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언론사에 다니는 선배의 부인이 암환자였습니다. 암 진단 당시 유방암 3기에 갑상선에도 아주 작은 암세포가 있었답니다. 유방암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몇 차례 받은 뒤, 가톨릭 신앙의 힘에 의지하며 투병 중인 분이었습니다.

2008년 9월 제가 암 수술을 받을 당시 그분은 3년차였는데, 갑상선에 여전히 암세포가 남아 있는데도 별 두려움 없이 즐겁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저를 위로하며 이런 말을 해줬습니다. "좀 심한 감기에 걸렸다고 생각하세요. 푹 쉬고 나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낫게 될 거니까요." 자칫하다간 죽을 수도 있는 암에 걸렸는데 감기라고 생각하라니! 그분은 지금 '암이란 감기'에서 완쾌돼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투병해야 할지, 방법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정보를 구하던 중 '월간 암'이라는 책자에 나온 어느 환자 투병기의 한 대목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암아, 고맙다.' 암에 고마움을 느끼다니요? 그때까지의 제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암은 저주, 절망, 고통일 뿐 고마움의 대상은 될 수 없었습니다.

휴직 후 '아빠 주부'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기 시작한 지 6개월쯤 지나자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습니다. 아침에 눈뜰 때부터 자정 넘어 잠들 때까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시간이 매일 되풀이되는 신문기자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덕분입니다. 좋은 먹을거리를 챙기고 적절한 운동을 하고, 명상과 기도에 의지해 제 몸만을 위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은혜입니다.

'아빠 주부'로 두 딸과 부대끼며 보낸 2년6개월의 시간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제 남은 인생에서도 다시 얻기 어려운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아침에 잠을 깨워 정성 들여 지은 밥을 챙겨 먹이고, 저녁 잠자리를 돌봐줄 때까지 하루 24시간의 3분의 2를 두 딸과 함께 보냈습니다. 직장에 출근한 아내 대신 둘째 딸이 다니던 유치원 행사에 참석, 다른 일본인 엄마들과 어울린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한두 달에 한 번씩 가족여행을 떠날 때마다, '이쯤 해서 네 몸과 가족을 한 번 돌보렴' 하고 암이 내게 선물을 줬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전업주부로서 스트레스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살림살이가 서투르다고 아내에게 구박받고, 두 딸의 사소한 투정에 속이 상했던 일도 꽤 있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단순하게 반복되는 집안일, 가족 누구도 아픈 나를 챙겨주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서운함으로 혼자 속앓이를 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럴 때마다 끊임없이 저 자신을 비우려 애썼습니다.

일본의 어느 의학자가 쓴 책에 따르면 암 환자 중에서 완벽주의자, 마음이 착한 사람,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합니다. 그런 성격 탓에 스트레스의 강도가 높은 데다 잘못된 생활습관까지 겹쳐 암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법정 스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을 비우는 것'이었습니다. 당초 목표가 100이었다면 70 정도로 줄이고, 눈높이를 낮추고, 현재 순간에 만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에게 뒤지기 싫어했고, 늘 좋은 평판에 목말라했고,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일을 처리해야 직성이 풀렸던 제 성격이 금방 바뀔 리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살기 위해 뜯어고치는 훈련을 쉴새 없이 했습니다. 아내가 퉁명스럽게 대하면 '오늘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은가 보군' 하며 비위를 슬쩍 맞춰줬습니다. 언어가 불편해 일본 친구들과 자유롭게 어울리지 못하는 둘째 딸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지만, 신나게 숙제하는 모습에서 기쁨을 찾았습니다.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이 맛없다고 큰딸이 외면하면 "건강에 좋은 음식을 아빠에게 양보하는구나" 하고 한마디 한 뒤 제가 즐겁게 먹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 비우기'에 차츰 익숙해졌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암을 꺾고 빨리 복직하겠다는 생각, 회사에서의 내 존재가 희미해질 것이라는 걱정도 사라졌습니다. 한참만에 돌아온 직장 분위기는 예전 그대로입니다. 여전히 건강에 신경을 써야 하는 입장에선 다소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바뀌었습니다. 일은 즐겁고 능률적으로 하되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 애씁니다. 제 생각을 고집하거나 앞세우기보다는, 먼저 저를 비우려고 마음먹습니다. 제가 스트레스받는 일, 남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이전보다 훨씬 줄었습니다. 암이 없었다면 이런 제 모습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암이 고맙습니다.

 

홍헌표 디지털뉴스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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