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사 오솔길을 걷고나서 동학운동기념관을 가려고 내비를 쳤더니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뜬다.
거기로 목적지를 설정하고 갔다.
그런데, 그 외관이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규모와 외관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황토현 전적지 인근에 대규모로 기념관부지를 확보하고 새로 지었다..
기념관 앞 큰터에 흰 기둥이 줄지어 서있다.
흰 기둥이 죽창을 상징하나 했는데, 해설사 말로는 당시 봉기한 90개 지역을 상징하는 기둥이란다.
기둥 광장 건너편 솔밭과 기와건물 부근이 황토현이다..
동학..
서세동점의 시대, 서학(전주교)의 포교, 서양과 일본의 세력이 몰려오는데, 나라와 백성은 양반 세력의 갑질에 거덜 나고 있었다.
그때 수운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한다. 동학의 포교는 착취가 가장 심했던 전라도에 많은 포교소를 만든다.
최시형..
교주 최제우의 순교후에 함백산 자락에 은거하며 교세를 확장한다..
손병희..
최시형의 휘하에서 동학군 북접의 대장을 맡았다.
전봉주..녹두장군..
30대에 동학 접주가 되앗고, 한때는 2년간 대원군의 식객으로 지낸 적이 있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하여 최초 동학군 봉기를 이끌어 조병갑을 쫓아냈는데,
나중에 조병갑이 동학군 재판을 맡고,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아이러니..헐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요가 불려졌다..
금수저 탐관오리 조병갑
영의정 조두순의 조카.. 고부군수로 부임하여 모친 조의금을 2000냥을 강요하다가 이에 항의하는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을 곤장을 쳐서 죽게한다.
그리고 동진강변에 만석보를 만들고 물세를 강제징수하다가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한다..
전봉준 등은 사발통문을 돌리고 사람을 규합하여 봉기를 준비한다.
사발통문에는 "조병갑을 처형하고 전주성를 점령하고 한양으로 상경한다"고 나온다.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전봉준은 농민 1000명을 이끌고 만석보를 허물고 고부관아를 점령한다.
조병갑은 도주했다..
2006년 조병갑의 증손녀 조기숙이 노통의 홍보수석으로 취임한다. 그리고는 증조부 조병갑을 변명하다가 역풍을 맞는다..
조정에서는 서둘러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여 고부민란을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안핵사가 동학교도 탄압 등 강경책을 쓰자, 관망하던 동학 무장접주 손화중, 태인 접주 김개남 등이 합류하여 전면 봉기한다.
1894년 5월 1일(음 3월 26일) 동학교도, 농민 1만명이 백산에서 집결했다.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는 말이 나왔다.
왜 백산이냐고??
그당시 백성들 옷이 흰색이어서 일어서면 들판이 하얗게 보였단다..
그러자 안핵사 이용태는 도주한다..
조정에서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삼아 신무기로 무장한 800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군산을 통해 전주로 향할 즈음 전주 감사 김문현이 감영의 군사를 동원하여 단독으로 토벌을 감행한다.
5월 10일(음 4월 6일) 감영군이 황토재(현)에 진을 치고 동학군과 대치하고 잇었다.
다음날 새벽 감영군이 기습을 하자, 대비하고 있던 동학군이 삼면으로 포위하여 괴멸시킨다..
동학군은 사거리 100보(60m) 정도의 화승총을 보유하고 있었고,
홍계훈의 경군은 독일제, 미제 소총, 쿠르프 야포, 개틀링 기관총를 보유하고 잇었다.
황토재(현) 전투 승리후 동학군은 바로 전주로 향하지 않고 남하하자, 홍계훈의 경군 300명이 추격한다.
5월 27일(음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동학군은 경군을 격파하고 지휘관도 전사시킨다..
기세를 몰아 전주로 진격하여 5월 31일(음 4월 27일) 무혈 입성한다.
이때 홍계훈은 전주 외곽 완산에 진을 치고, 기회를 노리고 잇었다.
6월 1일(음 4월 28일)- 6월 5일(음 5월 3일) 까지 양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홍계훈이 최신식 쿠르프 야포를 동원하여 동학군 500여명을 사살하는 등 동학군의 파상 공격을 격파한다.
완산전투후 동학군이 전주에서 후퇴하고 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진 사이
고종이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자, 6월 8일 청군에 이어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한다..
상황변화에 자극을 받아 홍계훈과 동학군은 6월 11일(음 5월 8일) 전주화약을 맺는다..
이때 폐정개혁12개조를 제시한다.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탐관오리 숙청
노비문서 소각
7종의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백정이 쓰는 평량갓(平凉笠)을 없앤다.
과부 재가 허락
인재 등용, 문벌 타파
일본과 간통하는 자 엄벌
8월 6일(음 7월 6일) 동학교도들은 호남 53곳에 자치행정기관인 집강소를 설치한다.
국내 사정이 안정이 되어 청일양국의 공동철병을 요구하나, 일본이 이를 거부하고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7월 23일(음 6월 21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장악하고 쿠르프 기관포 8문, 개틀링 기관포 8문, 소총 3000정을 탈취한다.
그리고 친일내각을 수립한뒤, 7월 25일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김홍집내각으로 하여금 7월 27일 갑오개혁을 추진하자 전국이 술렁거린다.
9월 15일 청일간의 평양성 전투에서는 조선 관군이 양쪽에 붙어 서로 총질을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8월 25일 정국을 관망하던 대원군이 자신의 식객이었던 전봉준에게 거병하여 일본군을 무찌르라는 밀지를 내린다.
일본군의 만행에 분개하던 동학 남접과 북접이 9월에 봉기한다.
전봉준의 남접 동학군 1만과 손병희의 북접 동학군 1만 등 2만명이 논산에서 집결하여 12월 5일(음력 11월 9일) 공주 우금치를 공격한다.
우금치에는 관군 1800명과 일본군 200명이 쿠르프 야포와 개틀링 기관포를 배치하고 대기중이었다.
최신무기의 위력에 동학군은 괴멸되고, 후퇴한다.
https://blog.daum.net/servan/6350429
동학군 진압에 동원된 관군은 3200명, 일본군은 2000명이었으나, 최신 야포와 개틀링 기관포로 무장하고 효과적인 전략을 구사하여 농민이 주력인 동학군은 패퇴를 거듭하면서 무너졌다..
한편,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군은 금산 - 신탄진을 거쳐 청주로 진격햇으나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후퇴한다.
전봉준은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순창에서, 김개남은 12월 27일(음력 12월 1일) 태인에서 각 체포되고, 처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