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후 고단한 심신을 잠시 쉰다..

배터리 충전후 안강읍으로 간다..흥덕왕릉을 거쳐 옥산서원을 들린다..

북천변의 벚꽃은 한낮이 되니 푸른 하늘에 백옥처럼 빛난다..

 

삼릉 못지않게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

천년의 바람소리가 들려오는듯하다..

 

경주왕릉 소나무의 매력은 쭉쭉벋은 모습이 아니라 구불구불 뒤엉킨듯한 분망함에 잇다.

땅의 기운이나 사람의 기운이 나무에게도 미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솔숲이 마치  얽히고 섥힌 진골 귀족들의 근친혼과 정치알력의 단면을 보여주는듯하다..

 

솔숲사이로 왕릉이 보인다..

 

왕릉에 앞서 아이들이 뛰노는 거대한 귀부가 눈길을 끈다..

 

일단 왕릉을 참배하자..

 

주변에 선 무인상, 문인상이 이국적인 모습이다..

턱수염에 오뚝한 콧날하며..

 

왕릉도 다른 왕릉에 비해 거대하고 당당하다..

석사자상도 사방을 옹위하고 있다.

 

석사자상은 중국것과는 또다른 면모, 엉덩이가 토실한 순딩이 강아쥐를 연상시킨다.

 

 

무덤둘레 십이지신 호석을 둘렀다.

조각도 정교하다.

 

북쪽과 서쪽을 지키는 석사자는 제 몫을 잘 수호하고 잇는데..

 

남쪽 담당인 이넘은 동쪽 사자만 줄창 바라보고 있다..

남쪽 수호는 해찰하고 동쪽 사자를 짝사랑하고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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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의 형 헌덕왕은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8년을 통치한다.

흥덕왕은 헌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50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10년간 통치한다.

 

흥덕왕의 왕비..장화부인(정목왕후)는 애장왕과 남매사이이고, 흥덕왕과는 숙질간이다.

정변으로 애장왕이 죽어도 부부사이 금실은 좋았던 모양이다.

즉위초에  왕후가 죽자 이곳에 멋진 능을 조성했다. 그리고 왕이 죽자 이 능에 흥덕왕도 합장되어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앵무새 이야기가 나온다..

흥덕왕 즉위후 왕비가 죽은지 얼마 안되어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이 앵무새 한쌍을 가져왔다. 

오래지 않아 암놈은 죽고 수놈이 슬피 우는지라, 왕이 거울을 앞에 걸어주도록 하였다. 

수놈은 거울 속의 그림자를 짝으로 생각하여 거울을 쪼았는데 그림자임을 알고 슬피 울다가 죽었다.

이에 왕이 노래를 지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실제 흥덕왕은 즉위초에 상처를 하고도 재혼하지 않았다.

마치 고려말 노국공주를 못잊는 공민왕을 연상시키지만, 그는 정치는 무난히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후사를 남지 못한 것이 뒷날 혼란의 시대를 불러온다.

(하긴, 그의 나이 50세에 재혼하여 아들을 얻는다 해도, 성년도 되기 전에 왕이 죽으면 다시 애장왕꼴이 날 수도 있으니  재혼 안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실제로 조선의 선조는 51세 나이에 19살 인목왕후와 결혼하여 영창대군을 낳고 55세에 사망함으로써 광해군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크나큰 실책을 저지른다. 선조의 늦장가는 조선에 큰 민폐가 된 셈이다)

 

경주 기념품으로 석사자상도 만들어 팔았으면 좋겠다..

 

이제 궁금증을 유발하는 귀부로 향하면서 흥덕왕 시대를 생각한다.

그의 치세에 지진, 가뭄, 기근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바다에는 해적이 들끓었다.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여 해적을 소탕하게 하고 그가 얻은 무역이익 중 일부를 세금으로 받아 재정에 충당한다.

그의 묘역에 서있는 무인상 석물의 모델도 장보고와 무역하던 서역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마침, 손순이 기근 속에서 모친봉양을 위해 아들을 파묻으려다 석종을 발견했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포상한다.

효와 충을 강조하여 자신의 정권안정을 기한다.

 

그가 후사없이 죽자, 신라는 왕위계승 분쟁에 휘말리고, 장보고도 이에 휩쓸려 죽게 된다.

장보고의 18년간의 부귀영화도 일장춘몽이 되고, 5년뒤 청해진마저 사라진다..

 

 

 

흥덕왕의 무덤은 웅장하고 정교한 호석도 갖추었는데, 왜 비석을 새우는 귀부는 머리조각도 제대로 못하고 마무리가 엉성할까?

보통 왕릉은 왕의 생존시에 자리를 잡고 축조하기 시작한단다..그리고 실제 흥덕왕 즉위 초에 죽은 왕비의 능으로 만든 것이니 얼마나 잘 만들었겠나?

그러나, 비석은 사후에 후계자가 만들어 주는 법이라..

그의 사후 왕위계승싸움이 벌어지는데, 승리하여 즉위한 희강왕이 1년만에 살해당하고, 민애왕(김명)이 즉위한다.

그러나 1년도 안돼 장보고의 도움을 받은 김우징(신무왕)이 승리하여 신무왕으로 등극하나, 또 1년도 안돼 죽고, 아들 문성왕이 즉위한다..  문성왕도 초기에 3-4번의 반란을 맞아 진압하느라 바쁜 세월을 보낸다.

이렇게 흥덕왕 사후 5-10년간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흥덕왕릉비의 귀부는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비문은 산산조각이 난 것으로 보인다.. 

 

원래 귀부에 비석을 세우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이 홈을 파야 하는데, 흥덕왕 귀부에 이 작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발굴조사 결과, 흥덕왕비석의 비편 59개가 수습되었다.
비편에서 예서체로 '흥덕(興德)'이라 쓰여진 부분이 판독되었고,  '貿易之人'이라는 글자도 확인되고
 '太祖 星漢이라는 글씨도 발견되는데..

태조 성한은 문무왕비문에도 나오는 바, 이른바 훙노왕 후손 김일제라는 논란이 되는 인물이다..
비문의 글씨는 당대 구양순체의 달인 요극일이  썼다고 한다.

 

흥덕왕릉의 석사자와 귀부를 자세히 보니,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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