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베 협곡 도로코 열차 관광을 마치고 도야마 시내에 있는 호텔로 가는 길..

저녁 노을이 아름답다..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후회없이 그림처럼 남아주기를

 

영화 클래식에 나오는 그 노래를 들으며 간다..

언젠가 저녁노을을 보며 도야마의 추억을 떠올릴테지..ㅎ

 

 

 

 

우선 저녁을 고기부페집으로 가서 푸짐하게 먹고..

2차로 한잔 하러 간 집

 

문앞에 일기일회(一期一會)..

오늘의 이자리는 평생에 한번 뿐이라는 말..

열심히 이자리를 즐기라는 말..

 

 

 

그래..건배, 건배, 건배..

사후의 만반 진수라도 생전에 일배주만 하겠는가?

 

 

다음날 아침 일찍 숙소 앞 도야마성 구경하러 나왔다..

해자에는 오리가 한가롭다..

 

 

 

 


혹시 일본어 해득 가능한 분 번역을 댓글로 달아 주시길.. 


 

도야마성은 어째 실전용 같지 않은 분위기..

1960년대에 재현한 건물이다..

 

원래는 1543년에 처음 축성했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삿사 나리마사가 도야마 성을 점령하여 대규모로 개축하였다. 

그때는 실전용 요새로 만들기위해 진즈 강 줄기를  끌어들여 해자를 만들어 물에 떠있는 것 같다고 하여《우키조》(浮城)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 사후에 후계분쟁시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도야마 성을 포위 공격해 성이 함락되고 파괴되었다.

 

1639년 가가 번 3대 번주 마에다 도시쓰네는 차남 마에다 도시쓰구에 10만석을 주어 분가 시켜 도야마 번이 성립되었다.

도시쓰구는 1661년부터 폐성되었던 도야마 성을 다시 지엇다.

마에다 가문의 중시조 마에다 도시이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였다가 다시 풍신수길의 부하가 되고, 사후에도 그의 후손들이 영지를 보존하게되는 난세의 한가운데를 슬기롭게 해쳐 나간 사람으로 그의 부인 마츠의 현명한 내조와 함께 여러차례 NHK 대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2006년 방영작 "공명의 갈림길"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한번 보시라..

 https://youtu.be/zqAvIsCVYw4

 

메이지유신으로 페번치현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1870년(메이지 3년) 성은 해체되었고, 성 주위의 해자도 대부분 메워졌다.

1954년(쇼와 29년) 복원된다..

말이 복원이지 콘크리트로 외관만 비슷하게 짓고  내부는 박물관으로 쓰인다..

대부분의 복원된 성이 그렇다..

 

 

이 문은 지토세 문(千歲御門)이라 하는데..1849년에 지어져 지토세 어전의 정문으로 쓰였으며 10대 번주 마에다 도시야스의 은거처 였다..

2007년(평성 19년) 이자리에 재이축되었다.

 

 

 

시립박물관 앞에 서비스 좋은 단풍이 재빨리 촬영의 모델이 되어준다..

자네는 나중에 단풍계의 ceo가 될거야..ㅎ

 

 

혼마루(本丸亭)이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이 보인다..

혼마루??

성의 중심을 가르키고 대게는 천수각이 있는 건물을 가리킨다..

그런데 혼마루 정자라면..음..공원의 중심 역할을 하는 정자쯤 되나보다..

 

 

 

 

이 동상의 인물은 마에다 마사토시(前田正甫)..도야마 2대 번주(영주)..

그가 참근교대차 에도성에 들어 갔을 때 복통이 난 다른 영주에게 소지하고 있던 '한곤탄(反魂丹:반혼단)을 먹여 쾌유케 했다..

그 바람에 다른 다이묘(영주)들이 이 약을 사기를 원해 졸지에 도야마가 제약과 매약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이후 도야마약장수들은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토야마산 생약을 팔게 되었고, 당시 도야마현의 수입 15%를 이들 약장수가 벌어들였다 한다.
그 이후 300년 이상 도야마는 가정상비약, 제약 및 매약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추모비에 황기 2600년이라는 표기가 있다..

이들의 황기는 언제를 기준으로 할까?

황기(皇紀)는 진무천황이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한다..

그럼 서기 2016년은 황기 2676년이고 단기 4349년이다.

저 추모비는 1940년에 세운 것이다..

 

 

 

보살 동자상이 서있다..

설명으로는 태평양전쟁시 미군의 공습으로 도시가 파괴되어 모금하여 복구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그럼 저 보살이 들고 잇는 것은 돈인가??

 

 

 

도야마 성 옆으로 묵었던 호텔이 보인다..

이제 얼릉 들어가 알펜루트로 떠날 준비를 해야지..

 

 

 

 

왜가리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비슷하네..


 

 

니노미야 손토쿠(二宮尊德 1787~1856)의 어린시절 동상이란다..

그는 에도시대 말기의 농민 철학자로 농업기술을 개량하는데 힘쓰고, 농촌 생활을 예찬하는 저서를 출간하여 농경부흥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왜 어린  시절 동상이 서있을까?
그는 어릴 적부터 목재를 주워다 팔아서 그 돈을 모아 공부를 했기에 근검절약과 고학의 상징으로 오래된 일본 초등학교에 동상으로 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나무 등짐을 잔뜩 진 채 책을 읽으며 걷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에 관하여는 초등학교 노래 '니노미야 긴지로 이야기'도 있다

`“나무베고 새끼꼬고 짚신을 삼아서 부모님 공양하고

 아우를 돌보고 형제 사이좋게 효행을 다하니

우리가 배울 것은 니노미야 긴지로(二宮金次郞)….”


그는 밤마다 짚신을 삼고 아침 일찍 그것을 팔아 푼돈을 모은다.

그렇게 시작해 몰락한 집안을 살리고 물건을 아껴 쓰는 법과 농사짓는 법을 개량하여 나중에는 기근으로 죽어가는 마을 전체를 일으켜 세웠다.

 ‘사쿠라마치’를 필두로 수십, 수백의 농촌을 빈곤과 게으름과 기근에서 구해낸 ‘니노미야’는 사무라이가 아니고서도 영웅이 될 수 있는 길을 걸었다.


 그는 길가에서 다 해진 짚신을 가슴에 안고 기도하는 할머니의 짚신 공양(供養)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수고 많았네. 네 몸을 해질 때까지 나에게 바쳤으니 이제는 네가 나온 곳으로 돌아가거라.

그 논에서 퇴비가 되어 새 볏짚으로 자랐다가 다시 짚신이 되거든 또 함께 살자.”

할머니 기원처럼 짚신은 순환한다. 논에 버린 짚신은 다시 벼가 되어 자라고 그 벼는 짚을 남기고 죽는다.

짚은 새 신발로 태어났다가 닳게 되면 다시 죽어 논바닥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끝없는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 순환의 이치를 깨닫고 그 소멸와 재생산의 순환에서 부를 얻는 니노미야의 마을 부흥의 정신이 생겨나게 되엇다(이어령).

 

아..그러니 우리 옛 초등학교에 이순신장군, 이승복 어린이를 세워놓듯이 니노미야 어린이의 동상을 세워 정신을 배우라고 하는 것이다..

 


 차(車)가 3개 겹친 저 자가 무슨 자일까?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모르더라..

검색해보니, 轟 울릴 굉/수레 소리 굉 자로 일본어로는 とどろ(토도로)라고 읽는다..

일본에서만 쓰는 한자다..

논 답(畓)은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한자이듯이..


 

 


아이들 그림으로 장식된 보도 불럭이 재미있다..

 

 

 

도야마시 인구 40만의 도시..우리 진주시 정도 되는 규모..


 

어디서나 여자들을 유혹하는 글귀는 똑같다..

화장빨로 자신을 새롭게 하고 강하게 만들라..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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