기 그대로다..
660년 황산벌로 진군한 신라의 5만군..주로 당나라 소정방에게 7.10까정 보급할 군량미를 운반하는 병사가 주축이었지만..
그러니 신라군의 실 병력은 2만 정도 였을 것이다..
계백의 5천결사와 해볼만하지 않은가?
계백의 5천군은 어찌 결사대라 하는가?
계백 장군은 백제의 패배를 미리 예감하고 처 자식을 죽였는가?
아니다..장군이 결사항전의 결기를 보이지 않으면 결사대를 만들 수 없었으리라..
가족은 희생양이였다..
트로이 전쟁에 출발하기 앞서 총사령관 아가맴논이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과 다름이 없다..
물론 계백은 부인까지 희생하였고 본인도 전사하였으니, 아가멤논의 비극과는 다른 그 자체의 비극이었다..
총수가 자신의 가족을 희생하고 나온다..
영화 황산벌에서 계백은 "거시기 할때 까정" 갑옷을 벗지 못하게 꿰멘다..
그러니 총수의 오블리주에 의해 백제군은 5천 결사가 되었다.,.
계백의 부인은 순순히 칼을 받았을까? 아니면 아가멤논의 부인 클리템네스트라와 같은 성격이었을까?
길에서 만난 윤순정의 "계백의 달"은 순종적인 백제의 여인으로 그렸다..
이준익의 영화 황산벌은 아가멤논의 부인 클리템네스트라와 같은 성격처럼 독설을 퍼붓다 죽는 것으로 그려냈다..
당신은 어느 편에 동의하나요?
벡제군은 3개의 영채를 세우고 신라군의 4번의 돌격을 물리치고 서전을 모두 승리했다..
위 지도 산직리 산성 아래에 승적(勝敵)골.. 적을 이긴 곳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단다..
초조해진 신라..7.10까지 사비성 앞에 당나라군 군량미를 조달해야 하는데..
계백의 오블리주를 능가하는 신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주어야 했다..
먼저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 장군의 아들 화랑 반굴이 나가 전사하고..
김품일 장군의 아들 화랑 관창이 어린 나이로 기어코 전사한다..
신라는 아들들의 희생양으로 사기를 끌어올린다..
원래 김유신은 심리전의 명수다..
선덕여왕 말기 비담, 염종의 난 때 유성이 왕궁쪽으로 떨어져 사기가 침체되었을 때, 한 밤에 연에다 불을 달아 (아마 풍등 아닐까?) 띄워 올리고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선전하여 사기를 다시 올리고, 반란을 진압한 사람이다...
어린 화랑의 희생으로 사기를 충전시킨 후 총돌격을 감행하여 계백의 5천 결사를 격파한다..
계백 전사후 남은 병력은 철수하여 강경 포구를 거쳐 금강하류로 이동, 다시 당나라군을 막는 부대에 합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백제말기의 진실은 무엇인지 진실의 입은 알까?
왜 의자왕 말기 내치와 외교는 장기판의 외통수 같은 길을 갔던 것일까?
왜 고구려는 백제의 멸망을 방관하다가 8년뒤 같은 길을 가는가?
계백장군의 사당..충장사..
황산벌 싸움 당시 김유신의 나이 66세..
그에게는 어린 아들이 없었으니 동생의 어린 아들을 희생시켰겠지..
계백장군의 나이는?
설화가 전하는 상황 "처자식을 죽이고"라는 말을 음미하면, 만일 15세 이상된 아들이 있었다면 당연히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였을 것이데, 그런 말은 없고 어린 자식들이 있었다는 것이니 30대 쯤 되지 않았을까?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 김유신은 계백의 장열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그의 시체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단다..
그뒤 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이곳에 매장하여 가장골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길은 백제군사박물관 후문에서 휴정서원쪽으로 이어진다..
목련의 움은 더 커진듯하다..
그리고 만난 황산벌 전망대..그저 소박한 능선과 능선 사이 작은 들판이다..
저 작은 들판으로 큰 역사적 비극을 간직하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철갑옷에 맺은 이별 목메어 울면
계백장군 삼척검은 임 사랑도 끊었구나
아~ 오천결사 피를 흘린 황산벌에서
불러보자! 오천결사를!
길은 군사박물관 활터 뒤로 이어지는데, 정작 활을 쏘면 길을 막아야 할 것 같다..
아님..안전시설을 충분히 하던지..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신풍리 마애불..
백제와 후백제 전몰 영가를 천도하느라 힘든 내색이 없이 여여부동이시다..
푸른 대밭 사이로 영사암이 보인다..
광산 김씨..사계 김장생의 조상되는 조선시대 김국광(金國光)과 김겸광(金鎌光) 형제가 선산의 묘소를 수호하려고 시묘(侍墓) 살이를 하던 곳에 지은 건물이다.
시묘살이 하던 가옥을 오래 보존할 수 없었고 하인들이 기거하면서 묘소를 지키기도 불편하여 암자를 지어 승려를 두고 독경과 제사를 모시게 하엿단다..
변호사 많은 시대에 광산 김문도 송사를 피해 갈 수 없다..
건물 앞에 공고문이 붙었다.."채무자는 이 건물에 출입해서는 안된다.."
서슬에 겁먹어 열린 틈으로 빼콤히 들여다 보다 발을 돌린다..
푸른 호수를 즐기는 장독이 제일 행복하리라..
아니 저 넘도 속에 담긴 것 때문에 고민할지도 모른다..
휴정서원도 닫혔다..닫힌 것은 살아잇는 것이 아니다..죽은 것을 보존하는 것은 박제뿐이다..
전에 고생한 분의 후기 덕분에 나는 수변길을 즐겁게 걷는다..
바람과 빛과 물로 만들어진 명필로 호반에 멋진 풍광을 그렷다..
수변공원에 돌아와 휴게실에 앉아 장미차와 물망초차로 호수 바람끼를 씻어 낸다..
나는 천천히 걷는다..그러나 뒤로 가지 않는다..는 링컨의 말씀..
고생하면서 성장한 링컨.. 어려웠기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성경과 세익스피어를 많이 읽었다는 사람..
고전이 그를 숙성시켰다...영원한 대통령으로 남게 했다,,
<오늘 걷기> 탑정호 수변생태공원 - 충곡서원 - 솔바람길 - 백제군사박물관 - 계백장군묘 - 신풍리 마애불 - 휴정서원
- 수변생태공원 약 10km
- 거리는 짧다..그러나 볼거리가 많아 시간은 많이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