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아침 강길 걷기에 심취했다. 누가 전민동 갑천변에 사는 이유를 묻길래, “아침 강길을 오리 걸을 때마다 10만원 짜리 건강 적금을 드는 격이요”하고 농을 했는데, 실은 나에게 연하지벽(煙霞之癖)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 아침 강길을 걸으며 노을을 기다린다.

 

하지만, 나날이 뜨는 아침마다 노을 질 수 없고, 다달이 지는 저녁마다 빛깔 고을 수 없다.

우수의 구름 비껴난 빈 공간 속에 무심히 아롱지는 노을과 마주칠 때 내 마음은 뛴다.

태양이 다시 떠오르고 짐을 어찌 저리 아름답게 찬양할 수 있을꼬?

범사에 감사하라는 단순한 가르침을 스스로 체현하는 천지 자연의 조화 속을 체구연마(體究硏磨)하는 나날은 정말 호시절(好時節)임을 깨우쳐준다.

 

일전에 용암, 현강, 화전, 송오 선생 등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덕담을 나누던 중 내가 용암의 별장 당호를 녹상재(綠象齋)로, 정자를 관수정(觀水亭)으로 지어주고 현강선생의 글씨를 받아 멋지게 마무리한 일이 거론되더니 문득 내 우거의 당호 이야기로 비화하였다.

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내 연하지벽을 들어 서재의 당호를 관하재(觀霞齋)라 하고자 하였더니, 일행이 모두 즐거워 하였다.

어느 덧 시일이 흘러 지난 가을에 현강선생이 흔쾌히 멋지게 글씨를 써주고 송오선생이 좋은 나무를 골라 정성껏 각을 새겨 나에게 당호 서각을 주었다.

이 아름다운 판각을 함부로 내걸기 미안하던 차 마침 도룡동 용포 인근 갑천변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때맞추어 서재가 서향에 들어서고 갑하산, 우산봉, 계룡산 천왕봉, 쌀개봉 너머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자니 이제는 편액을 걸지 않을 수 없다.

아침 갑천을 걷다가 노을 진 계족산을 바라보며 저절로 떠오른 시 한수 얻었다.

 

희디 흰 백로라도 태양을 가로질러 날면 검게 보이고

검디 검은 삼족오도 달빛 부서질 땐 하얗게 보인다네.

저 산은 묵연하여 스스로 말을 잊었나니

아침 노을 등에 지면 보라빛 석산이라 불리고

저녁 노을 이마에 비치면 청산이라 불린다네.

 

이 월강도 반백의 머리카락을 노을에 물들이며 강길 걸어온 날이 반백이 넘은 지라 이제 지난 날 돌아보지 않거니와 앞으로를 묻는다면 조석 노을을  벗삼아 운무 데리고 갑천(甲川)에 살겠노라!

 

2011. 2. 3. 신묘년 설날에 월강(月江)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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