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고창신)

 

옛 것을 법으로 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장암 이곤순전...

 

내 첫 사부의 고교 동창..

내 둘째 사부의 사부..

 

글씨는 일중 김충현에게 배우고,

한문은 학산 조종업으로부터 배웠다..

 

글씨는 예서, 행서 초서, 한글까지 다양한 글씨가 가득하다..

 

서권기는 모르겟고, 그저 문자향만 가득 맡고 와서

여기에 좀 나누어 드린다..

 


우계 성혼의  우음이란 시를 장암 선생씀


 

반평생 산에 누워 한 일이 없으니

뉘라서 나를 보고 시비할손가

 

저런 경지에 언제 다다를까..


만해 한용운의 선시를 장암 씀


 

먹구름 거치고 고월이 드러나니

사방 멀리 나무까지 역역히 나타난다..

 

이는 얼마나 성성한 경지인가..

유교의 대가나 불교의 대가나 장군 멍군할 정도..



해불양수

 

바다는 물은 사양하지 않는다..

바다의 포용력을 누가 당하랴..

 

위 세글씨 중 공짜로 가지라면 어느 것을 가질까요?

 

 

 


(장암 서, 순천자흥 : 순리를 따르는자가 흥한다.)

 

“속기(俗氣)를 벗고 명리(名利)에 초연해지면 글씨는 맑아지는 법입니다. ”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중견 서예인 장암 이곤순 선생(60)은 “서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성과 단순성”이라며 “어떤 예술이든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면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라고 강조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적인 품격이나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서예인으로서의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장암 선생은 대전 시립미술관에서 대전·충남 서예사에 큰 획을 그을 전시를 열고 있다. 40년 넘게 서도의 길을 꼿꼿하게 지켜온 장암 선생을 만나 굳건하게 정립한 ‘장암 풍’ 서예의 미학과 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대담=송신용 편집국장>

-서예에 입문하게 된 배경이나 동기가 있을 텐데.

▲처음 붓을 잡은 인연이 된 것은 어린시절 천자문을 배울 때부터다. 작은 손으로 붓을 쥐고 저녁 때마다 아버지 앞에서 한자를 썼다. 천자문을 통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서예가 체질화가 됐다고 할까…. 그리고 고등학교 때까지 서예가 뭔지도 모르면서 틈틈이 습자를 썼다. 인연이 됐는지 스승이신 일중 김충현 선생님의 교본으로 습자를 했다. 충남대학교에 입학하고 1967년 동방연서회에서 주최하는 서예대회에 나가 상을 타게 됐다. 일중 선생님이 이사장으로 계셔서 그 뒤로 꾸준히 교분을 갖게 됐다. 자주는 못 가뵙고 방학 때 틈틈이 찾았고,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자주 만나뵐 수 있었다.

-37년 만에 개인전을 열게 됐는데 그 동안 전시회를 갖지 않은 이유가 뭔가.

▲대학 시절에 한 번, 학교를 졸업하고 멋모르고 의기로 한 번, 전시회를 열었다. 그 이후부터 실력을 쌓기 위해 서예공부에만 전념했다. 개인전은 자신이 이룩한 작품 세계를 한번에 보여주거나 중간마다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인데, (나는) 뭔가 하나를 크게 이뤄놓고서는 하고자 했던 바람이 있었다. 또 전시 때문에 제자나 주변사람이 고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개인전을 갖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명필인 추사도 작품을 통해서 널리 알려지지 않았나. 작품이 좋다면 후대에 자연스레 전해지게 되는 것이지 특별한 변화도 없이 전시회를 연례행사처럼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럼 다음 전시는 언제쯤 가질 생각인가.

▲기약은 없지만 용트림이라고나 할까. 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되겠지. 모든 것이 무르익고 성숙돼야 세상에 선보이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예술이든 자연을 거역하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동양예술은 자연 친화적이다. 상형문자는 자연의 형태를 본뜬, 자연에서 나온 것이다. 자연에 나온 문자를 가지고 서예를 하고 또 서예를 통해 다시 자연에 동화되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성과 단순성이라고 생각한다. 복잡한 것은 함축하고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것을 만드는 작업을 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속을 벗어나게 되면 초연해질 수 있고 글씨도 맑아질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많은 광석을 용광로에 넣고 순도 99.9%를 얻어낼 수 있는 것처럼 글씨의 본질적인 것을 찾을 때 순수함을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쉽지는 않다.

-서예를 시작할 때 대전의 서예계는 어땠는가.

▲대전은 서예의 본 서법과 거리가 먼 불모지였다. 어린 마음에 제대로 서예의 뿌리를 내려야겠다고 생각해 (성서동인회)를 만들었다. 충남대 2학년 때인 1967년, 서예의 기본인 한자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충남대 서예연서회를 조직했다. 학산(鶴山) 조종업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회원들끼리 공부를 하고 한문도 배우고…. 훗날 충남대 서예연서회가 대전·충남 서예의 모체이자 핵이 됐다. 초대작가 10여 명 등 전국적으로 쟁쟁한 서예가인 야천 이동희, 송암 정태희, 염호택, 현강 박홍준 등 많이 배출해 냈다.

-그 당시 동양화 등 다른 미술가들과 교류가 있었나.

▲그림하고 글씨는 같다. 그림을 붓으로 힘있게 쓰면 서예가 되고, 글씨를 회화처럼 그리면 그림이 되는등 본류는 같다. 심향 박승무, 풍경화가 이동훈, 서양화가 이인영, 입립, 정명희, 도예가 이종수 등과 친분을 쌓고 교류를 했다. 대전에서 미술이나 서예분야가 활성화 된 것은 충청남도전이 생긴 1971년도부터다. 첫해 출품작 수가 충청남도 통틀어 17여 점밖에 안 됐다. 지금은 800여 점 나오니까 대단한 발전을 한 것이다.

-붓을 잡은지 50년이 넘고, 서예를 시작한 것은 40여년 됐다. 한 길을 걷는데 엄청난 고집이 필요했을 것이다. 서예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깔고 지행합일적인 품격이나 자세를 갖지 않으면 서예인으로서의 의미가 없다. 논어 중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人不知而不이면 不亦君子乎아’(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음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개념을 마음속에 명심해두고 서도의 길을 걷고 있다. 서예는 운명과 같다. 또 딴 재주가 없으니까.(웃음) 고통이 따라도 ‘이것이 나의 숙명이다’고 생각하고 붓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 괴롭고 힘들어 잠시 쉬어도 며칠이 지나면 또 다시 붓을 잡게됐다.

-서예인을 많이 배출했다. 제자들에게 엄한 호랑이, 존경받는 스승으로 꼽히기도 한다. 제자 양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자식을 정신과 육체의 계승자라고 본다면 제자는 정신과 예술의 계승자이다. 연령을 떠나서 내가 생각하는 서예인으로서의 비인부전(非人不傳)해 왔다가도 안 돼서 내쫓은 사람도 있고, 내가 싫어서 떠난 사람도 있고, 예술에 동화가 돼 같이 공부하는 사람도 있다. 학교를 포함해 거쳐간 사람이 5000명 이상이 되지 않을까. 제자를 양성할 때 일중 선생이 나를 가르칠 때의 교수법을 그대로 한다. 국전 등에 작품을 낸다 하면 스승의 작품을 그대로 베껴 쓰라는 것이 비일비재 하지만 나는 제자 스스로 작품을 하도록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세월이 쌓이면 능력있는 제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중요하다.

-서예는 향유하는 사람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조명이 안된 부분이 많다. 부흥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대전은 공공 미술관, 서예학과도 많지만 서양화를 중심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주축이 돼, 그들만의 헤게모니가 형성돼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 나라, 제 민족의 미술을 제일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무원 등 행정을 하는 사람은 서양문화가 최고인 줄 안다. 우리네 보석이 있는데 발견하지 못해 안타깝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고유 유산인 서예를 조금이라도 알리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누구나 쉽게 서예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전문적으로 눈을 뜨지 않는 한 깊이 있게 감상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붓으로 쓴 글씨에 대해서는 조금씩 향수를 갖고 있을 것이다. ‘이곳은 글씨체가 힘있게 나갔다’라는 생각과 함께 획을 발견하면 그 자체로 하나의 감상이 될 수 있다. 서예는 격, 기운이 다르기 때문에 한자 등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공부를 하면 더 즐겁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1만여 명이 넘는 관람객이 전시장을 찾았다. 80세 이상의 연로하신 분들도 어린손자의 손을 붙잡고 서예를 보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 문자는 몰라도 서예 속에서 어떤 기운을 느낀는 것 같다. <정리 김효숙·사진 장길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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