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에서 700미터 쯤 자계천을 따라 올라가면 독락정이 있다.

회재 이언적이 명종때 당시 권신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좌천되고, 이후 고향으로 귀향한다.

그의 나이 40세..

고향인 경주 양동마을 무첨당에서 지내면서 이 자옥산 계곡에 독락당을 짓고 수양과 공부를 한다.

그러다가 6년뒤 1537년 김안로가 실각하자 복귀하여 요직에 기용된다.

1545년 을사사화가 터진후 55세나이로 의금부판사직에 물러나 귀향하였으나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귀양간다. 

유배생활 속에서도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에 매진하다가 1553년 63세 나이로 강계유배지에서 사망한다.

퇴계 이황이 회재의 행장을 지었다.

 

원래 이곳에는 아버지 이번이 세운 정자가 있었는데, 이름을 계정이라 고쳐 지었다.

그는 젊어서 근처 정혜사에서 공부한 적도 있었다..

그는 외가집인 경주 손씨 종가 양동마을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외삼촌인 손중돈(성종 때 문신)에게 학문을 배운다.

손중돈은 길재의 학맥을 이은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였으니, 회재는 영남 학맥의 적통을 이은 셈이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한 수제였다..

 

자옥산 아래 벚꽃 핀 한옥마을이 그림같다..

 

독락계정의 글씨가 우아하다..

 

손자들이 독락당 수호를 위해 토지를 출연하고 후손들이 토지를 처분하지 못하게 합의문을 만들었다.

요즘보다 더 법치주의에 밝은 사람들이다..

 

 

독락당은 옥산정사라고도 불린다. 

현판도 2개..

옥산정사의 글씨는 퇴계 이황의 글씨다..

 

전국에 독락당이라는 당호가 많다..

대부분 맹자 진심장구 상에서 나온 '古之賢士何獨不然. 樂其道而忘人之勢'라는 구절을 신조로 삼았다.

"(옛날 어진 왕은 선을 좋아하고 권세를 잊었으니) 옛날 어진 선비들이 어찌 그들만 그렇지 않았겟는가? 도를 즐기고 다른 사람의 권세를 잊었다."

 

이 현판글씨는 아계 이산해의 글씨다..

이산해는 토정 이지함의 조카이고, 동인에서 분파된 북인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냈다..

***

회재의 시 독락(獨樂)을 보자

 

무리 떠나 홀로 사니 누구와 함께 시를 읊나

산새와 물고기가 내 얼굴을 잘 안다오

그 가운데 특별히 아름다운 정경은

두견새 울음 속에 달이 산을 엿볼 때지

離群誰與共吟壇

巖鳥溪魚慣我顔

欲識箇中奇絶處

子規聲裏月窺山

 

서애 유성룡이 을해년(1575년) 추석에 지은 시가 걸려있다.

 

양진암.. 

퇴계 이황의 글씨다..

회재 이언적의 은퇴생활은 퇴계에게 모델이 되었다..

회재는 젊어서 인근 정혜사에서 공부한 적이 있거니와 이곳에 은거할 때도 정혜사 승려들과 교유를 했단다.

원래 성리학은 불교 교리에서 자극받아 시작한 심학(心學)으로서, 마음공부가 선불교의 선수행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수장고에는 회재의 친필저서가 보관 중이고, 

희귀본로 김생, 최치원 등 역대 명필의 석각본 탁본 글씨를 모아 놓은 "해동명적"이 있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간인본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여주 이씨 옥산문중본이다.

또한 옥산서원에는 국보로 지정된 1573년판 삼국사기 완질본이 보관되어 있다.

 

수천권의 책을 보관해놓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산과 계곡을 걸으며 숙고를 하고, 그 자득한 결과를 저술하는 생활..

내가 꿈꾸는 생활이다.

 

계정...

이 글씨는 한석봉이 쓴 글씨다..

***

회재가 계정에 관해 지은 시

 

숲속에 우는 새 듣기에도 즐겁구나

시냇가 경치 따라 집 한채 지엇네

밝은 달 벗을 삼아 술 한잔 기울이니

한칸 옆에는 흰구름이 머무는구나.

喜聞유鳥傍林啼

新構茅첨壓小溪 

獨酌只요明月伴 

一間聊共白雲棲

 

누마루에 앉아 침을 튀겨가며 한참 역사를 논한다..

 

위 편액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적혀있다.

동악 이안눌이 1613년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였는데, 1614년 옥산서원을 방문하여 회재의 후손 구암 이준을 만낫다.

동악은 자신의 증조부 이기가 회재와 얽힌 잘못을 상기하고, 앞으로 우의를 돈독히 할 것을 다짐하고

<동악의 증조부 이기는 회재의 추천으로 형조, 병조판서를 지냈으나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키고 회재를 강계로 귀양보내 죽게한 사람이다>

구암이 지은 정자의 이름을 적벽부의 귀절에서 따 무금정(無禁亭)이라 지어 준다.

그리고 "제무금정(題無禁亭)" 시를 한수 지어 준다.

 

우거진 숲 성밖엔 시내가 휘감아 흐르고

띠로 엮은 소쇄한 정자는 세속과 단절된듯

시내와 바람과 달은 원래 주인이 없으니

온 들판 구름과 산은 모두 그대 것이라 

맑은 물 곧장 내달려 바다로 흘러가고

좌우의 푸른 무지개는 보랏빛 노을과 구별되네

해질녁 피리소리에 고기잡는 아이들 돌아가고

홀로 앉은 물가의 백로떼가 비상함을 바라보네

넓은 들과 곧은 산에 시내가 돌아 흐르고

이곳 높은 대는 고도의 형승이라

몇곡조 긴 피리소리에 술 한통이 제격인데

안개비가 가득한 하늘에 물새가 날아가네

 

다시 세월이 흘러 1768년 동악 이안눌의 5대손 이은이 경상관찰사가 되어 옥산서원에 들렀다가 무금정 정자는 사라진후 동악의 시 편액만 보관된 것을 보고 감회에 젖어 사연을 추가한 편액을 다시 판각하여 건다.

 

계정이 참 절묘하게 자리잡고 잇다.

풍류를 아는 남자로 보인다..

 

독락당을 돌아나오며 회재의 조춘(早春)을 읊어본다.

 

구름과 숲에 천지에 드니 풍경이 새로운데 

물오른 복숭아와 살구꽃이 내 마음을 끄네

짚신과 대지팡이로 이제 나서서

물 건너고 산에 오르니 다시한번 참되도다.

春入雲林景物新

澗邊桃杏總精神

芒鞋竹杖從今始

臨水登山與更眞

***

오늘 도리화가 아니라 벚꽃이 피었을뿐 "여경진(與更眞)은 고금동(古今同)"이라.. 

 

옥산마을에 여강이씨 후손들 공부방으로 귀후재가 있다.

논산 윤증의 집안에 파평윤씨 후손들 공부방인 종학당과 비교된다.

조선시대에는 자손이 잘되고, 4대안에 과거급제자가 이어져야 양반지위가 유지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투자가 벤처사업이나 다를바 없다.

지금도 DNA처럼 이어져 조기유학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