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산에서 내려와 면천읍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면천..연조가 오랜 동네이다..

동래, 선산 처럼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잘 나가는 옆동네에 치어 각 부산, 구미의 일부가 되었듯이

면천도 당진시 일부가 되었다..

골정지는 조선시대 면천군 시절 군수로 부임한 연암 박지원이 만든 다목적 저수지다..

 

 

연암 박지원

청소년 시절 우울증 비슷한 증세를 겪으면서 과거공부와는 담을 쌓고 홍대용, 이덕무 등 백탑파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다.

44세 되던 해, 영조 부마 3종형 박명원이 사신단 정사로 북경에 갈 때 자제군관으로 수행하면서, 기행견문록 열하일기를 저술하여 천하에 필명을 날린다..

50세(정조 10년)에 음서로 벼슬길에 올라, 61세(정조 21년)에 면천군수로 부임하여 1797년 - 1780년까지 3년간 근무한다.

이때 정조가 전국에 농서를 구하는 영을 내리자, 연암은 1799년 과농소초를 지어 올린다.

이 책으로 정조에게 인정을 받아 1800년 양양부사로 승진한다..

그 이전에 골정지를 만들고 건곤일초정을 지었다고 한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순왕후 세력이 집권하자, 사직하고 연암협으로 돌아가 은거하다 5년뒤 사망한다.

 

열하일기..

중국 요동-북경- 열하에 이르는 도정에서 견문한 내용을 쓴 기행문인데..

요즘으로 비유하면 일종의 여행 블러그다..

그의 글은 당시 유행하던 패관소설류식 백화문체(구어체)를 사용한다.

요즘으로 비유하면 인터넷 신조어를 사용한 문학이라고 보면 되겟다.

정조가 이런 문체 유행에 철퇴를 가하는 문체반정을 시작한다. 

결국 연암도 반성문 겸해서 과농소초를 저술했다고 한다..

 

 

 

또 그가 벼슬을 하게된 사연도 재미있다.

50세까지 백수생활하다보니 집안이 가난해서 술도 제대로 마실 형편이 되지 못했다.

점잖은 손님이나 와야 겨우 술 두잔을 주안상으로 올리는 형편이다.

도연명처럼 술을 좋아하는 연암이 꾀를 내서 길에 나가 다까고짜 초면인 관리에게 인사를 하고 어거지로 자기집으로 데려간다.

그러자, 집안에서 손님이 왔다고 주안상에 술 두잔을 내오면, 상대에게 술을 권하지도 않고 본인이 두잔을 다 마셨다나??

이런 봉변아닌 봉변을 당한 입직 승지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정조가 "그정도로 가난이 심한 줄 몰랐다"며 

연암에게 낮은 벼슬이나마 제수하기 시작햇단다..

하지만, 본래 능력이 있던 사람인지라 벼슬은 승진하였고 이곳 면천군수를 지낼 때에는 농서를 구하는 왕명에 부응하여 "과농소초" 14권을 저술,진상하여 양양부사로 승진하였던 것이다..

 

건곤일초정

원래 두보의 시귀에 등장하는 정자인데, 친한 선배인 홍대용이 이를 인용하여 정자를 짓고 스스로 건곤일초정 주인을 자처하고 지냈다고 한다.

아마, 연암이 이를 오마주해서 같은 이름의 정자를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두보의 시, 暮春題瀼西新賃草屋 모춘제양서신임초옥 >

綵雲陰復白(채운음부백) 
錦樹曉來靑(금수효래청) 
身世雙蓬鬢(신세쌍봉빈) 
乾坤一草亭(건곤일초정) 
哀歌時自惜(애가시자석) 
醉舞爲誰醒(취무위수성) 
細雨荷鋤立(세우하서립) 
江猿吟翠屛(강원음취병) 

 

<늦봄 양서의 새로 빌린 초가에서 쓰다>  

 아름다운 구름 어둡다가 다시 밝아진다
비단 같은 나무 새벽되니 푸르기도 하여라.
쑥 같은 양 귀밑머리 늘어뜨린 이내 신세
천지간 기댈 곳이라곤 이 초정(草亭) 하나뿐
슬픈 노래 부르며 무시로 스스로 불쌍히 여기나니
취하여 춤을 춘들 누굴 위해 술을 깨랴
가랑비 맞으며 호미 메고 섰는데
푸르른 강가에 원숭이 울음소리 들린다.

 

***

이 시 귀절 중 "乾坤一草亭(건곤일초정)"을 좋아한 홍대용이 스스로 "건초일초정 주인"을 자처하면서 정자를 짓고 시도 지었다.

 

<건곤일초정주인 乾坤一草亭主人>
                                  
다툼이 없으니 온갖 비방 면하였고
재주많지 않으니 헛된 명예 있을소냐
수시로 좋은 친구 찾아 오면
산나물 안주에 술 한병
허름한 정자에서 거문고 타노니
곡조 속에 슬픈 감회 그 뉘가 알겠는가?

無競免積毁
不才絶虛譽
好友時叩門
壺酒有嘉蔬
淸琴嚮危欄
中曲且悲噓

 

이 추상화는 무슨 글씨인고??

충국효친(忠國孝親)..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

왕조시대에는 사람(왕)에게 충성하는 것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지만, 

민주시대에는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과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다르다.

따라서 팬덤정치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종언을 고함을 명심해야 한다..

 

서울도 벚꽃이 피었다는데, 남쪽인 이곳은 아직 벚꽃이 덜피엇다. 바닷바람이 매서운가 보다.

 

언제 연꽃필 때 다시 한번 와보고 싶다..

 

목련은 크고 탐스럽게 만개하였다..

 

군자정으로 가는 길..

동네주민들이 모델로 서있다..ㅎ

 

수선화가 반겨주는 성안 그 미술관..

 

 

우체국을 리모델링하여 미술관을 만들었다.

강경이 배워야 할 점이다..

공공기관 이사못가게 인질처럼 붙잡고 잇지말고, 시류에 맞게 변신하라..

 

비우고 버리고 쉬는 것.. 그것이 개혁이다..

 

 비우고 버리고 쉬면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자긍스러운가?

얼마나 자적한가?

 

그 미술관 너머 꽃속에 멋진 정자는??

군자정이다..

 

고려 공민왕 때 지주사(군수)였던 곽충룡이 연못과 정자를 만들고 연꽃을 심었다.

그뒤 1719년(숙종 45년)에는 복지겸의 후손이 복지구가, 1803년(순조 3)에는 면천군수 유한재가 못을 준설하고 정자를 중건하였단다.

그리고 허물어진 것을 다시 1994년에 복원하였다..

 

낭관호(郞官湖)..

이태백이 장위 두공 왕광등과 뱃놀이를 즐겼던 호수(후뻬이성 우한시 한양구에 위치한 호수, 명나라 때 말라버림)인데, 이연못의 정취를 낭관호에 비유했나보다.

비석 글씨는 이태백 글씨라고 알려져잇는데, 아마 이태백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것이 아닐까 한다.

 

고려말 익재 이제현이 칭송하기를 “연꽃과 열매가 동시에 맺으며, 진흙에서 나왔어도 물들지 않는 모습이 군자와 같아서 주염계에게 사랑을 받았다"하여 못을 군자지, 정자 이름을 군자(君子亭)이라고 지었다.

 

군자정 옆은 영랑 효공원이다..

면천 출신 고려 삼한벽상공신 복지겸..

그는 궁예 말년 폭정시절 왕건을 추대한 신숭겸 등 4공신 중의 한명이다.

그가 말년에 고향에 은거할 때 병이 났는데, 딸 영랑이 아미산에 올라 백일기도 하던 중 신령이 현몽하여 

"진달래꽃(두견화)을 따서 내정(內井, 화정花井)의 물로 술을 담가 백일주를 만들어 드리고 뜰에 은행나무 두그루를 심으라"하여 그대로 해서 복지겸의 병이 나았다 한다.

면천 두견주의 탄생설화인데, 이 설화를 바탕으로 내정(화정)을 복원하고, 그 일대를 영랑효공원으로 조성했다.

 

공원 옆 높은 곳에 고목이 있어 찍었더니, 이것이 영랑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였다는...헐

암수 두그루이고 수령 1100년으로 천연기념물 551호로 지정되었다.

 

 

부근에 3.10 학생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서있다.

면천보통학교(초등학교) 4학년생 원용은이 고종장례를 참관하러 서울에 갔다가 3.1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뒤, 3.10 전교생 90명이 만세운동을 전개..주동자 원용은 등은 구금되었다가 퇴학.. 

지금은 초등학생이라면 애기로 볼텐데, 저때는 참 대단한 기개를 가졌다. 

요즘은 세월이 흐를수록 정신연령은 더 어려지는 느낌인데..ㅎ

 

일제가 면천 관아 객사를 헐고 그 자리에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지었다.

이제 다시 초등학교를 이전하고 객사를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면천읍성..

낙안읍성, 해미읍성처럼 번듯한 석성이다..거기다 옹성까지 갖추고 있다..

건너편 몽산토성과 함께 기각지세를 이룬다..

 

면천..

백제시절에는 혜군, 통일신라 때는 혜성군, 고려 때 운주의 속현이 되었고, 고려 충렬왕 때 복지겸 후손 복규가 합단적 방어에 공을 세우자, 면주로 승격되고, 조선 태종 때 면천군이 된다.

세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읍성을 쌓고, 몽산성도 수축한다..

이 지역 출신으로 고려초 공신 복지겸, 박술희 장군 등이 있고, 조선 시대에도 정승, 판서가 많이 배출된 유서깊은 동네다.

 

 

남문 이름은 원기루..

일제의 강요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개국, 개혁을 했다면, 이런 읍성들과 관아들은 그대로 보전되었을까??

 

준비와 기회가 만나면 기적이 된다.

대지를 적시는 단비가 내려도 뒤집어진 그릇에는 물을 담을 수 없다..

 

이 고장 전설의 총화 두견주를 만나러 간다..

복지겸장군의 딸 영랑의 정성이 빚은 진달래술..두견주..

왜 두견주인가?

진달래을 두견화라고 하고, 진달래와 찹쌀로 만든 술이라 해서 두견주라고한다.

왜 진달래를 두견화라고 하는가??

전설에 옛 촉나라에 두우라는 왕이 있었다. 

홍수를 잘 다스리는 신하 벌령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서산에 은거한다.

그런데, 벌령이 두우의 아내를 차지하자, 두우는 홧병으로 울다가 죽게되었다.

죽기전에 두견새에게 유언했다.

"두견새야, 내 대신 울어서 나의 심정을 사람들에게 알려다오"

명을 받은 두견새는 피를 토할정도로 구슬피 울었는데, 그 피가 묻어 붉게 물든 꽃이 진달래란다..

그래서 두견새 울 때 붉게 피는 꽃을 두견화라고 불렀다.

두견새는 자규, 귀촉도, 소쩍새, 접동새, 휘파람새로 불리는데, 우리나라 시 문학에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두견주 공장은 일요일 휴무인데, 진달래만 부산하게 바쁘다..

할 수없이 근처 하나로마트에 가서 두견주 한병을 2만원에 샀다.

 

집에 돌아와 두견주에 진달래 띄워 한잔 마신다.

한잔 먹세 그려, 또 한잔 먹세 그려

꽃꺽어 산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얼큰하니, 귀에 각종 두견새 소리가 들려온다.

 

귀촉도 울음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이뤄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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