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연산면 황산성 가는 길이 연산향교에서 시작된다는 정보를 듣고 연산향교에 차를 대고, 향교 좌측 담장을 끼고 끼고 올라갔다가 길을 찾지 못하고 내려왔다.

향교 분에게 물어보니, 홍살문 아래 혜림선원 옆길로 올라가라 한다..

 

혜림선원을 지나자, 글씨들이 눈길을 잡는다.

간자치인 내가 참새처럼 그냥 지나칠리 없다.

 

늘 비우고 즐겁게 웃고 살자..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時不再來)

 

난초는 은자의 지조를 지녔으며, 대나무는 군자의 덕을 품고 있다..

그냥웃자 전시장??

그때 주인장이 나와 커피한잔 하고 가라신다.

길초입부터 지체하기가 뭣해 주춤거리다가 워낙 은근히 권유하는 바람에 폐를 끼치러 들어갔다.

 

 

도회지 아파트에 살면서 다양한 직종을 섭렵하다가 이제 은퇴하고, 고향땅에 들어와 놀면서 봉사도 하고 지낸단다.

 

1층엔 황토방도 있고, 2층엔 몽고식 게르로 꾸며, 여름에는 천장을 열고 고기를 구워먹는단다.

 

난타 동호인들과 난타를 즐기고, 섹스폰 연주하며, 서예도 즐기는 풍류가다..

물론 틈틈히 연주 봉사도 다닌단다..

 

그리고 어린이집 아이들 체험 공간으로도 활용하고...

버려지는 접시를 가져다가 아이들 글씨 만들기 놀이도 하면서..ㅎ

 

이 공간은 행복이 스스로 연주하는 공간이란다.

누구든 그 연주를 감상하면 된다..

 

커피를 서로 나누는 동안 그가 최근에 쓴 글씨를 보여준다.

"총명한 사람은 명이 짧고, 미련한 사람은 오래산다"

머리 많이 쓰고 바쁘게 살면 스트레스가 많을테지..ㅎㅎ

 

그에게 함자를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정원에 명함이 있다..

청석 한대장...

 

언젠가 날좋은 날 돼지고기 두어근에 잎새주 한병들고 찾아가 난타나 두드리다 오면 좋겠다..

 

전시장에서 커피 잘 마시고 황산성으로 오른다...

돌아보면 황산벌이 보인다..

황산벌 초입에 자리잡은 이 동네 이름이 관동리다..

원래는 관창리였단다..

관창??

황산벌에서 죽은 관창??

 

 

임도길을 올라서면 관동리 - 표정리 구간 임도와 만난다.

길 건너 올라가면 황산성이다..

 

황산성- 깃대봉 - 함지봉 - 향적산(국사봉)으로 이어지는 9km 등산로가 있다..

청석 한대장이 나에게 말하길,

자신은 은퇴후 2년간 전국의 산 정상을 노리다가 양무릎이 나가서 요즘은 만보걷기로 만족하고 산단다.

그래서 나에게 권유하기를,  당시 연배에는 무리하게 정상을 노리지 말고 둘레길을 다니는게 좋겠단다..

그의 말씀을 계룡산신이 대신하는 것으로 알아듣기로 했다..ㅎ

 

황산성에 오르니 황산벌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번에 천호산 -함박산- 깃대봉 능선에서 황산벌을 조망하였다..

그러고 보니, 백제- 신라 전선은 계룡산줄기와 대둔산줄기(천호산방향)가 장성처럼 늘어서서 

직진 출입구는 금강을 통한 공주방향과 황산벌 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신라군을 막기위해서는 1차는 대전- 옥천 사이 탄현(현 식장산 마달령)에서 막고, 뚤리면 황산성과 천호산 사이 통로(황산벌 입구, 현 1번국도)에 진을 치고 막을 수 밖에 없다.

이곳이 뚤리면 평야지대로 부여까지는 무풍지대니까..

황산벌 입구를 조망하는 이 성에 백제군의 본진이 잇었다고 한다.

성아래 백제 5천결사대에 몇일간 진군이 막힌 신라군의 화랑 관창이 나선다..

김유신 이래 젊은 화랑의 돌격은 신라군의 전통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죽는다.

그래서 성아래 지역 이름이 원래는 관창리였는데, 지금은 관동리도 바뀌엇다.

지금이라도 다시 관창리로 지명을 환원하기를 권한다..

(참고, 옥천 서화천 성왕이 전사한 부근 길 이름이 성왕로이고,  경북 경산시 원효 탄생지 부근에는 원효로가 있다..)

 

지금도 이 통로는 호남으로 가는 1번 국도과 호남선 철도가 다니는 요지이다..

과거의 요지가 현재도 요지다..

그러니, 후백제의 마지막 전투도 이곳에서 벌어질 수 밖에 없엇다.

이곳에서 승리한 고려 왕건은 건너편 산을 하늘이 도왔다는 의미로 천호산(天護山)이라 명명하고, 그 아래 개태사(開泰寺)를 창건하여 태평성대의 개막을 알렸다.

아들 신검의 배신에 분노하여 왕건에게 귀부한 견훤..

왕건이 자신의 청을 거절하고 신검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자, 홧병이 나서 개태사에서 죽었다던가??

태조의 후원을 받은 개태사는 한때 1000명의 승려가 수행하는 큰 절이 되엇다. 

그 증거로 1000명의 밥을 짓었다는 쇠솥(철확)이 지금도 남아잇다.

 

 

황산성 정상에서 보니 황산벌 우측으로 탑정호 일대와 계백장군묘 지역이 보인다..

관창의 분전으로 분기탱천한 신라군의 맹공으로 황산벌 입구가 뚫리자, 그때부터 파죽지세라..

백제군도 어쩔 수 없이 밀리기 시작하고, 계백장군도 전사한다..

그가 전사한 부근에 계백장군묘가 생기고, 현재는 백제군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등산로는 계룡산으로 이어지는데, 깃대봉- 함지봉이 눈앞이다.

 

깃대봉까지 올랐으나, 조망은 별로다..

금년 최강추위라는 날, 무리하지 않고 돌아선다..

돌아오면서 보니, 황산성이 성답게 우뚝하다..

 

이 성 위치는 나제 전쟁시 부여방어에 필수적인 곳이다. 

 

성에서 내려와서 표정리 방향 임도로 걸어간다..

자료에 의하면, 이 임도는 상월면 대명2리 금강대학 입구까지 20km 정도 이어진다고 한다..

 

 

길가에 부여왕족 부여 서씨 묘소가 보인다..

자료를 찾아보니, 부여 서씨의 시조는 의자왕 아들 부여융이라고 한다.

부여융은 백제 최후의 날 계룡산 신원사 고왕암에 숨엇다가 당군에게 잡혔다는 전설이 잇다.

그는 당나라에 끌려갓다가 당나라 황제에게 서씨 성을 받고, 웅진도독으로 부임하여 당나라의 백제통치에 협력하였다고 한다. 

 

안내지도도 없이 황산성둘레길이라 해놓으니, 좀 뜬금없어 보인다..

 

 

한참 임도를 걷다가 꽃피는 봄날을 기약하며 돌아섰다.

주차장소인 연산향교로 돌아오면서 다시 황산벌을 바라본다.

땅은 말이 없지만 역사를 증거한다..

 

 

 

<오늘 걷기> 연산향교 주차장 - 혜림정사 - 그냥웃자전시장 - 임도삼거리 - 황산성 - 깃대봉 - 임도 삼거리 - 표정리 - 원점회귀 약 7km



부여 충화면 팔충사..

백제의 마지막을 장식한 성충, 흥수, 계백..

그리고 부흥 운동에 앞장선 복신, 도침, 해오화상, 곡나진수, 억레복류..등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곳 충화면 지역은 계백의 전설이 많다..

계백은 혜오화상으로부터 무예를 배웠다고 한다..

충화면 천당리에는 계백의 고향이라는  표뜸[標村]’이라고도 불리는 상천(上天)마을이 있으며,

천등산 마루 동북쪽 정상에는 계백이 수련을 했다는 토굴터와 수련하면서 물을 먹었다는 백충대 우물터가 남아 있단다.

또한 계백이 수련할 때 바위를 디딘 곳에 자국이 생겼다는 장수 발자국 바위 등이 전해지고 있단다..


**지나다 보니, 천당리에서 천등산을 거쳐 서동요테마공원까지 트레킹 코스 표지도 있다..



사당의 주련을 읽어본다..


이충규간계옥성심

수유사사불변소심

사군신도살신호국

사승일패중과부적


충성으로 간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로하고

비록 죽을지언정 마음을 변치않고

임금을 섬기는 신하의 길은 몸을 받쳐 나라를 지킴이니

4승 1패이나 중과부적으로 당해내지 못했네..




4승1패는 계백장군의 황산벌 싸움을 말하는가?

김유신이 귀족의 아들인 화랑 반굴과 관창을 보내 전사를 불사하는 심리전을 전개하여 사기를 돋우워 총공세를 취하자..

5만의 신라군을 당하지 못하고 계백은 전사한다..



복신은 무왕의 조카로 부여, 공주가 함락되고 의자왕 등 왕족이 당으로 끌려가자, 주류성에서 도침 등과 부흥운동의 깃발을 올린다.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을 모셔와 왕으로 옹립한다..

한때 부흥운동 세력이 부여, 공주를 수복할 정도로 기세를 올리자, 나당이 증원군을 파견하여 격돌이 벌어진다.

<참고로 복신은 부여군 은산면에서 2년에 한번 씩 열리는 은산별신제의 장군신이다.>


그무렵 왜는 국력을 모아 백제 구원군을 파병한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성립하기전 400척 전선에 3만명의 군대를 파병한 이유가 무엇일까?


1설, 왜 조정이 당시 백제의 22개 담로 중 하나였기 때문

2설, 왜 조정과 백제 왕실은 피를 나눈 형제국가였기 때문

3설, 백제가 왜의 속국이어서 지원하고, 장차 당나라의 왜 침입을 선제 방어하기 위해

4설, 동맹국의 의리를 지키위해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의 전성기 때 판옥선이 100여척이고 수군이 1만여명이었다는 것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그 1000년 전인 663년에 400척에 3만명이라는 것은 왜 조정의 국력을 다 쏟은 것이라고 보인다.

지금도 월남전 파병이나 이라크에 소규모 파병에도 국론이 분열되는 상황인데, 그 당시 모든 국력을 쏟아 부은 것은  

백제와 왜 사이에 피치 못할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에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것은 피를 나눈 관계일 가능성이 많다.

단순히 동맹관계 정도에서 할 수 있는 성의를 넘은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1설이나 2설이 맞는다고 본다..



그러나, 백촌강 전투는 백제, 왜 연합군의 참패로 끝난다..

그리고 백제의 부흥운동도 저물었다..

그때 수많은 백제 귀족들이 왜로 탈출한다. 마치 베트남 멸망후 보트피풀 같은 상황이 아니었을까?


곡나진수

달솔 곡나진수도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주류성이 함락되자  좌평 여자신(餘自信),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억례복류(憶禮福留) 등과 함께 왜로 탈출한다.

671년 왜 조정에서 대산하(大山下) 벼슬을 받는다.


억례복류

달솔출신, 쿠슈 방어를 위해 달솔 사비복부(四比福夫)과 함께 백제식 산성을 쌓는다. 대산하 벼슬을 받았다..

그의 후손은 이시노무라치(石野連)씨가 되어 수공업에 종사한다.


목소귀자

달솔, 왜에서 대산하(大山下) 벼슬을 받고  덴지(天智) 천왕 아들인 오오토모(大友) 태자의 빈객이 되었다.


여자신

백제가 멸망할 무렵에 당시 관등은 달솔. 

백제부흥운동에서 맹활약을 하여 백제 사람들이 귀실복신과 함께 '좌평(佐平)'으로 높여 불렀다고 한다.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패퇴하자, 동년 9월 24일에 여자신은 일본 수군과 함께 탈출해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 등과 함께 왜로 들어갔다.

669년, 여자신, 귀실집사 등 백제 유민 700명과 함께 일본 간자키 군의 서남쪽에 옮겨 살게 되었다.

671년 정월, 사택소명과 함께 종 4위 대금하(大錦下)의 관직을 제수받고 법관대보로 임명되었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다카노미야코(高野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귀실집사

복신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부흥운동 당시 벼슬은 달솔,

662년 유민 400여 명과 왜국으로 가서, 오오미국(近江國) 가마에군(神前郡)-후의 가마자키군(神崎郡)에 정착했다.

665년 소금하(小錦下)에 임명된다,

669년, 좌평 여자신(餘自信)과 좌평 귀실집사(鬼室集斯) 등 남녀 700명이 오오미국(近江國) 가모우군(蒲生郡)에 옮겨졌다(오늘날의 일본 시가 현 가모 군 히노(日野) 정). 그들의 후손이 스즈카 산맥 류오산 아래에서 촌락을 이루고 살면서 귀실집사를 모시는 귀실신사(기시쓰 신사)를 관리한다고 한다.

 왜에서 26년을 살다가 688년 세상을 떠났다




<일본 귀실신사>


이런 인연으로 은산별신제를 여는 부여 은산면과 귀실신사를 모시는 일본 시가켄 가모군(蒲生郡) 히노쵸(日野町)는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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