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충화면 팔충사..

백제의 마지막을 장식한 성충, 흥수, 계백..

그리고 부흥 운동에 앞장선 복신, 도침, 해오화상, 곡나진수, 억레복류..등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곳 충화면 지역은 계백의 전설이 많다..

계백은 혜오화상으로부터 무예를 배웠다고 한다..

충화면 천당리에는 계백의 고향이라는  표뜸[標村]’이라고도 불리는 상천(上天)마을이 있으며,

천등산 마루 동북쪽 정상에는 계백이 수련을 했다는 토굴터와 수련하면서 물을 먹었다는 백충대 우물터가 남아 있단다.

또한 계백이 수련할 때 바위를 디딘 곳에 자국이 생겼다는 장수 발자국 바위 등이 전해지고 있단다..


**지나다 보니, 천당리에서 천등산을 거쳐 서동요테마공원까지 트레킹 코스 표지도 있다..



사당의 주련을 읽어본다..


이충규간계옥성심

수유사사불변소심

사군신도살신호국

사승일패중과부적


충성으로 간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로하고

비록 죽을지언정 마음을 변치않고

임금을 섬기는 신하의 길은 몸을 받쳐 나라를 지킴이니

4승 1패이나 중과부적으로 당해내지 못했네..




4승1패는 계백장군의 황산벌 싸움을 말하는가?

김유신이 귀족의 아들인 화랑 반굴과 관창을 보내 전사를 불사하는 심리전을 전개하여 사기를 돋우워 총공세를 취하자..

5만의 신라군을 당하지 못하고 계백은 전사한다..



복신은 무왕의 조카로 부여, 공주가 함락되고 의자왕 등 왕족이 당으로 끌려가자, 주류성에서 도침 등과 부흥운동의 깃발을 올린다.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을 모셔와 왕으로 옹립한다..

한때 부흥운동 세력이 부여, 공주를 수복할 정도로 기세를 올리자, 나당이 증원군을 파견하여 격돌이 벌어진다.

<참고로 복신은 부여군 은산면에서 2년에 한번 씩 열리는 은산별신제의 장군신이다.>


그무렵 왜는 국력을 모아 백제 구원군을 파병한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성립하기전 400척 전선에 3만명의 군대를 파병한 이유가 무엇일까?


1설, 왜 조정이 당시 백제의 22개 담로 중 하나였기 때문

2설, 왜 조정과 백제 왕실은 피를 나눈 형제국가였기 때문

3설, 백제가 왜의 속국이어서 지원하고, 장차 당나라의 왜 침입을 선제 방어하기 위해

4설, 동맹국의 의리를 지키위해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의 전성기 때 판옥선이 100여척이고 수군이 1만여명이었다는 것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그 1000년 전인 663년에 400척에 3만명이라는 것은 왜 조정의 국력을 다 쏟은 것이라고 보인다.

지금도 월남전 파병이나 이라크에 소규모 파병에도 국론이 분열되는 상황인데, 그 당시 모든 국력을 쏟아 부은 것은  

백제와 왜 사이에 피치 못할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에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것은 피를 나눈 관계일 가능성이 많다.

단순히 동맹관계 정도에서 할 수 있는 성의를 넘은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1설이나 2설이 맞는다고 본다..



그러나, 백촌강 전투는 백제, 왜 연합군의 참패로 끝난다..

그리고 백제의 부흥운동도 저물었다..

그때 수많은 백제 귀족들이 왜로 탈출한다. 마치 베트남 멸망후 보트피풀 같은 상황이 아니었을까?


곡나진수

달솔 곡나진수도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주류성이 함락되자  좌평 여자신(餘自信),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억례복류(憶禮福留) 등과 함께 왜로 탈출한다.

671년 왜 조정에서 대산하(大山下) 벼슬을 받는다.


억례복류

달솔출신, 쿠슈 방어를 위해 달솔 사비복부(四比福夫)과 함께 백제식 산성을 쌓는다. 대산하 벼슬을 받았다..

그의 후손은 이시노무라치(石野連)씨가 되어 수공업에 종사한다.


목소귀자

달솔, 왜에서 대산하(大山下) 벼슬을 받고  덴지(天智) 천왕 아들인 오오토모(大友) 태자의 빈객이 되었다.


여자신

백제가 멸망할 무렵에 당시 관등은 달솔. 

백제부흥운동에서 맹활약을 하여 백제 사람들이 귀실복신과 함께 '좌평(佐平)'으로 높여 불렀다고 한다.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패퇴하자, 동년 9월 24일에 여자신은 일본 수군과 함께 탈출해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 등과 함께 왜로 들어갔다.

669년, 여자신, 귀실집사 등 백제 유민 700명과 함께 일본 간자키 군의 서남쪽에 옮겨 살게 되었다.

671년 정월, 사택소명과 함께 종 4위 대금하(大錦下)의 관직을 제수받고 법관대보로 임명되었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다카노미야코(高野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귀실집사

복신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부흥운동 당시 벼슬은 달솔,

662년 유민 400여 명과 왜국으로 가서, 오오미국(近江國) 가마에군(神前郡)-후의 가마자키군(神崎郡)에 정착했다.

665년 소금하(小錦下)에 임명된다,

669년, 좌평 여자신(餘自信)과 좌평 귀실집사(鬼室集斯) 등 남녀 700명이 오오미국(近江國) 가모우군(蒲生郡)에 옮겨졌다(오늘날의 일본 시가 현 가모 군 히노(日野) 정). 그들의 후손이 스즈카 산맥 류오산 아래에서 촌락을 이루고 살면서 귀실집사를 모시는 귀실신사(기시쓰 신사)를 관리한다고 한다.

 왜에서 26년을 살다가 688년 세상을 떠났다




<일본 귀실신사>


이런 인연으로 은산별신제를 여는 부여 은산면과 귀실신사를 모시는 일본 시가켄 가모군(蒲生郡) 히노쵸(日野町)는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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