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아이들과 "뿌리찾기"주제로 건천읍 모량리 손순묘를 찾다가 실패한 적이 잇다.

얼마전 경주 오봉산, 단석산을 등산하면서 모량리를 지나치다가 다시 한번 도전하기로 했다.

자료에 보면, 모량초등학교 뒷편, 박목월 생가 건너편, 고속철 옆이라고 정리되는데, 지도를 놓고 보아도 오리무중이다.

그래도 일단 모량초등학교에 가서 부딛쳐보자는 생각이었는데, 출발 아침에 어느 자료에서 지번을 확인했다.

"건천읍 모량리 536-1"

 

경주걷기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위 주소를 내비에 치고 도착한 곳, 모량리 들판 고속철 옆에 묘소가 있다.

멀리 구미산(수운 최제우의 용담정이 있는 산)이 눈에 들어온다.

 

삼국유사 "손순매아", 초등학교 교과서에 석종이야기로 실려있다.

모친의 이름은 운오(運烏)..노모를 봉양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한 입이라도 줄이겠다고 어린 아들을 땅에 묻으려고 취산 북쪽의 들판에 가서 땅을 팠더니 석종이 나왔다..손순은 하늘의 뜻이라고 여겨 아들을 데리고 돌아와 석종을 집에 걸고 쳤더니 그 종소리가 월성에 있던 흥덕왕의 귀에 들렸다..

왕명으로 그 연유가 알려지자..대효라 하여 밀성군에 봉하고 집과 전답을 하사였다는 이야기..

 

모량리라는 지명은 예루살렘처럼 2000년도 넘게 전해 내려오고, 효자 이야기도 같은 세월을 전해오지만,

과연 효자의 무덤도 그러한가??

어느 자료보니, 해방무렵 후손 3개파 대표가 모여 위치를 고증하여 조성했다는 말이 나온다.

 

우선 , 땅에서 석종이 나왔다는 말은 믿을 수 있다.

( https://blog.daum.net/servan/6348327   참조)

 

묘지 입구의 향나무가 예사롭지 않다.

마치 향화(香火)를 올리는 모습같다.

 

묘소는 단석산 - 오봉산 능선에 둘러싸인 형국이다.

묘소 옆으로 고속철이 달리고, 국도와 고속도로도 가까이 있으니, 교통의 요지다..

 

때는 신라 흥덕왕(826년- 836년) 시절..

형과 함께 조카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가 형(헌덕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지진, 가뭄, 기근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바다에는 해적이 들끓었다.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무역이익을 세금으로 받아 재정에 충당한다.

마침, 손순이 기근 속에서 모친봉양을 위해 아들을 파묻으려다 석종을 발견했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포상한다.

효와 충을 강조하여 자신의 정권안정을 기한다.

 

흥덕왕은 손순에게 집 한채와 매해 벼50섬을 하사한다.

그러자, 그는 옛집을 홍효사로 만들었다. 

최근 경주시 현곡면 남사리 234-2 소재 남사리 삼층석탑 자리를 홍효사로 비정하는 견해가 잇다.

그 동네를 종골이라고 부른다 한다.

또한 현곡면 소현리 623에는 손순의 사당 문효사가 잇는데, 손순의 유허지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아마 흥덕왕이 하사한 집터로 추정된다.

 

묘비에는 삼국유사 내용이 적혀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어느 분은 요즘에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아동학대 내지 살인미수죄로 기소될거란다. 

중국 역사에 대기근이 발생한 참상을 보면, 서로 자식을 바꾸어 잡아 먹었다고 묘사한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 중 계갑대기근(1593-1594)이나 현종때 경신 대기근(1670-1671) 때의 참상도 심각했다고 한다. 

영화 하트 오브 씨 "바다 한가운데서"라는 내용에는 바다에 표류하던 포경선 선원들이 서로 추첨하여 사람을 잡아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극한의 상황을 현재의 배부른 시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실은 지극한 효성이 잇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해피엔딩의 이야기를 통해 효심을 가르키고자 하는 것이다.

신라시대는 아이보다 부모를 선택했지만 고려시대는 부모보다 아이를 선택했다..고려장이라는 말이 그것아닌가??

조선시대는 부모를 선택하고, 현대는 아이를 선택하겠지?

극한 속에서의 선택, 소피의 선택처럼 그런 상황을 요구하는 시대가 있었다.

성경에서 여호와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의 희생을 요구했다.

그는 신의 요구를 따르려고 한다. 신의 시대니까..

지금이라면??

**

"눈에는 눈, 이에는 이"으로 대표되는 함무라비 법전을 잔혹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법전 제정당시에는 가장 진보적이고 관대한 법이었다.

즉, 그 시대에는 어느 1인이 살인을 저지르면 그 사람을 사형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연좌에 의해 살인자의 가족, 부족까지 죽이던 시대였다.

그런 복수를 제한한 법이니까 진보적이고 관대한 법이었다는 것이다.

 

**

그때를 지금의 잣대로 단순히 평가하기 곤란한 경우가 많다.

그 시대에 어떠한 기능을 하였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난세에 효와 충을 다하려던 진심을 평가해야한다..

 

묘소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방내리 길에 까마귀가 가득하다..

반포지효(反哺之孝)한다는 까마귀들 아닌가?

반포지효??

까마귀들이 늙은 어미새를 위해 먹이를 물어다 준다는 말이다..

절묘하게 손순의 모친 이름이 운오(運烏)다.. 까마귀 오자가 들어간다. 

 

한때는 신라 초기의 왕성인 금성과 월성의 위치에 관심이 많았다.

이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되자..

이제 신라초기 신성한 지역인 신유림과 천경림의 위치에 관심이 생겼다.

그러다, 신유림이 낭산부근 사청왕사터 부근으로 알려지자, 다시 천경림으로 관심이 집중된다.

천경림(天鏡林)..하늘 비추는 거울 같은 숲..

이름처럼 계림 남서쪽 남천변이라고 알려졌다..

이 신성지역에 아도화상이 공주의 병을 고쳐준후 초옥을 짓고 수도한 적이 있단다..

그후 이곳에 법흥왕이 신라 왕실 최초의 공인 절 흥륜사를 지을려고 하다가 이차돈 순교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천경림 부근에 위치한다는 현재의 흥륜사를 찾아가보기로 하다가, 문득 법흥왕릉은 어디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료를 보니, 의외로 경주 외각 건천쪽  선도산 서쪽 산자락에 있었다. 

생각난 김에 낭산 걷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법흥왕릉부터 가보기로 한다..

 

멀리 선도산이 보인다.

경주의 서악이라고도 하는데, 산 동쪽에 진흥왕릉 등 고분군이 즐비하다..

그런데, 왜 법흥왕릉은 선도산 서쪽 이런 외진 곳에 위치할까?

 

주차장에 차를 대니, 벽도산이 눈에 들어온다..

벽도, 선도.. 주변에 복숭아 밭이 많았나??

왕릉입구치곤 좀 허접하다...

 

법흥(法興)..법을 일으켰다는 시호..

그는 법과 불법을 모두 일으켰다..

최초로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한다..

 

길가에 시계와 죽장이 있다??

죽장 짚고 짚신 신고 삿갓 쓰고 왕릉을 유람할제..ㅎ

 

주인장 글에 내공이 있다..

백행지본 인지위상(百行之本 忍之爲上)

모든 행동의 기본은 인내를 으뜸으로 친다.

불교로 말하면, 인욕바라밀이 제일바라밀이라는 뜻이다..

백인(百忍) 선생의 덕담을 마음에 새기며 왕릉으로 올라간다.. 

 

신라의 법과 불법을 일으킨 왕으로 무덤치곤 어느 종중 종손 묘소처럼 소박하다..

법흥왕..

그는 아버지 지증왕과 어머니 연제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두사람이 결혼한 이야기가 19금처럼 등장한다..

지증왕의 덩치에 걸맞는 여성을 찾다가 여기서도 가까운 건천읍 모량리 동로수 아래에서 거대한 똥을 발견하고,

똥주인을 찾는다..신데렐라는 유리구두인데, 우리 전설은 왜 이리 촌스럽냐?? ㅎ

똥주인은 놀랍게도  모량부 대인의 딸인데, 키가 7자5치(약 2미터??)나 되는 여자였단다..

결국 지증왕의 부인이 되어 법흥왕을 낳았다.

법흥왕이 모친을 닮아 키크고 덩치도 장대했다 한다..

이 피를 이어받은 진평왕도 거구에 장신이어서 돌계단 섬돌 2개가 한번에 부서진 일이 있다고 한다. 

 

법흥왕이후로 바뀌는 것이

1) 무덤 위치가 왕궁 근처 평지가 아닌 산기슭으로 이동했다는 것

2) 묘제가 적석목관분에서 석실분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것

3) 봉분의 크기가 작아졌다는 것 (아버지 지증왕의 묘인 천마총과 비교된다)

불교를 신봉하면서 겸손모드로 바뀐 것 아닐까?

법흥왕도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운(法雲), 자는 법공(法空)이라고 했다.

 

왕릉만 보고가기엔 아쉬워 주변 오솔길로 올라간다.

그런데, 기대이상의 솔숲길이 이어진다.

 

길지는 않지만 신라적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멋진 길이다..

 

돌아와 왕릉을 한바퀴 돌고.. 

 

굵은 소나무도 안아보고..

 

바람없고 볕좋은 곳에 앉아 차한잔 마신다..

 

돌아가는 길, 백인거사의 글씨가 새삼 눈길을 끈다.

 

쓰레기는 길에다 버리고, 이왕이면 버리지 말고 가져가시오..

백인거사의 내공이다..

 

이제 흥륜사로 간다..

남천변에 천경림 흥륜사라 써있다..

 

절마당 가운데 자리잡은 이차돈 순교비..

그의 목을 베자 흰피가 솓았다고 한다. 그넋을 위로하는 자추사(현 백률사)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백률사  https://blog.daum.net/servan/6351730  참조 )

신라의 토속신앙의 성지 천경림에 최초의 왕실사찰 흥륜사를 건축하려던 공사는 중신의 반발이 심하였다.

527년 이차돈 순교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되고, 흥륜사는 다음왕인 진흥왕 5년(544년)에 완공된다.

불교는 향후 신라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삼국통일의 초석이 되고, 호국불교의 원류가 되었다..

 

 

흉륜사는 삼국유사에 자주 등장하는데,

진평왕 때 비형랑 추종자 길달이 흥륜사 남문을 짓고 밤마다 잤다는 곳이고..

원성왕때 김현과 호랑이 처녀의 사랑을 나눈 탑돌이 행사가 벌어진 곳이고,

신라의 미소라고 불리는 수막새가 발견된 곳이다..

 

 

법기암(法起庵)..법이 일어난 절..

그 위상에 비해 절이 참 소박하다..

천주교 성지에 가면 엄청 정성껏 꾸며좋아 "순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던데..

불교는??

 

법흥왕과 이차돈의 마음이 붉게 피어난 것 같은 남천..

 

금당과 법당은 무슨 차이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금당이라고 하고, 법당은 법문을 설하는 장소를 뜻한다.

특히 선종계통에서는 법당을 중시한다. 

요즘은 별도로 금당을 두지않고, 대웅전에 부처님을 모시고 예불과 법회를 같이 하면서 법당이라는 말로 통칭이 된단다..

 

천경림 흥륜사..

연못과 울창한 숲을 기대했지만, 도심의 평범한 절로 다가왔다.

 

 

베이스캠프 경지당으로 복귀해 굴피자를 보시받고 흐뭇하게 경주걷기를 마무리 한다..

창밖의 푸른 남산을 바라보다 문득 서브 당호가 생각났다.

블루마운틴 뷰 하우스..벽산재(碧山齋)..

 

2일째 아침경지당 주변 산책길에 나섰다.

진평왕릉에서 황복사지까지 둘러보기로 한다..

 

연무낀 남산이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신비하게 보인다.

진평왕릉 옆 보문들 길 끝에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보인다.

 

황복사(皇福寺)..이름만으로도 왕실의 만복을 기원하던 절임을 알 수 있다.

의상대사가 이절에서 출가했다고 한다.

 

삼층석탑은 692년에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삼층석탑너머로 동녁하늘이 붉어진다..

 

까마귀 아침식사하러 출근한다.

오늘은 보문들이 아니고 어디로 가나??

오후에 지나가다 보니 단석산 아래 방내리에 모였더만..ㅎ 

 

황복사지 옆 신라갤러리 우측으로 낭산으로 걸어 선덕여왕릉까지 가는 길이 잇단다..

다음에 오면, 선덕여왕릉 - 낭산 - 사천왕사- 왕복..예약이다..

 

보문들 동편이 붉게 타오르면 석굴암 부처님 백호에 광명이 진동하시겠네..ㅎ

 

 

<아침산책길> 진평왕릉 - 황복사지 왕복 1.5Km

토함산 바람길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입실 표시 좁은 임도로 내려간다..

길은 초행자는 불안해서 못갈 정도로 좁지만, 군데 군데 차량 교행장소가 있다.

다행히 교행차량을 만나지 않고 내려오자, 까마귀들이 환영하여 나와있었다.

 

전깃줄에 앉은 까마귀들이 어릴적 제비떼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그 많던 제비들은 다 어디 갔을까?

한떼는 강남 카바레로 갔다더니, 카바레가 없어져선지 행방이 묘연하다..

경주에서는 그 추억을 까마귀가 대신해준다..

까마귀는 우리 민족과 함께한 텃새다..

그래선지, 주민들 입장을 고려해서 "까옥"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있다..

신라 소지왕(비처왕) 10년(488년)에 까마귀이야기가 등장한다..

정월 보름날 왕의 행차시 쥐가 까마귀를 쫓아가라고 말한다.

말탄 기사가 까마귀를 쫓아가다가 싸우는 멧돼지 구경하다 놓친다.

그때 근처 연못에서 한 노인이 편지를 전한다.

"열어보면 2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는다"고 겉봉에 써잇었다.

한 사람은 왕을 뜻하는 것을 직감하고 개봉하니, 그 안에 사금갑 (射琴匣)이라 써있었다.
"거문고 집을 쏘라"

그뒤의 사연은 생략하고..

그 사건이 벌어진 정월 보름날을 오기일(까마귀 제사날)이라 하여 찰밥을 까마귀에 공양하여 왓단다..

그러니, 경주, 울산 등지에 까마귀가 많은 이유는 오랜 인연 때문이 아닐까??

 

입실에서 올려다 보니 토함산 풍력기가 "잘가"하고 인사한다..

 

영지 주차장에 도착하니, 석가탑이 영지까지 내려와서 환영해준다.

석가탑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치지 않는다 하여 무영탑(無影塔)이라고 했다는데..

영지까지 왕림하셨으니, 무영탑이기를 거부하는 것인가?? ㅎ

 

아사달과 아사녀의 키스가 빛난다..

갑돌이와 갑순이의 신라버전인가??

아사달이 백제에서 온 것이 아니고, 혹시 아사국에서 온 것은 아닐까?

아사국 남자와 아사국 여자..

그런데..기념비 이름이 왜 아사달의 혼인가? 아사녀의 혼이 더 애절한 것 아닌가??

 

 

기념비 밑에 한반도 조각..그런데, 독도는 떨어져 나갔네??  

원, 이렇게 독도 수호의지가 없어서야..쯧

 

 

아사달이 불국사에서 석가탑을 제작하고 있었다.

아사녀가 멀리 고향에서 찾아와 만나려고 했으나, 공사감독자가 부정탄다며 불허햇다.

탑이 완공되면 영지에 비칠테니 그때 만나라고 한다.

영지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석가탑은 비치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아사녀는 못에 빠져 죽고, 탑완공 뒤 이 사실을 알게된 아사달도 애통해다가 죽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아는 스토리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이야기도 생로병사를 거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1) 첫 이야기는 조선 영조때 동은화상이 지은 불국사연대기에 첫 언급이 있었다.

당나라 석공 아사달과 그의 누이 아사녀라는 언급과 불국사 남서 10리 연못에 석가탑이 비치지 않아 무영탑이라고 한다는 내용뿐이다..부부라는 말도, 영지에 빠져 죽었다는 말도 없었다..

 

2) 일제시대 1921년 일본인이 지은 "경주의 전설"에서 현재와 같은 이야기로 진화했다.

3)1938년 현진건이 위 내용을 바탕으로 소설 무영탑을 쓴다.

   아사녀는 백제 부부로 바뀌고, 삼각관계가 추가되었다.

(참고, http://m.gjnews.com/view.php?idx=67827 )

 

어디 이야기 뿐이랴..

우리의 추억도 따지고 보면 가공되고, 생로병사를 거친다..

 

이왕이면 좋은 이야기, 성장스토리, 멋진 이야기로 발전하면 좋겠다..

대표적인 이야기 왕국이 영국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반지의 제왕, 헤리포터 등 그들의 상상력은 거대한 시장으로 성장했다..

 

영지 끝으로 가니 토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행이 말하기를, 산기슭 아파트가 없었다면 불국사가 보일거란다..

 

물닭만 한가로운 영지에 낮달이 가세한다..

 

이야기꾼들이 영지 철새들의 끈기를 보았다면, 

아사녀의 심약한 투신을 막고,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지도 모르는데..ㅎ

 

스토리는 아쉬우나, 족저근막염 걷기꾼에게는 적당한 거리(3Km)의 둘레길이다..

이른시간 식당으로 가는 길..

전깃줄에 까마귀..

왕년의 참새시리즈가 경주 까마귀 시리즈로 진화할 때가 되었다..

 

모처럼 감포일출복어집에서 아구수육을 먹는다..

꽃게찜처럼 부드러운 맛..여전하다..

배터지게 먹고, 오늘의 마지막 여정 월지야경을 보러간다..

 

그런데, 깜깜하다??

요즘 공사 등 이유로 6시에 문닫는단다..

하여, 월정교 야경으로 대체한다..

 

월지 대신에 월정교가 효자노릇한다..

젊은이들이 바글거린다..

경주에 빵집이 많은 이유는 젊은 관광객이 많기 때문인가 보다..

 

월정교 위로 달이 떳다..

신라의 달밤이닷!!

불국사의 종소리도 들리지 않고

영지에 탑도 비치지 않지만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걸음만은 멈추게 한다..

 

달빛이 곱게 월정교에 스며들었다..

참 고운 경주의 밤이다..

경주 보문들로 가는 길, 토함산 바람길 풍력기들이 미리 알아보고 인사한다.

경지당에서 푸른 남산 바라보며 점심을 먹고 카풀하여 토함산 바람길로 향한다.

가는 도중 장항리 5층석탑에 들렀다.

핑크빛이 도니 멀리서도 이쁘다..

 

경주는 곳곳이 석탑이고 불상이다..

 

금강역사도 선명하다..

 

석조여래입상은 박물관으로 모시고, 대좌만 남았다.

원래 원본을 보관하면, 현장에는 복사품을 남겨야하는데, 이게 뭐냐??

대좌 아래 조각이 귀엽다..

개구쟁이 해태인가??

 

1923년 사리도굴범들이 사리를 찾으려고 탑을 폭약으로 폭파하였단다..

동탑은 제모습을 잃엇다..

 

주변 계곡이 험하다..

토함산, 조양산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은 감은사로 간다..

 

비료차두기 타고 미끄럼타면 좋겠다..ㅎ

 

이쁜 석탑 뒤로하고 토함산 바람길로 올라간다..

 

토함산 바람길 네비 주소 : 경주시 문문대왕면 장항리 산 600 을 치고 간다..

주차장에 서면 사방이 툭터져 시원하다..

당연 바람이 센 곳이니 무장을 단디한다..

 

주변에 경관숲을 조성하는 모양인데, 겨울이라 볼 것은 없지만, 걷기꾼에게는 상관없다.

주변을 걸으면 된다.

 

다만, 공식 산책로가 포장길이라, 동행이 불평을 한다.

하여 이리저리 비포장 길을 찾아 걷는다.. 

 

그러다가 꽤 그럴듯한 오솔길을 발견하고 따라간다..

거기서 만난 토함산 자연휴양림 전망대 가는 길..

왕복 1.6km 면 족저근막염 치료중인 나에게도 적당한 길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따라간다..

 

길 좋다..

오르락 내리락하며 룰루랄라 걷는다..

 

정자에서 잠시 숨돌리고 가면 표지판이 나오는데..

전망대는 400미터 남았는데, 폐쇄구간은 뭐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표지판??

역대 신화에서 호기심을 눌러 이긴 신은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전망대에 올라가면 감포 동해바다가 보이는 줄 알았는데, 그냥 막막한 산 뿐이다..

 

돌아나오면서 금단의 호기심을 쫓아간다..ㅎㅎ

 

과연 길은 철조망으로 막혔다..

그러나 약간의 유도리는 있었다..

 

전에는 산악레저스포츠 길이었다는데, 왜 막았을까??

 

여기서 주차장으로 통하는 길이 있어 되돌아 가지 않기로 했다..

 

예비 풍력기 날개가 엄청나게 크다..

길이 46미터..

 

토함산 바람길에서 둘레길을 득템한 날이다..

 

<오늘 걷기> 토함산 바람길 주차장 - 자연휴양림 전망대 - 주차장 약 3km

<네비 주소> 경주시 문문대왕면 장항리 산 60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