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달에 조상묘 사초하자는 전갈을 받고 거배미로 간다..

윤달에 사초를 하면 액이 끼지 않는단다..

정말일까??

"윤달은 모든 신(神)들이 하늘로 올라간 공(空)달이기 때문에 경사(慶事)를 치르면 액운이 따르고 흉사(凶事)를 치르면 후손이 복(福) 받는다"는 속설이 있다..

 

위 속설을 분석해보자..

윤달에는 신이 하늘로 올라가 빈달이다는 부분은 일단 논쟁을 피하자..

신이 없는 빈달이면, 길흉을 주관하는 신이 없는데, 무슨 액과 복이 온다는 것인가??

논리적으로 보면, 그저 무애 무득할 뿐이다..

 

실제, 윤달은 음력과 양력의 차이를 메꾸는 장치이지, 운명학, 사주명리학과는 관계가 없다..

이런 것은 액(화), 복으로 연결하는 것은 장사꾼의 괴담 수준이다..

이런 것 잘 믿는 사람들이 광우병 괴담,세월호 괴담, 천암함 괴담도 잘 믿는다..

그리고 가짜뉴스에 잘 속는다..

 

하지만, 형제들과 논쟁하고 굳이 싶지 않고,그냥 택일 풍속이라고 생각하고 참석한다..

언젠가 내가 대장이 되는 날이 온다면, 굳이 따르지 않을거다..

 

사초를 마치고 제례를 올리고..

 

 

이 묘역의 제일 어르신은 6대조 할아버지..

원래 경주 손가는 신라 6성 중의 하나로 신라 모량부(족장 구례마) 지금의 건천읍 모량리, 경주 현곡면 , 구미산 지역을 터전으로 삼았다..

1) 교과서에도 실린 석종이야기.. 흥덕왕 시절 손순매아의 설화의 주인공..손순 조공의 묘는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에 있다. (https://servan.tistory.com/6352150   참조)

그이후 후손들이 갈린다.. 경주 손가와 밀양 손가로..

 

2) 경주 손가는 고려시대에는 계보가 전하지 않고, 고려말 조선초에 등장한다..

고려말 판밀직사사를 지낸 손경원 조공을 1세조로 하고..

조선초 3세조 감찰공 손등 조공의 묘소는 상주군 중동면 우물2리 솥골(鼎谷) 산 32 에 있다..

재실은 우물2리 156-1로 편액은 속촌재사(涑村齋舍)이다.

 

우물리는 팔공산·일월산·속리산 등 세 산이 모이고, 낙동강과 위천(胃川)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터전이다.

 우물1리에는 수암종택이 잇는데, 유성룡 3자인 유진의 집안이다.

 

3) 장자 집안은 5세 손소 공에 이르러 세조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적개공신이 된다..

그리고 경주 낙동면 양동마을에 터전을 잡는다.. 이곳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양동마을이다..

 

4) 우리 집안은 4세에서 갈린 사존원별좌공 손사장 조공을 파조로 한다..

사존원(司尊院)??

 조선초에 임금의 술시중, 궁중의식때 주례진작을 담당하던 다방이었는데.. 세종29년(1447년)에 사존원으로 개칭하였다.

 그러고 보면, 커피숍 이전에 유행한 다방은 전통의 공기관 이름이었다는..ㅎ

 

5) 그리고 7세조 충의공 손전 조공이 율리파로 분파되고, 11세조 손담사 조공이 거창파로 분파되어 거배미로 입향햇다..

그리고 정유재란때, 곽재우 장군 등과 맹약을 맺고 창녕 화왕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한 기록이 나온다.. 

 

 

새월이 흘러 조선말기에 이르면 벼슬을 못하고 자손에게 분재만 하다보면 저절로 살림살이가 옹색해지고 모두들 가난에 시달리게 된다...

농사와 과거제만이 나라의 주업이 되었으니..민생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해방후, 우리 부모님들은 고향을 떠났다..아니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가 산업을 키운 것은 박정희의 공이다..

이를 부인할  수 없다.. 

 

용문산이 바라보이는 이 집터가 부모님이 살던 곳이란다..

백두대간의 기운 받으며 사셨지만, 생계는 어려웟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조실부모하는 바람에 엄한 형, 형수 밑에서 고생하며 컸고, 그리고 분가하엿으나 힘들게 사셨다..

어머니는 14살에 민며느리 격으로 시집오신 것 같다..

맨발에 고생하시며 살앗다는데, 내 기억으로도 발바닥이 두껍고 까맸던 기억이 난다..ㅠ.ㅠ

 

 

고향 친척집에 들러 점심을 먹다 보니 장롱 글씨에 눈길이 간다..

 

而有來日 勿謂 (이유내년물위)

來年日月逝矣 (내년일월서이)

老矣 是誰之愆 (노의 시수지건)

 

내일이 잇다고 말하지말라

내일 해와 달이 가나니 (세월이 기다려 주지않고)

늙었구나, 이 누구의 허물인가?

 

***

<명심보감>의 귀절이 오늘 딱 마음에 적중한다..

 

聖主天中王(성주천중왕) 

迦陵頻伽聲(가릉빈가성) 

哀愍衆生者(애민중생자) 

我等今敬禮(아등금경례)

 

거룩한 주인, 하늘의 왕이시여!

가릉빈가의 소리로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여!

저희는 이제 경례하옵니다..

 

**

식탁 옆에 표구글씨.. 무엇인가 찾아보니??

법화경 화성유품, 모든 범천왕이 부처님을 찬탄하는 계송이다..

 

가릉빈가??

범어로 깔라윈까(Kalavinka)..
극락정토에 살아 극락조(極樂鳥), 울음소리가 매우 곱다는 뜻의 묘음조(妙音鳥)·호음조(好音鳥)·미음조(美音鳥)등으로 불리고, 긴나라(緊那羅) 라고도 불린다.

형상은 인두조신(人頭鳥身)으로 영험한 존재로 알려지며, 주로 인간의 상반신에 깃털달린 화관을 쓰고 악기를 연주하는 형태로 묘사된다.
평창 올림픽 개회식에 등장한 인면조를 연상하면 된다..

***

오래전에 어머니와 함께 조치원 학림사에 같이 간 적도 있다는데..

학림사 주지가 주신 글이라고 한다..

내년 한식행사 마치고 형제들과 학림사에 들려야겟다...

 

돌아 오는 길에 50년만에 재회한 외사촌 부부의 집을 방문했다..

이 부부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으로 집안을 일으키고, 가정의 화목과 풍요로운 일상을 누리고 산다..

그 집에 걸린 글씨..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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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옛날 금릉군) 어모며 능치리 도치랑 마을이 있다.

어모면은 마한시대 어모국이었고, 삼국시대 금물현이었다가 통일신라시대는 어모현이 되었다.

능치리는 능점미을과 도치량 마을의 글자를 따서 능치리가 되었다.
능점마을은 도자기를 생산하는 도공들이 모여 한마을을 이를 정도가 되어 능점(能店)마을이라 불리고

도치랑 마을은 옷나무를 채취하여 사는 동네라 해서 도칠랑(塗漆廊)이라고 부르다가 도치랑이 되었다.

 

일제시대 도치랑 마을에 절이 있었는데 나운몽이라는 청년이 양자로 들어왔다가 1940년대 기독교로 전향하여 나장로라는 이름으로 뒷산 용문산에 기도원을 만들고 1960년대 기독교 부흥회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용문산(龍門山)은  그 이름과는 달리 산세가 곰을 닮았다고 하여, 상주 공성면 쪽에서는 곰실, 웅산으로 부르르고, 상주 공성면 장동리 쪽에서 곰발바닥을 닮았고 해서 장동(掌洞)이라고 부르고, 영동 추풍령면쪽 마을에서는 곰뒷마을, 웅북(熊北)이라고 불렀단다..

용문산 정상인 국수봉에는 웅신단터가 남아 있어서, 2012년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국수봉을 웅이봉(熊耳峰)으러 변경하였다 한다..

 

***

이 도치랑에 액운이 낀 적이 있었다.

1960,70년대  마을의 소가 원인 모르게 죽기 시작하고 사람도 사고 등 이유로 10여명이 죽었다.

이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금은 도치랑 마을에 교회가 3개, 능치리 전체에 10개의 교회가 들어섰다.

외국에 선교봉사도 한다.

 

**

불운의 시절, 이 동네 한처녀가 살앗다. 

10초반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5녀1남의 맏이로서 소녀 가장이 되었다.

어느날 밤 계시를 받았다. 

8살 년상의 청년과 결혼했다.

청년은 4명의 처제와 4살짜리 처남을 같이 키워 훌륭하게 성장시켰다.

그 부부에게 참으로 고생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나는 동네이름을 도치랑(道治廊)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라고 하신 예수님이 다스리는 동네라는 뜻입니다.

나는 거기서 그저 생활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도치랑(道致郞)이라고 풀이하고 싶다.

예수님에게 다가 가려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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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에서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를 "굴밍이"라고 불렀다.

족보에는 군명(君明)이라는 써있어서 자가 군명이고, 이를 경상도 식으로 굴밍으로 발음하는 줄 알았다. 

원래 못살던 집안이라 집안내력과 족보에 관심이 없었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번 도치랑외사촌 부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군명의 정체를 알았다..

김천시 감문면 은림리 군명마을이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 전인 1590년 수원 백씨 집안에서 처음 마을을 열고 군자가 많이 나오라는 의미로 마을이름을 군명(君明)이라고 지었다.

이 말이 경상도 식으로 발음하다 보니, 굴밍>> 굴미가 되고, 현재는 굴미마을로 부르기도 한다.

또 윗마을을 상군마을, 아랫마을을 하군마을이라고 구별해 부르기도 한다.

 

***

그런데 부친은  왜 굴밍이(군명)로 불리게 되었을까?

집성촌이라 장가를 가면 처가 동네 이름을 택호처럼 부르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 택호가 군명, 굴밍이가 되었던  것이다..

거꾸러 따져보니, 어머니는 도치랑에서 시집 간 것이 아니고, 군명마을에 살 때 시집을 간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시집을 간후 외삼촌은 도치랑으로 이사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도치랑에는 외삼촌 큰누나(큰 이모)가 살고 잇었다..

이제야 묵은 족보가 해결되었다는..ㅎㅎ

 

도치랑(또는 굴미)에서 거배미로 시집갔던 엄마가 쓰던 단어들

 

 

아그바리 :  몸이 심하게 망가진 상태,   예) 아그바리처럼 걷는다.

으짓잖다:  체구가 작고 초라함, 의젓하지 않다. 

하랑산    ; 넓고 큰    예) 하랑산 같은 바지

이말모지 ; 헛일 하는 셈치고,  에멜무지   예) 이말모지로 얘기 하는데

야지리기 : 빠짐없이, 야지리    예) 야지리기 다 해라

허바리 : 아무거나 덥석 좋아하는, 허발이

벤댕이속아지 : 아주 속 좁은 

짬단이 : 뚱단지 같은 소리하는 사람

이지가지 : 여러 가지

겉닥다리 : 겉도는 

옹중이 : 작고 이쁜 사람

꼴꼴나다 : 형편없다

조선 강금  : 온갖일에 간섭하는 거.. 예) 조선 강금 다하네

한 파내기 : 한 판덩어리, 아주 큰 덩어리, 예) 한파내기 싸봤네

14살 도치랑 처녀가  17살 거배미 총각에게 시집갔다..

아마, 가난한 집에서  입하나 줄일려고 얼릉 시집보낸 의심이 간다..

거배미에서 지지리 고생하다 대처로 나가 아들만 5형제를 내리 낳고 무탈하게 키웠으니 일단 자식농사는 성공한 셈이다..

도치랑 여인은 아침 이불 속에서 어린 아들에게 꼭 가르치는 것이 있다..

본적은?  " 00군 00면 00리 529번지"

주소는? 할아버지 함자는??

그 문답속의 동네가 거배미이다..

거배미?? 

상석에는 한자로 거야촌(巨夜村)라고 표시했는데, 배미를 밤 야자로 이두식 표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배미는 논배미의 배미가 아닐까??

처음 이 동네를 방문했을 때 반달지기 논배미가 다락논처럼 언덕을 따라 이어진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아마 다락논배미가 많다는 의미로 거배미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 동네를 방문한 목적은 성묘를 하기 위해서이다..

문중 재실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

할아버지 묘소가 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후 해방직후 가족들이 대처로 떠났기에 여기에 계신 것이다..

 

인사올리고..

 

고조할아버지께도 인사올리고..

 

장손에게 남겨진 몇백평의 밭뙈기들..

이제는 대신 농사 질 사람이 없단다..

 

성묘를 마치고..도치랑으로 간다..

55년전에 구경갔던 용문산기도원부터 들린다..

 

1960년대 나장로의 용문산 부흥회는 유명했다..

그때 외가집에 왔다가 용문산기도원 구경을 간 적이 잇엇다.

사택의 최신 설비가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은행잎을 밟으며 걸어가 이곳 저곳을 살피지만, 55년전 장소는 찾지 못하겠다.

 

나장로..그의 이름이 나운몽이고 목사가 되엇다는 사실은 이제서야 알았다..

혹시 기념관이라도 문을 열었으면, 추억의 장소를 찾을 수 잇을터인데..오늘은 닫혔다..

 

오랜 세월동안 이 기도원은 엄청 발전했나보다..

하나의 마을이 되었다..

 

그 출발은 이렇게 초라한 초가집에서 시작되었다는..

구한말, 일제 시대 암담한 시절에는 동학의 최제우, 원불교의 소태산, 증산도의 강증산, 불교계의 경허, 만공, 한암 등 고승 도인이 은하수처럼 즐비하게 나타났는데..

이제 먹고 살만한 시절이 되니, 도인이 나타낫다는 말을 듣기 어렵다..

 

지나가는 사람 몇에게

"혹시 50년전에 ..."하고 물으니 모두 손을 내젓고 사라진다..ㅎ

하긴 그 사람들 나이가 50이 안되었는지도 모르지..ㅎㅎ

 

도치랑 마을로 돌아와 추억에 잠기며 돌아보는데, 사과가 붉게 주렁 주렁 익어간다..

그 예전엔 척박하던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과수, 특수작물 농사로 농촌도 살만해진 느낌이 난다..

 

우리의 방문을 축하하듯 핑크 장미도 피었다..

 

골목을 돌며 수소문하다가 연락이 끊겼던 사촌과 연락되었다..

 

도치랑 사과를 한상자 사면서 맛을 보니, 시원하고 달콤하다..

추억을 복원하는 것이 고인을 추모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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