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식사후 버스로 상원3리로 향한다..

외씨 버선길 6코스 중 조지훈 문학길 일부를 걷는다..

 

 

일단 상원3리 마을에서 아스팔트길 구간이 종료되는 산길 입구에서 걷기 시작한다..

 

 

 

영양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에게 영양은 마치 등 한가운데 위치해서 왼손도, 오른손도 닿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이번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자 마치 효자손을 집어듯이 얼싸 좋다 오게 된 것이다..

그런 곳이 또 있다..

성주, 고령이  마지막 남은 효자손지역이다... 

 

 

 

 

들국화가 황금으로 치장한 시골길..

나도 황금이다고 외치는 감이 주렁 주렁...

서북풍이 불어오면 금풍이 되겠다..

 

 

 

뭐? 지들만 금이여? 나도 금이여!

호박꽃이 아직도 노익장을 과시한다..

 

 

도깨비바늘..

살금 살금 피해간다..어느 틈에 달라 붙을지 모른다..

 

 

 

 

 

곡강교를 지난다..

 

 

 

 

 

영양의 상징은 반디불이와 고추..

 

 

 

 

뜨거운 고추가 상징이다..

길가에 들여다 본 창고에 고추가 가득..매운 내가 코를 찌른다..

 

우리가 흔히 매운 고추를 청양고추라고 하는데, 청양고추의 본적은 어디일까?

충남 청양이라고 하는 주장도 잇으나, 개발자 유일웅은 '청양고추 품종은 제주산과 태국산 고추를 잡종교배하여 만든 것으로 경상북도 청송군과 영양군 일대에서 임상재배에 성공하였으며, 현지 농가의 요청에 의해 청송의 청(靑), 영양의 양(陽)자를 따서 청양고추로 명명하여 품종등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사드 보복..이 시골에도 사드 이야기가 등장한다..

마치 몽고군이 전국을 유린하던 고려시대의 느낌이 든다..

 

 

그래도..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붉음이다..

붉음이 우리에게 속삭인다..

"잘 되거야! 할 수 있어!"

 

 

 

영양향교를 지난다..

말라 비틀어진 고추밭을 보고 고추농사 포기한 줄았더니 그게 아니다..

일부러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밭 고추는 잘 컷다..

이 밭 주인에게는 딸이 많은가 보다..ㅎ

 

 

 

 

 

 

 

 

고무래가 역할을 다하고 모처럼 쉬고 있다..

 

 

푸른 하늘 이고 걷는 가을 길은 축복이다..

 

 

가을 걷이의 마지막 수호자는 종이 매..참새가 눈치채지 못해야 하는데..

서북풍이 빠졋구나..

 

 

 

 

한달 사이로 쭉정이 신세가 되었네 그려..

우리 인생도 몇일 상관일세 그려..

 

 

 

 

조지훈의 고향 주실마을 입구..

 

 

배산 임수에 비보숲을 갖춘 아담한 마을이다..

 

 

 

월록서당..

동네아이들 천자문가르치던 곳..

조지훈도 이곳에서 조기교육을 받고 신학문을 배운다..

그의 초기 시에 한시 냄새가 풍기는 이유아닐까>

 

 

 

서당 앞 부동산 광고..

제일 좋은 부동산 투자는 천당에 집을 사는 것이란다..

강남 사람들은 들으라..ㅎ

 

 

주실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호은종택..

종택 정문에서 보면 삼각형의 산..문필봉이 보인다..

문필봉을 강조하고, 문필봉 때문에 공부만하면 성공한다고 어려서부터 주입하면 잘 될수 밖에 없겠다..

그 덕분인지 이 작은 마을에서 박사만 14명이 배출되었단다..

 

 

어찌 이 동네 뿐이겠는가?

양반동네 주변에는 다 문필봉이 잇었다..

최소 3대에 1명의 과거 급제자가 나와야 양반의 생존 근거인 시대에 자손들에게 넛지효과를 주는 것이 문필봉이다..

 

 

그러나, 이 동네가 남다른 것은 나름 철학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삼불차 이야기..

1. 재물을 빌리지 않는다..물적 관리

2.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인적 관리..

3.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지적 관리

 

경주 최부자, 구례 운조루, 경주 양동마을 서백당의 정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신이다..

이런 가풍에서 자랐기에 조지훈은 지조론을 설파할 수있었다..

 

 

 

지훈문학관..이글씨는 지훈의 부인인 연담 김난희여사의 글씨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대학 졸업후 오대산 월정사에 들어가 강사노릇하며 불교를 공부한 전력이 있어

그의 초기 시는 한시 분위기와 선시의 향기가 풍긴다..

일제 말기 친일을 거부하고 절필한다..

이 대목이 미당 서정주와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해방후 청록파 시인으로 활약한다..

이념의 노예를 거부하고 민족정서를 부각하는 지조있는 시인이 되어간다..


 

 

그가 박목월에게 건네준 시 완화삼..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


나그네 긴소매

꽃잎에 젖어

술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에 대한 답시가 "나그네"다


강나루 건너 밀밭길을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답시가 더 유명해졋다...

산티아고 길을 걷다가 이 시에 딱맞는 풍광을 만낫다..

저절로 이 시가 읊어졌다..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8 데모..4.19의 전야였다..

이에 대한 그의 헌사..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

사악과 불의에 항거하여
압제의 사슬을 끊고
분노의 불길을 터뜨린
아! 1960년 4월 18일!

 

 

 

 

 

 

 

시공원에 그의 시 승무가 있다..

삼남길 경기 화성구간을 걸을 때 용주사에 들렀는데, 그 때 안내문에 조지훈이 그 절에 묵으며 승무를 보고 시를 썼다고 나오더라..

 

 

 

 

<오늘 걷기> 영양군 영양읍 상원3리 마을회관 - 곡강교 - 영양향교 - 주실마을 - 조지훈문학관  약 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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