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아지경

   지난 월드컵 때  우리 선수 몇몇은 득점 당시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운동선수들이 흔히 말하지만,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쓰고 듣는 이말.

히딩크는 선수들에게 “긴장이 없는 집중과 경기를 즐기는 마음”을 강조했지만, 어떻게 보면 무아지경을 가장 적절히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무아(無我)사상은 불교사상의 핵심이자 독창적인 발상이다.

무아사상 탐구의 사례집이라 할 수 있는 벽암록은 중국 역대고승의 선화(禪話) 100개를 편집한 책이다. 우선 1칙이 인상적이다.

 

2. 달마가 모른다고 말하다(達磨不識, 제1칙)

  달마대사는 인도 향지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며, 석가모니의 의발을 넘겨받은 제1조 마하 가섭 이후 제27조 반야다라의 법을 잇고, 스승의 부촉을 받아 520년 무렵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 선불교의 초조(初祖)로 불린다.

이 이야기는 달마가 소림사로 가기 전에 있었던 일을 화두로 삼고 있다.

당시 남중국의 양무제는 수많은 절을 짓고 수행승을 공양하여 불심천자라 소문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짐이 황위에 오른 이후 수많은 절을 짓고, 경을 간행하고, 중을 기른 것이 셀 수가 없소, 그리하여 내게 어떠한 공덕이 있겠소” 묻자, 달마는 “아무 공덕이 없습니다.” 답한다.

“무엇이 불교의 본질이 되는 가장 성스러운 진리요?”

“텅비어서 성스럽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짐과 마주한 당신은 누구요”

“모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연상시키고, 맹자가 양혜왕에게 왜 하필 이익을 따지느냐고 묻는 형국이 아닌가?         

당시 달마가 가져왔다는 능가경은 유식학파의 기본교재라 할 수 있는데, 오직 마음이 일체의 현상을 만들어 내고, 해탈은 사고의 대상을 왜곡하지 않는 ‘순수한 사고‘가 유지되어야 가능하다는 교설을 담고 있다.

양무제야 그 이치를 알 수 없었고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 생각할 밖에, 달마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 소림사 뒤편 토굴에 은거하며 9년간 면벽수행에 들어간다.

 

3. 제6조 혜능(慧能)

절에 가면 법당의 바깥벽에 그려진 그림을 볼 수 있는데, 대개 불교설화나 고승의 일화를 담고 있다. 그 중에 왼쪽 팔이 잘려진 채 피를 흘리고 서있는 사람의 그림이 있다.

한 팔을 잘라 구도의 의지를 밝힌 제2조 혜가(慧可)가 달마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장면이다.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편안케 해주소서”

“그 마음을 가져 오라, 그러면 편안케 해주리라”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됐다, 이제 마음이 편안한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고 하는데, 달마는 그 마음의 실체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가?

혜가의 법을 이은 제3조 승찬은 신심명(信心銘)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도에 이르는 길은 어려움이 없다. (至道無難)

단지 차별하고 선택하는 마음이 없다면 (唯嫌揀擇)

미움도 사랑도 버리면 도는 통연히 명백하리라.(但莫憎愛 洞然明白)

이 글을 보면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인식과 의식작용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위 글을 주제로 하여 이루어진 화두가 벽암록 제57칙, 제59칙이다.

다시 제4조 도신과 제5조 홍인을 거쳐 제6조 혜능(慧能)에 이른다.

그는 글자도 모르는 나무꾼인데, 나무 팔러 갔다가 손님이 금강경(金剛經)을 읽는데,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 而生其心)라는 구절에 마음이 동하여 홍인 대사를 찾아가 입산 8개월만에 제5조 홍인의 의발을 전수받는다.

그가 제5조로부터 인정을 받은 게송이다.

“보리(菩提)에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닐세.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인데 어디에 때가 끼고 먼지가 일 것인가.“

혜능과 그 제자들의 활동에 의하여 중국의 선종이 전성기를 맞게 된다.

 

4. 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과 함께 불교의 3대 기치(三法印)의 하나인 이 말은, 모든 존재나 현상에는 고정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라는 것이 없다는 의미라 한다.1)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은 자아가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의 존재는 5온(五蘊, 즉 육신(色), 감각(受), 지각(想), 욕구(行), 인식(識)이 잠시 뭉쳐 있다는 것이다. 이 5온은 그것을 한데 통합한다는 자아라는 관념에 매달려 있는데, 실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만이 이어질 뿐.

“괴로움은 있다. 그러나 괴로워하는 자는 없다.

  행위는 실행된다. 그러나 행위하는 자는 없다.

  평화는 있다. 그러나 평화 속에 머무는 자는 없다.

  길은 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는 자는 아무도 없다.“(붓다고사의 청정도론)

위에서 혜가가 불안한 마음을 말했을 때 달마가 마음을 가져오라고 한 가르침은 이 무아사상과 연관지으면 좀 이해 될 듯도 하다.

 

5. 벽암록에 관하여

  선(禪)이라는 것은 불입문자(不立文子),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방법을 취한다고 하지만, 선에 관한 책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 중 이 벽암록은 ‘종문제일서’라 꼽히는데, 예로부터 전해오는 공안(화두) 1,700여가지 가운데 대표적인 100가지를 뽑아 본칙(本則)으로 소개하고 , 앞뒤로 수시와 평창을 덧붙였다.

원래 송대의 선승 설두중현이 100개의 본칙에 대한 송(頌)을 붙여 송고백칙(頌古百則)이라는 책을 냈는데, 다시 제자 원오극근이 수시(垂示), 착어(着語), 평창(評唱)을 덧붙여 벽암록이라 이름지었다.

수시란 설두가 뽑은 본칙을 읽기에 앞서 그 칙의 종지나 착안점을 제시하는 일종의 서문이고, 착어는 짤막한 단평, 평창은 해설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책이 찬술된 지 얼마 뒤에 원오의 수제자 대혜종고가 책을 불질러 버렸다 한다.

그 이유는 당시 선객들이 어느 정도 참선을 한 뒤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언행을 하고 다녀 이들을 불러 점검해보니 벽암록을 줄줄 암기하는 것을 보고, 공안선이 구두선(口頭禪)으로 전락하는 것을 염려하여 그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 대덕 연간에 장명원이라는 사람이 이 책의 사본을 찾아내어 “종문제일서 원오벽암집”이라고 간행하였고, 이를 저본으로 하여 벽암록이 널리 공간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종류의 벽암록이 출간되었으나, 필자는 조오현 역해 불교시대사 간행의 벽암록을 읽었다.

이 책은 수시와 본칙, 설두의 송이 번역과 원문이 병기되어 있고, 역자의 사족이 붙어있다.

 

6. 마조 도일(馬祖 道一)

벽암록 제3칙 마조 일면불 월면불(馬祖日面佛月面佛)의 공안에 나오는 마조 도일은 혜능의 제자인 남악 회양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 사제간의 일화가 재미있다.

마조가 좌선을 하고 있는데 스승 회양이 묻는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좌선을 하고 있습니다”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가”

“부처가 되려구요“

그러자, 회양은 기왓장을 주워 옆에 앉아 숫돌에 갈기 시작했다.

“기왓장은 갈아 무엇하실 것입니까?”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까 한다”

“기왓장을 간다고 거울이 됩니까?”

“그러면, 좌선만 한다고 부처가 되느냐”

이어 화양이 말한다. “좌선을 익히는 중이라면 선이란 결코 앉아 있는 것이 아니고, 좌불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부처는 원래 정해진 모양새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선의 추진력은 자신만의 체험을 통해 부처, 법, 깨달음 등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기까지 관습적 사고와 고정관념을 뒤엎는데 있다고 한다.

선승들은 고된 수련생활을 거쳐 내면적 성장이 이루다가 스승의 한마디 도움에 이치를 깨닫는다하여 “줄탁동시”라는 말도 있다.(벽암록 16칙)

마조는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라는 법어로 유명하다.

“도는 닦아 익힐 필요가 없다. 오직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면 된다. 나고 죽는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별난 짓을 벌이는 것을 더러움에 물든다고 하는 것이다. 단번에 도를 이루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 평소의 마음이 바로 도이니라”

평상심이 나날의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진실한 평소의 마음이라는 뜻인 것 같은데, 스트레스, 미움, 나태, 욕망이 수시로 엇갈리는 사회생활 속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마조 도일의 제자인 서당 지장으로부터 선법을 전해 받은 홍척, 도의에 의해 신라의 9산선문이 시작되었고, 마조선의 적손이라는 임제종이 태고 보우(太古 普愚)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해져 청허 휴정(서산대사)으로 이어졌다.

 

7. 흉허복실(胸虛腹實)

  국궁의 활쏘는 자세를 배우면서 흉허복실(胸虛腹實)이란 말을 들었다. 가슴은 비우고 뱃심은 두둑히 하라는 뜻인데, 일상생활의 자세로도 배울만하다고 느껴진다.

“빈 마음이 없으면 세상일이 보이지 아니하고, 실한 마음이 없으면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不虛心 不知事 不實心 不成事)”라는 옛글도 마음자리를 가르치고 있다.

가끔 생활을 하면서 능력부족과 스트레스를 느낄 때면, 결과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빈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스트레스는 완벽이나 결과에만 집착하다 보면 더욱 가중되는 것 같다.

마음을 비우는데는 가끔은 음악도 좋다.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를 들으면,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높은 곳을 향하여 갈구하는 쏘프라노의 그 간절한 음색에서 마음 속의 큰공간을 느낀다.

어떤 때 동양화의 빈 여백도 도움이 되겠지만, 사색의 계절이라는 이 가을에 번뇌잡상에 시달리는 마음을 탐구하는 선불교의 책을 읽으면서 마음의 공간에 떠다니는 날파리 같은 잡념을 제거하면 마음이 다소 비워질지 누가 알겠는가?

벽암록에서 논쟁거리에 휘말린 고양이를 죽이는 선사의 이야기(제63칙), 화상의 방귀뀌는 소리도 부처의 소리냐고 묻다가 얻어맞는 납자의 이야기(제79칙)도 재미있지만, 추운 방을 덥히기 위하여 목불(木佛)을 쪼개 군불을 지피면서 이를 따지는 원주스님에게 “다비해서 사리를 얻고자 한다”고 말하는 단하 천연선사의 이야기(제76칙)에서 자유인(自由人)을 느낀다.

벽암록은 “언어의 불완전성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 열린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실상(實相)을 보라,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정진하라, 자유자재하는 마음을 즐겨라”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치열한 구도정신, 깨달음을 위한 사제간의 인정, 깨달음에 대한 스승의 인가를 통해 후세의 교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법학도가 사례연구를 하면서 법적 마인드를 수련하듯, 벽암록은 불교적 마인드를 단련하는 사례집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벽암록에는 정답이 없다. 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것은 새로운 번뇌에 불과하니까.(終) 

-2004.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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