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서예전에 출품된 노태악 대법관의 글씨

 

一點冬心朶朶圓(일점동심타타원)
品於幽澹冷雋邊(품어유담냉준변)
梅高猶未離庭砌(매고유미이정체)
淸水眞看解脫仙(청수진간해탈선)

한 점 겨울 마음인가 송이송이 둥글다
그윽하고 담백한 성품은 차도녀같네
매화가 고상하다지만 뜨락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은 물에서 제대로 보니 해탈한 선녀같구나

 

추사 김정희가 지은 수선화라는 한시다..

추사는 금수저출신이라 24세 젊은 나이에 사신일행으로 청나라 수도 연경에 가서 처음 수선화를 보고 매력에 빠졌다..

한양에 와서도 고급 도자기에 수선화를 심어 놓고 애지중지 사랑하였는데..

50대 중반 제주도에 귀양와서 대정현에 유배살이 할 때보니 

그 귀한 수선화가 들판에 지천이라 푸대접받고 소먹이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수선화를 마치 자신의 처지처럼 안타깝게 바라본다..

 

왕년에 제주에 가서 추사 유배길를 걸으며 수선화와 수인사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https://servan.tistory.com/6349933

 

 

 

 

 

 

평소 추사의 글씨를 좋아하여  추사관련 책을 많이 사 읽고, 추사 유배길도 걸었다..

그런데 이 책 처럼 충격적인 내용은 없었다..

 

기존 평론가들이 부작난화(不作蘭花)로 해독하는 것을 저자는 부정난화(不正蘭花)라고 해독하면서 완전히 다른 해석을 시작한다..

부정난화라고 해독하려면 정난화가 있다는 것인데,

정난화는 남송 말기  사초思肖 정소남鄭所南이 노근란露根蘭을 그리며 남송에 대한 충정과 반원 정신을 표현함으로서 시작된 난화를 말한다.

이런 충절을 강조하는 난화는 성리학이 절대적 이데올로기로 군림하던 조선에 들어오면서 선비문예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정난화 대접을 받게 었단다

 

그런데, 정소남 이전의 난화 즉 굴원의 이소 등에 나타난 난의 상징은 "백성의 소리"였단다..

추사가 추구한 부정난화란 이런 전통적인 상징으로서 난화를 그림으로써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공평한 인재등용 등으로 개혁을 바라는 동지를 규합"할 목적으로 난화를 그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추사는 고증학적인 입장에서 성리학의 공리공론적 경향을 배격하고 공자가 원래 추구했던 현실 직시하는 실사구시의 유학을 난화를 통해서 표방했다 한다.  

 

난엽이 오른 쪽으로 꺽인 그림은 서풍이 부는 것인데, 서풍은 가을 바람이고 역경, 고난을 뜻하고, 왼쪽으로 꺽인 그림은 동풍이 부는 것인데, 동풍은 봄바람이고 순경, 미래상을 표현한다

 

문자향, 서권기란 "그림과 글씨의 조형에서 풍기는 느낌"이 아니라 "난화의 제화시나 문장 숨겨진 사의(寫意)를 읽어 내야" 가능하다..

기존의 학자들은 그런 학문적 깊이가 없어서 추사의 글씨를 오독한 부분이 많다고 주장한다..

이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고전 공부의 깊이가 느껴지고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저자는 말한다.

다산이 귀양지에서 500권의 책을 저술할 때, 지적 학문적 수준에서 그와 필적할만한 추사가 그저 난을 환쟁이 수준으로 희롱이나 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아들 상우에게 한 말이 의미가 있다..

아들 상우가 제주도에 종이를 가득 보내자, 추사는 서너 장이면 될 것을 많이 보냈다며, 

“넌 아직 난경취미를 터득지 못했다(汝尙不解蘭境趣味)”며 “문자향서권기를 가슴에 담아 그리면 많이 그릴 필요가 없으니 종이는 더 이상 보내지 말라”고 질책했다.

 

이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라.

단순한 난 그림이라면 많이 반복해서 그려야 발전할터이지만, 추사처럼 글자 속에 의미를 담으려면 난화를  많이 그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문자향, 서권기란 고전에 달통하고 자유자재로 변용할 수있어야 깊이 있는 제화시를 쓸 수 있고, 그런 연후에야 추사스타일의 난화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요즘 사군자 그림에 깊이 없는 제화시를 쓰고, 문인화라고 칭하며 "문자향, 서권기를 풍긴다"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의 결과라는 결론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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