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기의 서체를 대표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송설체이다.
송설체는 원나라 말기의 학자였던 조맹부의 글씨체로
그의 서실(書室) 이름이 송설재(松雪齋)여서 이런 명칭이 생겨났다.
조맹부는 송나라에서까지 성행하던 당나라의 안진경체를 배격하고
왕희지의 글씨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안진경체란,
안진경체는 풍만하고 화려한 느낌을 주는 필법이다.
이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탤런트로 김혜수가 떠오른다. 한마디로 그래머 스타일이다.
그렇다면 조맹부가 돌아가자던 왕희지체는?
왕희지는 300년대의 동진 사람으로 그의 서체는 굳건하고 우아하며 마른 느낌을 주는 그런 글씨체였다. 마치 정우성(?) 같은 느낌이다.
아무튼 조맹부는 이러한 왕희지체를 본받아 굳세고, 아름다우며 결구가 정밀한 필법을 구사했고 이 조맹부의 유명한 서체는 고려말 만권당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의 공식필체가 되어 한세대를 풍미하게 된다.
(고려말 충선왕이 만권당을 개설했을 때 이곳에 조맹부를 초빙해 학문적인 교류를 한 바 있다. 이 때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이 만권당에서 최신 유학인 성리학과 더불어 조맹부체를 습득하여 왔다.)
이 필체가 특히 조선전기에 유행한 것은 이 서체가 조선전기의 사회 분위기에 딱 맞아 떨어지는 필법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고 새로운 문물을 정비하려는 시점에서
강인하고 건강한 필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조맹부체를 가장 잘 쓴 사람은 역시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이다.
그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글씨는 몽유도원도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여담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조맹부체를 줄여 "촉체"라고 불렀다.
조체라고 부르지 못하고 촉체라고 부른 것은 "조"라는 것이 00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서체도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된다.
가장 큰 변화는 우선 송설체의 쇠퇴를 들 수 있다.
송설체의 특징 중 하나인 균정미에만 힘을 쓴 결과,
유약하고 판에 박은 듯한 서법이 계속되어 송설체는 그 매력을 잃고만 것이다.
이러한 때에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서풍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문징명, 동기창, 축지산 등의 서풍의 유행 외에도,
명에서 유행하던 복고풍 역시 수입되어 왕희지 서법으로 환원을 부르짖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전하던 왕희지의 서첩은 거의 모두가 가짜였다.
(생각해 보라. 300년대의 글씨가 남아있을리 만무하다.)
가짜를 보고 연습을 하니 그 글씨는 가짜일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석봉 한호를 꼽을 수 있다.
한석봉은 왕희지의 글씨를 연마하여 능숙한 지경에 이르렀던 사람이다.
잘 알려져 있듯 떡 써는 어머니 밑에서 피나게 연습하여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전설은 그에 대한 진실 역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그는 글씨 연습만 했던 것이다.
서예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격조다.
이것은 김정희가 주장했던 바 학문이 밑받침이 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이른바 서권기라고 하는 것 .
화원이 그린 능숙한 그림이 문인화가의 그림에 비해 낮게 평가 받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얼마 만큼의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느냐에 따라 서체는 그 품격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석봉체는 서품(書品)이 낮고 격조와 운치가 결여되어 외형의 미만 다듬는데
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석봉체가 일세를 풍미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그대로 궁궐의 서사정식(書寫程式)을 이루어 이를 본받는 사람의 수가 많았고
일반에게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유명한 천자문도 석봉의 글자체이다.
조선 후기에는 우리 것을 그대로 표현하려는 진경문화의 영향에 따라
우리 고유의 필체가 등장한다. 이름하여 "동국진체".
소론 출신의 윤순, 이광사에 의해 완성된 필법이다.
그리고 이 시기 또 유행하는 것이 안진경체.
정조는 안진경체를 좋아했다.
정조의 글씨는 비후미라고 하는 두텁고 장중한 느낌의 서체를 보여주고있다.
왕이 쓰니 모두들 따라썼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안진경 글씨를 집자해서 비석을 세우는 것이 유행하였고
측근의 신하들도 이 글씨를 즐겨 썼다.
그리고 그 후,
결국 불세출의 천재가 나오게 된다.
바로 추사 김정희이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며 예술가였다.
24살의 약관의 나이에 청에 가 옹방강, 완원 등의 대학자를 접견하는 자리에서도 꿀림이 없었던 조선이 나은 천재였다.
그는 이들의 고증학 뿐만아니라 금석학에도 관심을 보여
이후 우리나라의 학계를 주도하며 금석학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한다.
그러나 김정희가 가장 뛰어났던 분야는 역시 서예 분야일 것이다.
그의 글씨체인 추사체는 고대의 서예가들의 장점과 전서체 등의 장점을
모두 종합하여 완성한 그만의 독특한 글씨체였다.
그의 서체는 강건하고 거칠것 없는 호쾌함을 보여준다.
오랜 기간 모진 풍파에 시달려 얻어낸 기암괴석과 같은 글씨체이다.
실제로도 그는 오랜 제주도에서의 귀양 생활로 그인고의 세월을 견더낸 사람이기도 하다.
그후 그의 글씨를 따라 쓰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망해가는 조선의 공식서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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