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는 신라 효공왕과 신덕왕 양조의 국사인 낭공대사의 백월서운탑비(白月栖雲 碑)다. 낭공은 당에 유학하고 돌아와서 왕가와 불교계에서 함께 숭앙을 받던 고승이다.

 

사후에 최인연이 비문을 지었으나 미처 세우지 못하였는데 고려 광종(光宗) 5년(954)에 봉화 태자사에다 비를 세우면서 서목(瑞目)이란 중이 김생의 글씨를 집각하였다. 이조 중종 때에 비를 영천군(현재 영주) 영천면 휴천동에 옮겼는데 절반이 부러진 것을 다시 붙여서 1918년 현 장소인 경복구에 옮겨 놓았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낭공비는 집자일망정 왕희지의 성교서(聖敎序)와 같이 김생의 글씨를 연구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자료이다.

 

당시 당과 신라에 새로 유행하던 구양순(歐陽詢)이나 저수량(猪遂良) 유(流)를 따르지 않고 진과 남조의 필법을 모방하면서도 획에 있어서는 굴고 가는 것이 한획 가운데서도 변화를 일으키며 선은 곧은 것과 굽은 것이 미묘한 감정을 살리어 한 자에서 음양향배(陰陽向背)의 묘를 읽을 수 있게 한 것은 그의 천재적 예술성을 말해주는 것으로 우리를 감탄케 한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역대의 서예가 중에서도 이렇게 격조와 재기가 구비한 신품은 볼 수 없다. 고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제현서결평론(東國諸賢書訣評論)에서 김생을 신품 제일에 높은 것은 당연한 평이다.


현 낭공비의 측면에는 1509년(中宗 4년)에 영천 군수 이항(李抗)이 태자사에서 영주로 옮겨온 사실을 적은 기문이 박눌(朴訥)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참 고 문 헌>


·임창순 한국미술 전집 II 서예.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라는 이름에서 태자사는 비석이 서있던 절의 이름이고 ‘낭공’은 승려가 죽은 후 왕이 내린 시호(諡號)이다. 또 백월서운탑비의 ‘백월서운’은 낭공대사의 사리탑을 세우고 역시 왕이 내려준 탑의 이름이다. 이처럼 시호와 탑호를 갖춘 승려는 국가의 왕사나 국사 등을 지낸 고승임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이후 일반적으로 이비를 지칭하던 대로 ‘백월비’라고 줄여서 부르기로 한다. 현재 백월비는 국립박물관으로 이전되어 있는데 이것은 1918년에 일제의 조선총독부에서 경복궁으로 다시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비가 제자리를 잃은 것은 조선 중종 때로 올라간다. 중종 4년(1509) 가을[秋] 8월 영천(榮川:지금의 경북 영주) 군수(郡守)로 온 낙서(洛西) 이항(李沆)은 군수로 온 이후 이웃 봉화에 김생이 쓴 글씨가 있는 비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비석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이항은 어릴 때부터 김생 필적을 안평대군이 편찬한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에서 보고 김생의 글씨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마침 자신이 군수로 부임한 곳에서 가까운 곳에 김생의 글씨로 된 비석이 있다하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때 이 비는 들풀 속에 묻혀서 비바람을 맞고 있었는데 이항이 비를 보호하기 위해 읍내의 자민루(字民樓)라는 누각 아래로 옮겨서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사람들이 함부로 출입하는 것을 방지하였다. 그러나 이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탁본을 하여 이 비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비도 많이 훼손되었을 것이다. 이항은 자신이 이 비석을 찾아내어 자민루로 옮긴 경위를 글로 지어 당시 영남의 이름난 선비 박눌(朴訥)에게 글씨를 쓰게하여 비석의 측면에 새겼다.

 

이처럼 비석을 조사한 기록을 비석의 측면 빈 곳에 새기는 것은 지금으로 보면 문화재를 훼손한 것이지만 조선 후기의 추사 김정희도 즐겨 하였으니 당시의 일반적 관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비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게 되고 이윽고 서울까지 올라간 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비석에 새긴 글씨 덕분이다. 이 비의 글씨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이름난 명필로 꼽히는 신라의 김생이 쓴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김생이 직접 쓴 것은 아니고 김생이 쓴 글씨 중에서 비석의 글자에 맞는 것을 모아 편집한 것으로 이렇게 유명한 사람의 글자를 모아 문장을 편집하는 것을 집자(集字)라고 부른다. 또 집자하여 새긴 비석을 집자비라고 한다. 이 비가 김생이 직접 문장을 쓴 것이 아니라고 해도 현재까지 전하는 김생의 글씨 중에서는 가장 분명하고 글자수도 많아 조선시대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비석의 탁본을 얻는 것이 소원이었을 만큼 유명한 존재였다.

김생은 부모가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탓으로 그 출신조차 알 수 없는 사람인데 평생 붓을 잡아 글쓰기에 정진하여 천하명필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의 글씨가 명필로 인정받은 것은 송나라에서 왕희지의 글씨로 알았다가 후에야 김생의 글씨인 것을 알고 동방의 서성(書聖)으로 칭송했다는 일화를 남길 정도였다. 김생의 글씨는 조선조에도 선비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글씨를 구하기 어려웠으며 겨우 이 태자사 백월비의 탁본을 구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장서각 소장 탁본첩 중에는 중종 때 사헌부 대사헌이던 손중돈이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김생서법첩(金生書法帖)이 있는데 이로보아 이 비석은 김생의 글씨를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으로 왕실에서도 매우 귀하게 여기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태자사지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청량산 김생굴이 있다. 이 김생굴은 김생이 10년동안 글씨를 닦았다고 전하는 곳으로 김생은 이 일대에서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전설들도 모두 태자사 백월비로 인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앞에 말한 대로 이 비는 탑비이다. 낭공대사가 죽은 후 나라에서 그 사리를 모신 백월보광탑을 세워주고 탑과 함께 세운 것이다. 그런데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낭공대사는 울산의 석남사(石南寺)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낭공대사는 신덕왕때 여제자 명요부인(明瑤夫人)이 석남산사(石南山寺)로 모시게 되었고 대사는 그 곳이 자신이 임종할 곳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석남사로 온 바로 일년 뒤 916년 2월 85세로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신종(信宗) 주해(周解) 임엄(林儼) 등을 비롯하여 모두 500여명이나 되는 많은 제자를 남겨 불법을 잇게 하였다.

따라서 대사의 부도탑은 석남사에 있어야 한다. 현재 석남사에는 보물 제369호로 지정된 도의국사 사리탑이라고 전하는 부도가 있는데 최근 이 부도가 낭공대사의 부도라는 설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이 부도는 높이 3.53m에 이르는 팔각 원당형(八角圓當形)으로 하대석(下臺石)에는 사자(獅子)와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중대석(中臺石)에 있는 창모양의 안상(眼象) 속에는 꽃무늬띠를 새겼다. 8판 연꽃좌(蓮花臺座) 위에 놓은 탑몸돌에는 신장(神將)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탑비는 일반인들에게는 묘비나 마찬가지이다. 묘비가 묘와 함께 있듯이 탑비는 탑과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백월비는 석남사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면 백월비가 왜 안동의 산골 태자리에 있었을까? 그것은 백월비의 음기(陰記:비의 뒷면에 새겨진 기록)에 보면 짐작이 간다.


대사가 916년 세상을 떠나자 경명왕은 시호(諡號)와 탑호(塔號)를 내리고 이어서 당시 신라 최고의 문장가인 최인연(崔仁?) 시랑(侍郞)에게 칙명으로 비문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양쪽으로 신라를 위협하고 있어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따라서 대사가 아무리 훌륭한 승려라고 해도 국가에서 대사의 비석을 세우는 데 힘을 쓰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몇 년 뒤 고려가 세워지고 후삼국이 다시 평정되어 나라가 안정되게 되자 대사의 제자들이 비석을 세우는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고려 광종 5년(954) 7월 15일에 그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양경(讓景)이란 승려가 태자사에 있으면서 비석을 세우게 되어 대사의 비석은 대사가 입적한 울산 석남사가 아닌 지금의 안동 도산면 태자사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비석의 글씨를 김생글씨로 모아 편집한 사람은 단목(端目)이라는 승려이다. 한 사람의 글씨를 모아 긴 문장을 재구성하는 것은 글자만 뫃아 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문장의 흐름에 따라 어울리는 글자를 배치하여 문장 전체가 생동감이 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니 집자(集字) 자체도 예술행위라 할 만하다. 또한 글자를 새기는 일은 명필의 글자에 기운을 불어넣는 일이니 역시 뛰어난 예술혼을 지닌 조각가가 아니면 안될 것이다. 그래서 비에는 글자를 새긴 사람들의 이름도 빼지 않는다. 이 비석의 글자를 새긴 사람들은 숭태상좌(嵩太尙座)를 비롯한 네 사람이었다.

출처 : 豊友會
글쓴이 : 시보네/54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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