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오솔길을 걷고 도산온천에서 목요재계후 숙소인 농암종택으로 향한다..

면사무소에서 택시로 1만원..

택시기사 말..전에 한덕수 국무총리도 와서 묵고 갔다나..원래  이 종택은 도산서원 아래 낙동강가 분강촌에 자리잡고 잇었는데, 안동댐의 담수로 종택과 분강서원이 여기저기 흩어졌다가..현재 종손이 이곳에 땅을 마련한뒤 안동시의 문화재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에 서원과 종택을 모두 재복원하엿단다..  

그 바람에 이곳은 다른 한옥과는 달리 내부 시설은 전기난방, 수세식화장실 시설을 갖추고 신세대를 위한 홈스테이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잇는 여건을 갖추엇다..

 

 

 

 

 애일당 아래 복원한 농암 각자..우측은 우리가 묵은 명농당 건물이다..종택과 서원 사이에 위치하여 조용하게 묵기 좋앗다..

 농암은 세조에서 명종때 사람으로  중종말년 정계은퇴를 상신하여 조선시대 유일하게 왕의 재가를 받아 조정을 떠나 낙향하여 만년을 강호지락(江湖之樂) 속에 보낸다..

스스로 어부가를 지어 불럿고  동시대인으로 족질인 퇴계 이황은 도산12곡을 지었고, 인근 봉화 닭실마을의 충재 권벌 등과 교유하며 조선 중기의 영남의 강호문화 기풍을 일으켰다..  

이는 그뒤 명종, 선조연간의 호남 담양의 송순, 정철 등의 가사문학에도 영향을 미치고 지방의 풍류문화를 이끌었다..

이런 문화는 효종 년간은 동춘당, 우암의 회덕 선비문화, 정조 연간의 연암, 박제가, 이덕무 등의 진경시대 풍류문화로 면면히 이어졌다.. 

 

 

 

 명농당 마루에 있는 효빈가 서판..

효빈가는 농암이 정계은퇴식후 한강에서 배를 타고 고향으로 가면서 그 소회를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떠서 지은 노래..

 

歸去來 歸去來 말뿐이오. 가는 이  없어

田園이 將蕪하니 아니가고 어쩔고

草堂에淸風明月이 나명 들명 기다리나니

 

 

명농당 현판..

 농암이 귀거래도를 벽에 붙이고 귀거래의 의지를 다잡던 집..

전서체의 글씨가 아름답다..

 

 

 

 

 명농당에서 짐을 풀고..

방안에 비치된 다구를 차리고 찻물을 끓여 녹차를 마신다..음..좋구나..

원래는 보름 무렵이라 달밝은 강가에 나가 단소라도 한번 불어 보려고 하였으나, 구름이 가득하고 바람이 불어 그냥 방안에 앉아 단소 한곡 불어본다..

온종일 걸어 피곤하여...금침을 깔고 누었더니 방바닥이 따뜻하다..모처럼 등 좀 지지고 갈수 있게 되었다..

 

 

 

독서는 언제하는가?

삼여가에 한다..

삼여가란..한해의 여가인 겨울..하루의 여가인 밤..낮의 여가인 비바람 불어 공치는 때..

지금이 자려고 이불깔고 누웠을 때가 책읽을 여가다..

하여 두리번 거리니 2가지 책이 눈에 들어온다..

때때옷의 선비..그림의 인물이 농암선생이다..그의 별명이 소주도병..질그릇에 담기 소주같은 사람..

때때옷의 선비란..나이 70에 90부모의 생신을 맞아 색동옷을 입고 즐겁게 해드렷다는 일화에서 나왓다..

 

우측의 책은 농암의 종손으로 종택의 주인인 이성원씨가 쓴 책..

젊어서 종손이 되기 싫어 방황하다가 세원이 흘러 어느새 보니 퇴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어려서 싫어하던 라훈아, 이미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고향을 지키고 사랑하게 되엇단다..

그의 책엔 안동 선비문화의 정신은 "부끄러움(염치)을 아는 것"이고 규정한다..조선 후기 세도정치이후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늘어낫다는 것..

부끄러움을 알기에 구한말에 순국하거나 의병운동이 안동에서 많이 일어난 것이라 한다..

 

좀 읽다보니..꽤 괜찮은 수면제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고산정을 향해 걸어간다..  여명에 저멀리 가송협이 눈을 뜬다..

강변에 깔린 돌들도 무척 다양하다..그 강돌을 뒤적거리다가 나를 발견하다..

차돌..ㅎㅎ

 

 

 

고산정에 다다랗다...건너편 고산을 바라보는 고송은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시인 묵객 관강객을 기억할까..

 

 

 

종택의 아침 식사 시간은 8시..그 시간에 대가려고 돌아선 길...강건너 가사리 마을에서 아침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아..시장하다..

 

 

 

종택의 안채 대청에 한식뷔페가 차려져 잇다..종택애서 묵은 손님들 20여명이 모여 같이 식사한다..

손님중에 시댁 부모형제, 친정 부모형제 같이와 묵은 분도 있다..

골고루 접시에 담아 방에 앉아 먹는데..책장에 눈이 갓다..

책장에는 각종 역대 문집들이 즐비하다..

 

종택의 3대요건이 불천위..문집..정자란다..

덕행이 있어 영원히 제사지내기로 추존되고 학문과 문학적 소양이 깊어 문집이 잇어야 하고 정자를 지을 정도로 경제적 기반이 있는 분을 중시조로 하여 종가(종택)이 형성된다..현존하는 종택의 과반수 이상이 안동지역에 분포한다..

그러니 문집들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터다..

호기심에 살펴보다가 수암문집을 발견했다.. 

 

 

 

 정갈한 아침식사에 흐뭇하게 나와 주변을 둘러보다 장독대를 발견했다..

종택의 정갈한 음식은 정갈한 장독대에 기인하는 거겠지..

한가한 틈을 타서 대청에 비치된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란 책을 구입하여 저자인 주인장께 싸인을 부탁했다..

웃으며 서재로 들어오라 하며 싸인하면서 덕담한마디를 보너스로 써준다..

"인생의 행복은 충고하지 않는 것!!"

부부,형제, 부자, 친구간에도 함부로 충고하지마라..굳이 해야한다면 정성과 최선의 방법으로 하라..하지만 가급적 하지마라..

이를 철저히 지킨 분이 퇴계선생이란다..제자에게도 충고보다는 격려를 통한 스스로 터득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단다..

그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과연 그렇다..

우리는 흔히 충고가 미덕으로 알고, 충고의 홍수 속에 산다..

숙고 끝에 나오는 정성없이 습관적인 입발린 충고는 간섭이고 강제이며 갈등이다..

 

 

 

종택의 주축 건물은 긍구당이다..전세 긍구당이 용트림하는 기상이다..

긍구당(肯構堂)이란  '조상의 업적을 길이길이 이어받는 집'이라는 의미..농암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귀천했다..

 

《서경(書經)》 〈대고편(大誥篇)에 보면...

대고는 주나라의 성왕이 점을 쳐서 은나라의 반란군을 토벌하려는 뜻을 고하고 천명이 불변함을 주장한 내용..
그 가운데 정치를 집짓는 일에 비유하여 "만약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고 이미 땅을 다지는 법을 정해 두엇거늘, 그 아들이 당(토대)를 만들려고도 하지 않고 하물며 가옥을 지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그 아버지가 "내게 좋은 후계자가 있어서 나의 계획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는 귀절..

그래서 긍구긍당(肯構肯堂)은 조상의 유업을 잇는 것을 뜻하는 고사성어가 되었고, 서원이나 사대부가의 단골 명귀가 되었다.. 

 

 

.. 

 

 

종택 입구에서 바라본 긍구당..

 

 

 

 

종택 대문에 입춘방 치고는 특이하게  "국가흥망 필부유책."이란 글이 쓰여있다..

국가가 흥하고 망하는데는  평범한 필부에도 책임이 있다는 말..

종택의 자부심과 책임감이 느껴진다..

이 글은 백범 김구선생 이 휘호로 쓴 적도 잇다..

 

 청대의 고증학의 대가 고염무가 "천하흥망 필부유책"이라 한 것이 원전인 것 같다.. 

케네디가 "국가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 바라지 말고, 우리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달라"는 말이 오버랩된다..

 

 

 

 

짐을 정리하여 나와 올미재길을 향해 가서 학소대 방향으로 능선을 타고 오른다..

능선에서 바라본 종택과 서원의 모습..

 

 

 

학소대 부근 벼랑에 낙낙 장송이 멋진 솔가지를 펼치고 고고한 자태를 자랑한다..

장송 사이로 흐르는 낙동강과 종택이 기백년의 지기처럼 조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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