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선덕여왕둘레길은 선덕여왕릉 - 황복사지3층석탑 - 진평왕릉 - 명활산성으로 이어지는 10km 구간이다..

이곳을 3-4번에 걸쳐 오늘에서 완결했다..ㅎㅎ

1) 선덕여왕릉 - 진평왕릉 : 오늘 구간 

2) 진평왕릉 - 명활산성 : https://blog.daum.net/servan/6352126

3) 진평왕릉 - 황복사지 : https://blog.daum.net/servan/6352148

 

오늘은 영남 알프스 가지산 등산을 가기로 한 날이다.

그런데, 아침부터 기다리던 단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해서, 숙소 경지재에서 천천히 아침을 먹고 논란끝에  코스를 시부거리 등산으로 바꾼다.

 차 1대를 날머리인  석굴암주차장에 파킹하러가는데,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와중에 차량은 밀리고, 주차장에도 빈자리가 없어 보여 다시 차를 돌린다..

내 머리 속에 밀린 숙제 "선덕여왕둘레길"이 떠올랐다..

<그래서 별똥별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생긴거다..>

선덕여왕릉으로!!

그런데, 도중에 드림빌더가 신문왕릉에 들리자고 우긴다..

최씨 고집보다 더 센 남로당 고집을 당할 수 없다..ㅎㅎ

 

 

 

신라 전성기의 왕릉답게 대문까지 번듯한 홍례문이다..

문무왕의 아들로, 국학을 세우고,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주어 귀족, 관료를 통제하고..

조선의 성종 비슷한 위상이다..

 

 

신문왕은 즉위초 장인 김흠돌의 반란을 제압하면서 대당전쟁시절 비대해진 군부세력 기를 꺽는다..

그리고 김흠돌의 딸인 왕비를 폐출하고, 새로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를 세운다. 

그렇게 그는 왕권강화의 시동을 걸었다..

김흠운은 요석공주의 남편이었으나 영동전투에서 전사한 사람이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신목왕후가 된다..

요석공주는 원효와 사랑에 빠졌고..

신라 왕족의 족보는 복잡하다..ㅎㅎ

 

 

릉주변에 받침석이 특이하다..

그중 "문(門)가 서있는 곳이 관이 들어간 입구로 추정한단다..

 

신문왕릉에서 나와 낭산 아래 사천왕사로 간다..

 

왕릉 자부송에게 물었다..

왕릉 자부송(自負松)아 네 어이 누웠는가?

광풍(狂風)을 못이기어 부러져서 누웠노라.

가다가 양공(良工)을 만나거든 나 예있다고 하구려.

 

근데, 신문왕릉에서 사천왕사 가는 길은 대로를 따라 가는 길이라 걷기는 비추..

 

단비가 논에 심은 모를 춤추게 하고, 황소도 기운나게 만든다..

오늘 하루종일 와야 땅속까지 스며들겠지..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

좋은 비가 시절을 알아 내리니

소리없이 만물에 스며드네

 

낭산 기슭에 세워진 사천왕사..

문무왕 14년(674년)..당의 웅진도독부를 수복하여 소부리주를 설치한 신라를 정벌하려고 당이 호시탐탐 침공을 시도하던 시기..

문무왕이  명랑대사와 상의하니, 호국사찰 사천왕사를 짓고 밀교 비법으로 기도하여 부처의 가피를 받아 적의 침략을 방어하자는 건의를 받는다..

그리하여 신령한 숲 낭산의 신유림 지역에 사천왕사를 짓기로 한다.

하지만, 건축에 시간이 걸리니, 임시로 절터에 비단 장막과 초막을 짓고 명승 12인과 함께 밀교의 문두루비법으로 기도를 한다.

그 무렵 침공을 준비하던 당의 군선이 풍랑으로 침몰하여 해로를 통한 당의 침략은 좌절되고..

그뒤에도 675년 매소성전투, 676년 기벌포 해전 승리까지 사천왕사는 나당전쟁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결국 사천왕사는 문무왕 19년 679년 완공되었다..

조선시대까지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무렵 소실되었다..

 

 

 

녹유신장(활을 든 신장)

사천왕사에 있던 녹유신장 걸작이 복원되어 다행이다..

승려 양지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사는 경덕왕 시절 이 절에서 수행하였다..

 

사천왕사 동귀부..사천왕사 사적비가 잇었을 것으로 추정

 

사천왕사 서귀부..문무대왕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

정조 20년(1796년)경 낭산 선덕여왕릉 아래에서 문무왕릉 비편이 처음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중에 일부 복원된 문무왕비에서, 문무왕은 자신의 조상이 흉노왕 김일제라고 밝히고 잇어 충격을 준다..ㅎ

 

사천왕사터

 

폐사후 절옆으로 일제가 동해남부선을 개설하면서 강당터가 휘손되었다..

이제 다시 철길이 폐선되자 절터를 발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굴다리를 지나 선덕여왕릉으로 간다..

 

신라초기부터 낭산일대 숲을 신유림이라 하여 보전하였는데..

근처에 거문고 명인 백결선생의 집..최치원의 독서당이 잇었단다.

 

 

지금도 솔숲은 신비함을 준다..

 

우중에 바라보는 경주 남산도 아련하고 신비하다..

 

선덕여왕..

진흥왕의 영토확장 정책의 후유증으로 백제 무왕, 의자왕에게 계속 공격당하는 세월을 보냈던 여왕..

내부적으로는 여자 임금에 대한 반감세력을 다스려야 했다..

그래도 슬기롭게 황룡사 9층으로 백성의 구심점을 만들고, 김춘추, 김유신 등 후계그룹을 탄탄하게 키워 삼국통일의 초석을 쌓앗으니 훌륭한 군주다..

 

낭산의 2봉우리 중 남봉에 선덕여왕릉이 잇다..

 

잠시 산길을  내려가다 보면 멀리 월성이 보인다..

 

접시꽃과 잠시 눈맞춤을 하고 가다보면..

무덤이 있는 넓은 터가 나오는데, 그 무덤 뒷쪽으로 낭산 오솔길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우측 오솔길로 진행하다보면..

 

의상사 입구로 나온다..

의상사??

근처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있던 자리에 황복사가 건재하던 시절, 청년 의상대사가 수행을 한 인연이 있다..

그런 인연을 살려 의상사를 지었나 보다..ㅎ

 

골목길에서 만난 앙코르와트식 불상..

 

신라갤러리 표지판을 지나면 비에 젖은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만난다..

 

그런데 석탑이 울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비에 젖은 삼층탑이 한맺혀 우는데

흐느껴 불러봐도 목놓아 불러봐도 대답이 없네...

https://youtu.be/b7hwuXfLDro

 

탑에 무슨 사연이 있는가??

 

***

1942.6.24. 이 탑을 발굴했는데, 탑밑에서 금동제 함이 발견되엇다.

판독결과, 함뚜껑에는 신문왕이 692년 죽자, 신목왕후와 효소왕이 선왕의 명복을 빌면서 이 탑을 세웠다고 내용이 써있었다..

그래서 이탑이 황복사 삼층석탑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탑과 황복사는 신문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임을 알게 되었고, 그렇다면 이 근처(낭산 동쪽)에 신문왕릉이 이었야 한다..

왜냐면 사서에 신문왕을  낭산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종합하면, 황복사와 가까이 있는 진평왕릉이 신문왕릉이 가능성이 높다는 설이 있다..

그러면, 낭산 남쪽의 신문왕릉은 누구 왕릉인가??

신문왕의 아들 효소왕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있다..

(사서에 효소왕을 망덕사 동쪽에 장사 지냈다고 나오는데, 망덕사의 위치가 사천왕사의 남쪽임은 사서에 나오고, 따라서 망덕사 동쪽은 현 신문왕릉과 일치한다는 말이다.)

 

참고: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20607/113813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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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황복사 삼층탑은 신문왕릉의 위치를 제대로 밝혀달라는 한많은 하소연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처음에 드림빌더가 신문왕릉부터 가자고 우긴 이유를 알 것같다..

그가 위 기사를 나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저만치 진평왕릉(아니 신문왕릉인가??)을 바라본다..

왜 이리 경주 왕릉은 위치가 뒤죽박죽이 되었는가??

조선 중기에 조상왕릉찾기 열풍이 불때 각 문중이 정한 위치가 지금껏 내려오기 때문이란다..

이제라도 발굴조사를 해서 정확한 위치를 확인해 볼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제 보문들을 지나 진평왕릉(또는 신문왕릉)을 향해 간다..

 

진평왕릉(또는 신문왕릉)을 지나자, 빗속에 두꺼비가 나타났다..

 

선덕여왕 5년(636년) 5월 두꺼비와 개구리가  떼를 지어 궁성의 서쪽 옥문지(연못)로 모여들었다. 

여왕은 이 말을 듣고 신하에게, 
"두꺼비와 개구리는 눈의 생김이 성난 것 같으니, 이것은 군사들의 모습을 닮은 것이다. 내가 일찌기 서남쪽 변방에 옥문곡이라는 골짜기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들의 징조를 보니 반드시 백제군이 몰래 그곳에 침범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장군 알천과 필탄 등에게 명하여 이를 수색하여 무찌르게 하였다. 알천 등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보니, 과연 왕의 말과 같이 백제의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5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옥문곡에 숨어 있었다. 알천 등은 적을 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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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문곡은 지금의 건천 여근곡이다..

참고 https://blog.daum.net/servan/6351728

 

경주..천년의 고도..삼국유사의 도시..

두꺼비를 봐도, 까마귀를 봐도, 석탑을 봐도, 기와조각을 봐도 역사가 튀어나오는 곳이다..

 

<오늘 걷기> 신문왕릉 - 사천왕사지 - 선덕여왕릉- 낭산 오솔길 - 황복사지 - 진평왕릉 약 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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