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살 도치랑 처녀가  17살 거배미 총각에게 시집갔다..

아마, 가난한 집에서  입하나 줄일려고 얼릉 시집보낸 의심이 간다..

거배미에서 지지리 고생하다 대처로 나가 아들만 5형제를 내리 낳고 무탈하게 키웠으니 일단 자식농사는 성공한 셈이다..

도치랑 여인은 아침 이불 속에서 어린 아들에게 꼭 가르치는 것이 있다..

본적은?  " 00군 00면 00리 529번지"

주소는? 할아버지 함자는??

그 문답속의 동네가 거배미이다..

거배미?? 

상석에는 한자로 거야촌(巨夜村)라고 표시했는데, 배미를 밤 야자로 이두식 표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배미는 논배미의 배미가 아닐까??

처음 이 동네를 방문했을 때 반달지기 논배미가 다락논처럼 언덕을 따라 이어진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아마 다락논배미가 많다는 의미로 거배미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 동네를 방문한 목적은 성묘를 하기 위해서이다..

문중 재실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

할아버지 묘소가 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후 해방직후 가족들이 대처로 떠났기에 여기에 계신 것이다..

 

인사올리고..

 

고조할아버지께도 인사올리고..

 

장손에게 남겨진 몇백평의 밭뙈기들..

이제는 대신 농사 질 사람이 없단다..

 

성묘를 마치고..도치랑으로 간다..

55년전에 구경갔던 용문산기도원부터 들린다..

 

1960년대 나장로의 용문산 부흥회는 유명했다..

그때 외가집에 왔다가 용문산기도원 구경을 간 적이 잇엇다.

사택의 최신 설비가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은행잎을 밟으며 걸어가 이곳 저곳을 살피지만, 55년전 장소는 찾지 못하겠다.

 

나장로..그의 이름이 나운몽이고 목사가 되엇다는 사실은 이제서야 알았다..

혹시 기념관이라도 문을 열었으면, 추억의 장소를 찾을 수 잇을터인데..오늘은 닫혔다..

 

오랜 세월동안 이 기도원은 엄청 발전했나보다..

하나의 마을이 되었다..

 

그 출발은 이렇게 초라한 초가집에서 시작되었다는..

구한말, 일제 시대 암담한 시절에는 동학의 최제우, 원불교의 소태산, 증산도의 강증산, 불교계의 경허, 만공, 한암 등 고승 도인이 은하수처럼 즐비하게 나타났는데..

이제 먹고 살만한 시절이 되니, 도인이 나타낫다는 말을 듣기 어렵다..

 

지나가는 사람 몇에게

"혹시 50년전에 ..."하고 물으니 모두 손을 내젓고 사라진다..ㅎ

하긴 그 사람들 나이가 50이 안되었는지도 모르지..ㅎㅎ

 

도치랑 마을로 돌아와 추억에 잠기며 돌아보는데, 사과가 붉게 주렁 주렁 익어간다..

그 예전엔 척박하던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과수, 특수작물 농사로 농촌도 살만해진 느낌이 난다..

 

우리의 방문을 축하하듯 핑크 장미도 피었다..

 

골목을 돌며 수소문하다가 연락이 끊겼던 사촌과 연락되었다..

 

도치랑 사과를 한상자 사면서 맛을 보니, 시원하고 달콤하다..

추억을 복원하는 것이 고인을 추모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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