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째 비가 내린다..

시안은 연간 강수량이 600mm 정도 인데, 3박 4일 동안 비예보다..

그러면 시안의 1년치 비를 맞고 간다는 이야기..ㅎ

문제는 3일째 화산을 갈 수 있느냐이다..

 

 

비가 오니 일정을 조정하여 실내 구경거리부터 보기로 한다..

먼저 시안의 역사를 조명해주는 산시성 역사박물관을 간다..

우리만 머리 쓰는게 아니다..

모든 관광객이 다 모였다..어찌나 붐비던지 찍은 사진 촛점이 흐리다..ㅜ.ㅜ 

 

 

 

산시??

우리 한자 발음으로 섬서..

송대(宋代) 이후에 산시루(陝西路)라고 불려졌기 때문에 현재는 산시성으로 불리고, 약칭은 산(陝,섬)이라고 한다..

산시성은 경수와 위수가 합쳐져 흐르다가 황하 본류와 합류하는 지형이다..

그런데 경수는 물이 흐리고, 위수는 맑은 데  두 강이 합류하면 탁류와 청류가 썩이지 않고 흘러 간다고 한다..

이를 두고 "涇渭分明" 즉 경위가 분명하다는  속담이 나왔다..

 

 

 

강이 흐르고 토지가 비옥하니 110만년 전 부터 이 지역에는 구석기시대 인류인 남전원인들이 살았다..

 

 

 

세월이 흘러 "기(棄)"라는 사람이 순임금 때 농관(農官)으로 발탁되어 후직(后稷)이라 불렸는데,

그는 위수 강변 태(邰, 셴양(咸陽) 우궁()현 부근)에 봉해져서 주나라 시조가 되었다..

그후 은나라 말기 주 무왕이 강태공을 군사로 삼아 궐기하여 은을 멸하고 주의 천하를 건립하자, 시안 인근의 호경에 도읍하였다..

주나라 시절 한 마부가 이민족 칩입때 공을 세워 산시성 기산의 작은 제후가 되었다..이것이 진(秦) 나라의 시작이다..

그의 후손이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한 진시황이다..그 도읍지가 셴양(咸陽)이다..

진나라를 무너뜨린 한나라는 현 시안성 부근에 도읍하여 장안이라 불렀다..이는 그 이후 당나라때 다시 도읍지가 되었다..

현재 시안성은 명나라때 수축한 것이고, 영락제의 명에 의해 시안(서안)으로 개명되었는데..당나라 시절의 1/8크기라고 한다.. 

 

 

 

 

주나라 시절의 악기..

 

 

 

 

진나라의 병부..부절..

둘로 갈라진 신표를 맞추어 부합해야 병권을 행사할 수 잇다..

 

 

 

 

 

秦王掃六合 진왕소육합

虎視何雄哉 호시하웅재

揮劍決浮雲 휘검결부운

諸侯盡西來 제후진서래


진왕이 육국합종을 쓸어버리고

호랑이처럼 천하를 바라보니 어찌 영웅이라 않을소냐

칼 휘둘러 흘러가는 구름 가르니

제후들이 서쪽으로 몰려와 조아리네

 

- 이백, 고풍 -

 

 

 

 

진시황은 전국의 도로를 건설하고,그 길을 따라 전국을 몇차례나 순행하다가 결국은 길 위에서 죽는다..

 

 

진시황의 여산릉..

10년만에 가니 주변을 발굴한다고 출입통제하고 있다..

릉 자체는 완벽한 기술을 보유할 때까지 발굴을 미루고 있단다..

 

 

통일후 진나라는 4가지를 통일한다..

1) 문자

2) 도량형

3) 화폐

4) 마차의 폭

 

진시황이 이러한 통일은 중국을 경제 공동체로 만들어 이후 뗄 수 없는 한 몸의 나라를 만들엇다..

우리로서는 진시황에 의하여 중국이 통일 되지 않고 6국의 분립이 유럽처럼 계속 되었어야 행복하였을 것인데..ㅎ

 

 

전국시대가 되면 우경(牛耕)이 시작되고,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어 농업 생산력이 확대된다..

진나라가 강국으로 부상하자, 인근 한나라에서 첩자 정국을 파견하여 경수에 인공수로를 건설하는 토목공사를 하게 함으로써 진나라의 국고를 탕진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국이 첩자임이 밝혀져 사형을 시키고 공사를 중지시키려고 하였다가, 실제 공사를 완공한 후의 실익을 재평가한 뒤,

그대로 공사를 진행시켜 10년간의 공사끝에 진시황 원년 관개수로를 완성 시킴으로써 관중평야를 비옥한 농토를 만들었다..

그 땅에서 나오는 소출로 진나라는 60만대군의 식량을 조달할 수 잇었다..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1) 외국인이라도 능력이 잇는 자를 등용했다...

  즉 정국 뿐 아니라 상앙, 이사 등 외국인 능력자를 중요하여 적재 적소에 사용하였다..

 

2) 공평한 상벌제도를 적용했다..

상앙 - 이사 등 법가를 중용하여 혈연, 신분이 아니라 전공에 의하여 상벌을 엄히 함으로써 군대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였다..

 

그러면, 진나라의 멸망의 원인은 무엇인가?

 

과도한 통제와 과도한 신상필벌제도에 있다고 본다..

 통일후 전쟁으로 지친 백성을 좀 쉬게하면서 세금도 낮추어 경제적 안정을 찾아야 하는데, 아방궁 공사나 병마용갱 공사, 만리장성 공사에 백성 들을 무리하게 동원하고,

제반 지시를 어긴 백성을 가차 없이 처벌하니, 통일 15년만에 농민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2000년이 흐르고, 관광입국의 시대가 되니 진시황이 백성의 고혈을 짜서 만든 병마용갱이나 만리장성이 관광상품으로 대박이 나고,

그바람에 현대 중국은 진시황을 폭군이 아니라 영웅으로 재평가 하고 있는 실정이다..

 

 

위 사진은 한나라 시대의 도용이다..작고 소박하다..

왜 갑자기 그렇게 되었을까?

 

 

 

진나라의 각종 공사에 동원된 백성이 약 30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가혹한 노역과  엄벌에 진승, 오광의 농민반란을 신호탄으로 전국에 반란이 일어난다..

그 당시  두각을 나타낸 항우와 유방..

위 지도에 보듯 유방이 한발 앞서 장안에 입성하자, 진나라의 모든 규정을 무효화하고,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발표한다..

즉, 살인죄, 상해죄, 절도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폐지한다는 선언으로 민심을 회득한다..

그리고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건국한 후에도 법령을 간소화 하고, 백성을 부담을 낮추어 휴식시키는 정책을 실시한다..

특히 한 문제는 정치 이념을 황로학(노장사상)의 노선으로 취하여 흉노에게 조공을 받치더라도 전쟁을 쉬고 백성을 쉬게하여 이른바 "문경의 치(文景之治)"라는 평화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선정으로 국력이 회복되어 한 무제의 대외 원정정책이 가능해졌고, 전한, 후한 400년의 기틀이 되었다..

 

그러니 전한시대의 그런 정신에서 만들어진 도용들은 진나라에 비해 작고 소박하다..

현대 중국의 입장에서 관광에 별 보탬이 안되는..ㅎㅎ

 

 

한고조의 부인 여후..

여걸..한신의 토사구팽을 주도하고, 유방 사후 자신의 왕국을 꿈꾸엇다..

 

 

그러나 그녀의 옥새만은 여성스럽다..

 

 

사마천의 무덤 사진...

한무제 때 사기를 저술한 역사가..

사마천은 집안대대로 사관을 담당하는 사마씨 집안에서 태어낫다..

그의 아버지는 역사서를 집필하기 위하여 자료를 모으면서 아들 사마천을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전국을 유람시켰다..

만리를 여행하고 각 지역의 역사, 설화를 수집하였다.

그러다가 한 무제에게 궁형을 당하자, 절치부심하며 "사기"라는 명저를 저술하였다..

그의 생식기는 끊어 졌으나 가장 훌륭한 저작물을 생산하였으니 진정한 대장부다..

 

그의 무덤 위에는 5그루의 측백 나무가 자라고.. 입구에는 "고산앙지(高山仰止)"라고 쓰여있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차할편(車舝篇)에 나오는 문구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이다.

 

 

사마천의 죽음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부근에 후손들이 풍(馮)씨와 동(同)씨로 개명하여 사는 것으로 보아 한 무제 말기 다시 처형당한 것으로 추측된단다..

 

 

후한이 쇠하면서 삼국의 시대가 열린다..

제갈량이 6출 기산하면서 장안과 관중 지역을 공략하였으나 끝끝내 성사시키지 못하고 오장원에서 죽는다..

 

 

당나라가 건국되면서 장안에 다시 도읍을 정하고, 당태종의 정관의 치가 이루어지자..장안은 당시 최대의 국제도시가 된다..

인구 100만.. 그 당시 당삼채라 불리는 화려한 도자기들이 만들어진다..

색채화려한 도자기 말이 이를 대변한다..

 

 

 

당나라하면 양귀비가 생각난다..

중국 4대 미인 중에 첫 손에 꼽히는 그녀..

그녀는 어떤 모습이엇을까?

역사서에 묘사되는 모습은 결코 현대적으로 v라인의 날씬한 여자는 아니였다는 사실..

위 미인도에 등장하는 여인처럼 오동동한 스타일이라는 거..

 

 

당나라 여인의 헤어스타일은 현대 여성보다 더 과감한 것 같다..

 

 

눈썹은 어떤가?

밑에서 3번째가 가장 인기잇는 스타일이었단다..

현대 한국 여성은 위에서 첫번째 스타일 아닌가?

 

 

당나라 시대 장회태자묘의 사신도

장회태자는 당 고종의 6째 아들이며 즉천무후의 아들이다..

사신도 중에 신라사람은 누구일까?

 

 

 

시안은 낙양과 더불어 우리나라 경주와 같은 고도이다..

볼거리가 많고 인문의 집결지라고 할 수있다..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점심먹으러 시안 성벽이 보이는 중식당에 들렀다..

향초를 모두 뺀 중식은 참 맛있다..

더구나, 서봉주가 있으나 즐겁지 아니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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