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걷기에 나섰다..

추부 ic를 나와 37번 국도를 따라 옥천군 군서면 쪽으로 가면 성왕로 표시가 나온다..

성왕로..백제 성왕을 말한다..

저 앞에 보이는 산이 관산성이 있었다는 산이다..

 

그 산 기슭에는 지금 관성 국궁장이 잇다..

 

 

산을 끼고 금강의 지류인 서화천이 흐른다..

영하의 날씨에 강이 얼었다..

 

관산성이 있는 삼성산은 해발 300미터의 높이지만 바로 서화천을 해자처럼 두루고 있어 가히 백제를 방어하는 천혜의  성지다..

 

 

이곳이 구진벼루..

성왕이 밤중에 기병 50기만 대동하고 고리산, 백골산에 주둔하는 백제의 주력부대를 이끄는 태자 여창에게 가다가 우측 산중에 매복하고 있던 신라 감무력 휘하의 부대에게 붙잡혀 도도에게 목을 잘리운 현장이다..

그의 목은 신라의 왕궁 계단에 묻혔다던가..

 

 

그는 왜 50여기만 대동하고 이곳을 지나갔을까?

여러 견해가 다 SF이지만, 그럴듯하게 보이는 정황은 이렇다..

성왕이 신라를 응징하려고 3만의 병력을 몰아 탄현을 넘어 옥천을 들이치고 초반 승세를 타고 영동까지 진출하였다가

전력을 정비한 신라의 반격을 받아 후퇴하게 되는데..

태자 여창의 주력 보병은 이 서화천이 금강과 합류하는 소옥천, 추소리 부근의 고리산과 그 뒤 백골산성에 포진..

성왕이 이끄는 기병은 금산 마전 부근에 포진하였는데, 태자 진영의 귀족, 왜, 가야 연합 군사이에 불화가 야기되고, 태자마저 병고가 생기자, 급히 밤중에 지름길로 이동하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렸다는 설이 그럴 듯하다.

 

 

구진벼루에서 관산성을 바라본다..

 

성왕은 왜 신라를 응징하려고 하였나?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고 한성을 빼앗긴 백제..성왕대 국력을 회복하고 사비로 천도한다..

당시 고구려는 돌궐에게 시달리느라 남쪽을 돌볼 여유가 없을 즈음

백제는 북진하여 한성을 되찾고 한강하류를 점령, 신라는 이에 편승하여 죽령이북 10현을 접수한다..

백제가 평양으로 진군하자고 신라에게 제의하나, 진흥왕은 이를 거절..

그런데..신라가 보은의 삼년산성에 병력을 집결하니..아연 백제는 사비가 공격당할까 두려워 평양공격을 중단하고.

한성과 한강하류에서 철수하고..이에 신라가 이 곳을 접수하여 신주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파견한다..

 성왕으로서는 와신상담..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며 방심을 노려..3만군대로 총공격..

옥천과 보은의 삼년산성까지 장악하여야 후환을 없애고 한성의 구토를 회복할 수 있기에..

 

 

서화천이 흘러가는 곳에 고리산..대청호가 있다..

 

세상사 어찌 뜻대로 되는가... 

성왕의 맞수..진흥왕에게는 이사부, 거칠부, 김무력 같은 쟁쟁한 신하가 있었으니..

 

 

구진벼루에서 성왕을 참수한 자가 김무력의 부하인 도도..

김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지로 망국 금관가야의 왕손..그는 신주의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선발대는 성왕을 참수하고..

본진은 백골산에 포진한 여창태자의 본진을 급습하니..

왕의 전사로 기가 꺽인 군대는 앞뒤의 협공에 참살을 당하니 4좌평, 2만 천의 군사가 몰사하고..태자는 겨우 탈출한다..(그가 위덕왕이다)

그이후 산이름이 백골산이 되었고.. 부근 동네 이름에 핏골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다시 관산성을 바라본다..

할아버지 성왕이 신라에 참수되고..아버지 위덕왕는 절치부심하며 무력하게 지내다가 다른 아들마저 전사하는 상황에서..

무왕이 신라의 선화 공주와 결혼하였다는 서동설화는 시대적 상황과도 맞지 않는다는 설이 잇다..

최근 미륵사지에서 무왕의 왕비가 사택씨라는 유물이 나왔듯이..

 

 

서화천으로 더 올라가면 염장들이다..전사자들을 묻엇다는 곳..

 

 

 

 

월전리 마을로 가면서 관산성을 바라본다..

머리 없는 성왕..

위덕왕은 아버지 성왕의 얼굴을 조각한 불상을 만들어 일본에 보낸다..

호류지 몽전의 구세관세음이 그것이다..

 

 

 

 

오른쪽 다리는 70년대 다리..그 위 고개가 말무덤 고개..

성왕을 구출하기 위한 백제 기병의 최후를 장식한 곳..

 

 

월전리 마을의 비..

앞산의 관산성, 뒷산의 노고성..서화천과 구진벼루..그리고 성왕의 죽음을 고증하고 잇다..

 

 

역사는 흐른다..쉬지 않고..

 

 

옥천읍에서 생선국수로 점심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탄현이 어딘지 생각해본다..

이곳 마달령이 가장 유력하다..

식장산 장고개도 탄현이라고 하기에 답사하여보앗는데..느낌이 아니다..

예전에 요해지는 지금도 요해지다..

마달령 부근에는 기차도 다니고 차길도 고속도로도 달린다..이것이 요해지라는 증거다..

백강입구 기벌포도 그때이후 요해지로 계속 쓰이듯이..

하지만, 장고개나 마달령이나 서로 인접한 식장산 자락이다..그저 탄현을 식장산 부근이라 해두자..

 

 

 

지도로 표시해본다..

무중(武中)골..

마리들..군사들이 말먹인 들판..

마달령..백골산..고리산..구진벼루..관산성을 죽 표시보니..

서화천이 휴전선처럼 느껴진다..

그 옛날의 역사는 장소만 바뀌어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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