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고암 이응노 미술관은 몇번 기웃거렸지만, 사실 고암 이응노 생가는 어디 있는지 몰랐다.

내포역사인물길 2코스 걷기 출발점이라는 인연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이제 그의 인생을 천착해본다..

 

백월산이 가까이, 용봉산이 멀리 보이는 한가한 동네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널찍한 면적으로 공원처럼 관리하니 생가공원 중에 상급이다..

 

복원된 생가는 초가 삼간..

그는 1904년 용띠해에 홍성에서 서당 훈장의 아들로 태어낫다. 나라는 일본에게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한자와 서예를 배웠다. 7살무렵 의병활동을 하던 숙부가 자결했단다.

 

버드나무 휘휘 늘어진 연못 건너편으로 생가를 바라보니 참 여유롭다.

 

그는 소학교(초등학교) 시절에도 그림에 소질이 잇었다.

 

 

<해강 김규진의 대나무 그림>

16세 집안에서 시키는 대로 조혼을 했다.

19세에 서울로 상경해서 왕실 화가로 유명한 당대의 고수 해강 김규진 문하에 들어가 문인화를 배운다.

(15번이나 툇자를 맞은 끝에 입문했다는 설이 있다)

해강에게 죽사(竹史)라는 호를 받는다.

20세인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입선한다. 

 

그는 22세-23세 때 서울, 전주 등지에서 간판점을 운영했다.

28세(1931년) 때 조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특선을 차지한다.

 

1933년 스승 해강이 죽자, 스승의 화풍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화풍을 꿈꾼다.

 그리고 규영 정병조로부터 고암이라는 호를 받았다. 

32세(1935년)에 조혼한 부인이 죽자, 그는 전주 출신 박귀희와 결혼한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일본 유학을 떠난다.

일본화의 대가 마츠바야시 게이게츠(松林桂月)의 덴코화숙(天香畵塾)에 입문하여 서양미술의 소묘와 유화기법을 연수했다. (이때도 1년이나 문전박대를 당하다가 영친왕의 스승 해강 김규진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서야 문하생으로 받아 주었다는 설이 있다)

그해 일본미술협회전에서도 풍죽으로 입선한다.

이후 일본과 조선 양쪽 화단에서 수상을 한다.

 

소화12년(1938년)에 그린 동대문..

 

1930년대의 그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이 여인은 누구일까? 

그의 인생에 중요한 여인은 박귀희와 박인경이다..

 

이응노는 일본의 패전을 직감한 1945년(42세)에 일본에서 가족과 함께 귀국한다. 

그리고 고향 근처인 예산 수덕사 아래 집을 사서 수덕여관을 개설하여 부인 박귀희에게 운영하게 하고 자신은 그림에 몰두 한다.

그무렵 수덕여관에 머물었던 여류화가 나혜석을 만나 프랑스 시절 이야기를 들은 것으로 보인다.

47년(44세)에 이화여대 제자 박인경을 만나기 시작한다..

50년(47세)에 6.25가 터지고, 아들(이문세)가 납북된다.

그는 고향인 이곳으로 피난을 왔다. 

58년(55세)에 21살이나 어린 박인경과 사랑에 빠져 함께 프랑스로 떠난다. 

(또 당시 국전에서 해강 김규진 계열이 소외당하는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있다)

 

프랑스에서 나름 활발히 활동하던 중 1967년(64세)에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고 수감된다.

그전에 6.25때 납북된 아들을 만나게 해준다는 북한공작원의 유혹넘어가 동베를린을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했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었다.

 

 

그가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전처인 박귀희가 옥바라지를 해주었다고 한다.

1969년 특사로 출옥한다.

 추사가 제주 유배생활 속에서 추사체를 완성시킨 것 처럼 

고암에게도 감옥생활은 그 예술세계를 변화시켰다.

그는 열악한 상황에서 부채, 밥풀, 간장 등 모든 재료를 이용해  그림, 조각, 판화 등 옥중작 300점을 만들었다.

 

출옥후에는 전처 박귀희가 있는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스리며 마당바위에 문자추상 암각화를 제작하였다.

"삼라만상의 영고성쇠 모습"을 쓰거나 혹은 그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예술세계의 출발을 알리는 예고편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는 현처 박인경이 있는 파리로 다시 떠났다.

(박귀희는 2001년 수덕여관에서 사망하고, 수덕여관은 수덕사에 팔렸다)

 

 

1970년(67세) 부터 문자추상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1904년생 용띠해에 태어남을 용(龍)이라는 문자추상으로 그렸다.

 

그리고 동물그림, 수묵추상, 판화 등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제작한다

 

그러다가 1977년(74세)..그의 3번째 부인인 박인경이 백건우, 윤정희 부부의 자그레브 납치 미수사건에 관여하면서 한국과 관계가 단절된다.

백건우, 윤정희 부부를 취리히를 거쳐 당시 유고 자그레브까지 데리고 간 사람이 박인경이엇던 것이다.

 (http://www.allinkorea.net/27857 )

 

1983년 그는 박인경과 함께 프랑스에 귀화했다.

 

1980년 광주항쟁이후 역작 군상을 발표한다..

 

그는 1987년(84세)에는 평양에서 전시회를 열었고(그때 방북하여 아들을 만났다는 설이있다, 아들 이문세는 사리원중학교 교감으로 정년한후 77세로 죽었다고 한다)

1989년(86세)에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귀국을 시도했으나 당국으로부터 거부되었는데, 전시회 첫날 프랑스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파리에 묻혔다.

2007년 부인 박인경이 고암의 미술품을 대전시 기증하면서 시립 이응노미술관이 개관한다.

2011년 홍성생가와 기념관이 만들어진다.

 

그의 삶을 생각해본다.

망국의 시대에 태어나, 숙부는 항일 의병으로 자결했지만, 그는 일본에 건너가 일본인 스승에게 서양화 소묘와  유화 기법을 배운다.

그리고 파리로 진출하여 세계와 겨룬다.

감옥생활의 역경에서 진일보한 미적 세계는 한국적 정서가 배어든 문자추상이나 군상 등 작품을 통해 세계적 거장으로 성장했다.

그의 인생은 이념적으로는 좌우를 넘나드는 행보를 보였지만 예술적으로는 끊임없는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었다.

 

이응노 기념관 전시실 다른 곳에는 5회 고암미술상 수상작가인 이진경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의 성장스토리는 다른 후진들에게 손가락이 아닌 달빛으로 전수되기를 바란다.

 

 

참고자료

고암연보(대전 시립 이응노미술관)  :  https://www.leeungnomuseum.or.kr/Menu.do?menuId=0101

가족대담(조선일보) :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80110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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