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내포역사인물길 1코스를 걸을 때 지도에서 "둔리 연꽃마을" 표시를 본적이 있었다..

7월에 내포역사인물길 5코스를 걸을 때 잠시 들러 연꽃을 감상하려 했다.

하지만, 인터넷 검색에 위 마을이 나오지 않는다.

일단 둔리 저수지로 갔다..헐

낚시터로 변해잇었다..

 

저수지 건너편에 일부 연꽃이 남아 있기는 한데, 

왕년의 연꽃마을 표지는 이미 낡아 있었다..

 

차를  최영장군 사당으로 향한다..

직전에 성삼문 유허지가 먼저 나오는데, 주차가 마땅치 않아 일단 최영장군 사당으로 직행한다.

 

여름의 여왕 무궁화가 즐비한 따라가는 이길도 내포역사인물길 5코스의 일부인데..

땡볕의 계절엔 걷기 노땡큐다..

 

도중에 한솔기라는 표지가 나오는데, 그냥 동네 이름인 모양이다..

 

1km 남짓 거리에 최영장군 사당이 있다..

너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올라간다..

 

200미터 쯤 올라가면 사당이 나온다..

한때 홍성에 근무하던 시절, 최영장군배 궁도대회로 인연을 맺었는데..

이제서야 참배한다..

 

기봉사..

그는 고려말의 기이한 거대한 봉우리였다..그러나 이성계와 쌍봉이었다..

그에 관련된 일화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의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하는 붉은 마음으로도 기억된다..

 

팔자는 염라대왕도 부러워한다는 출장입상의 팔자..

나가서는 장군이요, 들어와서는 정승이었다.

젊어서 장수로서 북벌 남정..북으로 원나라, 홍건적 등을 격퇴하고, 남으로 왜구의 준동을 정벌(홍산대첩)한다..

늙어서 공민왕 사후 우왕을 지탱하는 나라의 기둥이었다..

그러나, 정치상황을 주도하기에는 나라는 쇠퇴하고 반대세력이 너무 컸다..

 

요동정벌을 구상하나, 이성계의 위화도 쿠데타에 직면하여 진압작전에 실패하여 실각한다..

그러나, 그의 붉은 마음만은  백성이 알아주어, 무속의 신으로 승격하였다..

 

내포역사인물길 5코스를 걸어본다..

최영장군 사당 뒷길로 올라가면 능선을 따라 성삼문 유적지와 연결된다..

 

산길은 걷기 좋으나, 인적이 뜸한 탓에 거미줄에 얼굴이 걸린다는..

 

1km 정도 걸으면 성삼문 유적지로 내려가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거시서 우측으로 100미터 거리의 수리봉에 잠시 올라간다..

 

수리봉 정상이라야 조망은 없다..

바로 하산하여 700미터 내려가면 성삼문 유허지다..

 

 

성삼문 생가터에 위패를 묻고 노은단을 조성해놓았다..

 

최영장군과 성삼문은 무슨 관계일까??

어찌 이 작은 동네에서 두명의 걸출한 충신들이 태어났을까?

최영장군은 이곳 노은리에서 태어낫으나 살기는 아산 집에서 살앗단다..

그의 사후 증손녀 사위였던 맹사성이 아산 집을 물려받아 맹씨향단으로 불리며 지금껏 존재한다..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은 박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엇는데, 처가가 이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삼문은 외가동네에서 태어난 것이다..

 

 

단심가는 정몽주, 성삼문이 다 유명하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노은단 글씨를 쓴 장강 변수길 선생

오랜 만에 필적을 보니 참으로 반갑다..

 

석물 각자를 보니 영동출신 국회의원 성득환이름이 등장한다..

성삼문의 집안은 성승의 남자 자손 4자 8손이 다 죽고, 부녀는 노비가 되어 공신들에게 분배되면서 멸손되었다..

그런데??

성득환은 성삼문의 직계 후손은 아니지만 1950년대 국회의원으로써 위 노은단 조성에 기여하였던 모양이다.. 

 

고려말 조선초..

권력의 향배를 좇아  줄서는데 따라 집안이 풍지박산나던 시절..

그런 난국에도 소신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이 한동네서 태어났다는 것은 이곳 풍수탓일까??

최영장군이 기울어가는 왕조의 기둥으로 버티고 잇을 때 정몽주는 친명파로 이성계와 같은 입장이었다.

성삼문의 선조들도 이성계의 편에서 조선개국의 공신이 되었다..

성삼문의 집안이 풍비박산날 때 성삼문 집안 부녀들을 노비로 분배받았던 공신 중 일부는 훗날 연산군 때 사화에 걸려 멸문지화를 당한다..

 

소신에 목숨을 걸고 살았던 그 시절과 돈에 목숨을 걸고 사는 요즘 시절 중 어느 것이 더 힘들까??

7,8월의 뜨거운 태양아래 끊임없이 피고 지는 무궁화는 알랑가??

 

 

<오늘 걷기> 최영장군 사당 - 수리산 - 성삼문유허지 - 한솔기마을 - 최영장군 사당  약 3km

징곡산성에서 내려와 차로 1.5.km 떨어진 고미당까지 이동한다.

거기서 다시 백제부흥군길 2코스에 위치한 학산산성을 올라간다..

 

고미당 옆 이 표지판이 입구다..

 

가마터??

250년전 사운고택(조응식 가옥)을 중건할 때 기와를 굽던 가마터란다..

 

 

사운고택 옆으로 학산산성으로 이어지는 임도가 백제부흥군길 2코스 정식 노선으로 설정되어 잇다.

그러나, 나는 사운고택을 구경하다가 새로 만들어진 코스로 올라가게 된다..

 

학성산성 아래 사운고택 부근은 선사시대 고인돌, 삼국시대 석실묘 등이 위치한 오래된 터전이고, 양주 조씨 조태벽이 병자호란후에 입향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고택 앞에는 조선시대 전형적인 천원지방형 연못이 자리하고..

 

 

 

솟을 대문 이름은 사운고택이다..

사운(士雲)은 누구인가??

문경현감을 지낸 조중세(1847-1893)다..

그는 문경현감 재직(1890년) 시절 흉년이 들자, 홍성 본가의 쌀을 가져다가 문경 백성을 구휼햇다고 한다.

이런 전통을 이어져 1894년 홍주의병 거병시 군량미 237두를 지원햇다고 한다.

 쌀 10두가 1섬이니, 23섬이고 대략 46가마 정도 된다..

 

사랑채에는 3가지 현판이 붙어있다.

정면에는 학산헌(鶴山軒)..

뒷산 이름을 딴 것이고..

 

옆에는 수루(睡樓)..잠자는 다락방..

 

그 아래로 천하태평 글씨와 건곤감이 주역괘가 그려져있다..

이 방에서 천하태평하게 잠을 자겠다는 뜻이니, 역모 생각이 없다는 의지를 간접표현한 것인가??  ㅎㅎ

 

건물 옆에는 우화정(雨花亭)..꽃비 내리는 집

자하 신위의 글씨..

방문한 날 벚꽃이 지는 모습을 보고, 이름을 짓고 글씨를 써주고 간 모양이다.. 

 

자하 신위는 정조때 문신으로 당대 시,서,화 삼절로 불리던 사람이다..

참고로 그의 그림과 글을 볼까??

 

햇살은 얼어붙고 바람은 세차게 부르짖는데
누각의 그늘과 산의 먹빛이 합쳐져 흐리다
몽롱한 술기운에 자리를 모두 정리하니
사람은 조용하고 향연만 고요히 피어 오르더라
한점 눈발이 날아들어 벼루에 떨어져 녹고
서걱이는 소리 크게 나면서 찬 갈대가 흔들린다.
우연히 황공망과 미불을 참고해 수묵을 그리는데
돌연히 마음이 일어 대규를 찾아가는 그림이 되네.

<첫눈 오는 날 술마시고 그리는데, 황공망 화법인지 미불의 화법인지 아닌지>

 

***

주) 대규를 찾아간다..설야방대..

왕휘지(왕희지 아들)이 눈이 오는 날 흥이 나서 배를 타고 친구 대규를 찾아갔는데, 집앞에 당도햇을때 눈이 그치자 친구를 만나지도 않고 돌아갔다는 고사..

 

 

세월하쟁영 (歲月何崢嶸)

인생역쇠지 (人生易衰遲)

 

세월은 어찌 그리 잘가는지

인생도 금세 늙어가네..

 

 

화무십일홍..

길고 짧은 차가 있지만 필멸의 생명이기에 도리어 찬란하다..

 

장독대에 소주고리가 눈에 띈다..

이 집안에는 내려오는 전통 레시피 "음식방문니라"가 있다..

이른 봄에 새로난 솔잎으로 담근 송순주라는 가양주가 있고, 꿩고기와 붕어로 만드는 어만두라는 안주도 있다..

 

안채의 이름은 보현당..현명함을 보물처럼 여기는 방..이다..

 

주련은 추사의 글씨다.

고회부처아녀손 (高會夫妻兒女孫)
대팽두부과강채 (大烹豆腐瓜薑菜)

 

최고의 모임은 부부, 자녀, 손자가 모일 때이고

최고의 요리는 두부, 오이, 생강, 나물요리로다..

 

안사랑채 이름은 얼방원(乻方垣)이다..

안사랑채는 여성을 위한 사랑채로 일종의 별당이다.

그런데, 얼방원은 무슨 말일까?

얼방乻方은 백제 지역에서 임금과 관련이 있다..

백제왕을 어라하, 왕비를 어륙이라고 불렀다는데, 원음인 "얼"이 어른을 뜻하는 말이란다.

그리고 예전부터 이 지방을 얼방이라고 불렀는데, 얼방이라고 부른 것은 어른(즉 임금)이 잇는 땅이라는 의미로 본다. 

그런 의미를 담아 이집에 고유의 지명을 남기고 싶어 얼방원이라고 당호를 붙이고, 협문의 이름도 얼방문이라고 지었다..

 

그러고 보면, 말 그대로 얼방이란 지명이 남아잇는 이 지역이 백제의 마지막 왕성이엇던 주류성이  아니었을까?

 

안사랑채 옆에는 학산서재가 있다..

그런데, 이 집은 사운고택 또는 조응식 가옥이라고 표시하는데, 조응식은 누군가??

현대에 고택 문화재 조사를 할 때 당시 거주 후손 이름 조응식으로 등록하였단다..

 

집 주변에 만발한 작약을 보며 탁자에 앉아 점심요기를 한다..

시원한 그늘과 바람이 잠을 불러온다..

수루(睡樓)에 올라 천하태평의 봄꿈을 꿔보고 싶더라..

 

참새야? 너는 봉황의 뜻을 알겠느냐??

물론 대붕의 뜻이야 모르겠지만..

 

시비가 시비거는 공간에서 문득 학산산성 표지판을 발견한다..

그 순간 고택 옆 원래 임도길은 까막케 잊고, 이 표지를 따라나서니 새로운 루트엿다는...ㅎ

 

새로 개설한 것은 좋은데, 끝까지 보살피는 정성이 없거나, 다니는 사람이 적어서 길이 희미하니 중간에는 좀 헤맨다..

그러다가 겨우 겨우 새로 개설한 임도와 만난다..

 

이 새 임도길이 묵어 숲이 우거지면 괜찮겠다..

 

근데, 겁나 큰 말벌집이 보인다..

다행히 벌들은 다 이사갔는지, 아니면 이번 겨울 벌 몰살사태에 희생되엇는지..

 

 

금계국이 이길의 황량함을 보충해준다..

 

이제 원래 코스 임도길과 이어졌다..

 

학성산성으로 오른다..

 

성벽이 허물어져 돌무더기가 가득하다..

 

성 정상에는 학산정 정자가 잇다..

 

지세를 보니 무한천을 해자로 두른 듯이 임존성 - 학산산성 - 장곡산성- 오서산 이 장성처럼 늘어섰다..

한때 백제부흥군이 3만5천이 집결햇다니..

임존성만으로는 그 군대를 수용하기 부족할테고, 학산산성, 장곡산성도 비좁다..

내 생각엔 학산산성(아래 푸른 원), 장곡산성(붉은 원)으로 둘러싸인 분지인 대현리 지역(네모 점선)에 임시 성을 지어 주둔하면서 주류성이라 부르고, 백성들은 얼방(왕성)이라고 부른 것은 아닐까? 

 

하지만, 대현리 분지를 주류성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학자들이 주장하는 주류성 후보는 1) 서천 건지산성, 2) 부안 위금암산성  3) 홍성 장곡산성 또는 학산산성이다..

삼국사기,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주류성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 산세가 높고 계곡이 깊어 방어 하기에는 좋으나 땅이 척박해 장기전으로 싸우기에는 어
려운 땅
(2) 서북쪽으로 흐르는 백촌강에서 가깝다.

(3) 복신굴이 있어야 한다.
(4) 곡창지대인 피성으로 임시천도하는데, 피성은 사비성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5) 주류성 함락시 왜로 망명하는 경로에 부합해야 한다.

1)번 서천 건지산성은 (1), (3), (4) 요건에 부적합
2)번 부안 우금산성은 위 요건에 다 부합하는데, 임존성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잇다.
3)번 홍성 장곡산성(또는 학산산성)은 (1),(3) 요건을 갖추었는데, (2)번 백촌강을 무한천 및 아산만을 보아야하는 난점이 잇고, (4)번 피성을 당진 면천 몽산성으로 보면 요건에 안맞고, 공주 우성으로 보면 전술적으로 맞지 않는다..(5)번 잔존세력이 왜로 망명하기 어려운 조건이 된다..

 

***

(내 생각) 모든 것을 떠나서 자생적인 백제부흥군이 집결하는데는 임존성에 가까운 홍성 장곡산성 일대를 주류성으로 보는게 합당하지만, 왜의 구원군과 연합한다는 측면에서는 부안 우금산성이 부합할 것 같다.

백촌강 전투도 아산만으로 보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백강 일대와 당항진도 나당이 접수한 상태인데, 아산만까지 올라가 상륙작전을 전개한다는 발상은 맥아더라도 불가능할 것 같다)

따라서 현재 금강 이남에서 주류성과 가까운 곳을 찾는다면 부안 부근 동진강에서 백촌강 전투가 발생햇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도 남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왜 선단을 추적관찰하면서 부안 주류성 인근으로 군대와 함대를 출동시켰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 백제부흥군이 한때 200여성을 회복하고 사비성을 포위했다면, 금강도하작전을 펴야하는 금강이북의 주류성 보다는 금강이남의 주류성이 전략상 유리햇을 것 같다.

강북 임존성의 흑지상지 군대가 적을 압박하는 사이  강남의 복신,도침의 군대가 후방을 들이쳐 사비성을 포위하는 전략 말이다..

 

또 한편에서는 풍왕이 강북과 강남을 왓다갔다 순시차 임시주둔하면서 군사의 사기를 위무했을 가능성이 잇다.

부안의 주류성에 머물다가 홍성 장곡산성에 머물기도 하는 바람에 역사서의 주류성 묘사에 혼선이 발생했을 가능성도 잇다.

그러니, 부안 주류성이나 홍성 주류성이 모두 가능하고, 모두 백제 부흥군의 중심지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산성에서 내려오는 임도길을 쭈욱 따라오면 사운고택 옆 임도로 나온다..

 

<이번 걷기> 고미당 - 가마터 - 사운고택 - 신설임도 - 임도 - 학산산성  왕복 약 4km 

내포문화숲길 중 백제부흥군길 2코스를 걸으려 홍성군 장곡면 대현1구 마을회관 도착했다.

장곡산성- 학산산성- 속은이고개 - 광시한우테마공원까지 약14km  거리인데,

오늘은 장곡산성과 학성산성을 각각 돌아보며, 과연 이 곳이 백제부흥운동의 거점 주류성이었는지 검토해보려고 한다.. 

 

달개비가 당당하다..

개양귀비는 더 당당하다..

 

핑크빛 어게인 색깔 같은데, 이름은 끈끈이대나물이란다..

장미..백만송이 선물하느라 몇 송이 남지 않았다..

 

제주 하르방이 충청도 산골에 장가들어 점점 늙어간다..

 

동네 뒷길로 산성에 오른다..

 

분홍 엉겅퀴..

분홍이 도는 찔레꽃..

연분홍 치마와 함께 봄날을 떠나보낸다..

 

꾀많은 조조가 말 한마디로 군대의 갈증을 풀어주었다는 매실도 커가고..

 

가파르지만 짧은 장곡산성에 올랐다..

 

 

한 때 3만5천명에 육박했다는 백제부흥군 중 절반이 임존성에 주둔했다치고, 나머지가 과연 이 작은 산성에 주둔할 수 있었을까?

 

성벽을 따라 난 길을 따라 산성 둘레길을 걷기로 한다..

 

돌로 쌓아 올린 성벽의 자취는 뚜렸하다..

성 남쪽 끝에 도착하여 보니, 멀리 동남으로 칠갑산으로 이어진 산줄기로 방벽을 두룬 천혜의 요새지로 보인다..

 

성벽을 돌아 내려오니 백제부흥군길 2코스 노선인 학성산성으로 이어지는 길과 만난다..

 

나는 그냥 장곡산성 표지판으로 돌아간다..

 

다시 돌아온 자리..

이 산성 자체가 주류성은 아닌 것 같다..

이 산성이 주류성을 보호하는 외각 방어산성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돌아 내려오면서 바라보니 

산성아래 대현리 일대가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로 장곡산성과 학산산성으로 보호받는 주류성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걷기> 대현1구 마을회관 - 장곡산성 둘레길 왕복 약 3km

오서산 상담마을 주차장에 오전 10시에 도착..

원래 계획은 내포문화숲길 중 백제부흥군길 1코스 쉰질바위(복신굴) 왕복 10km를 걸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땡볕에 임도길만 걸으면 동행이 불만일 것 같아 일부 등산로와 혼합하여 걷기로 한다..

 

 

내포문화숲길 오서산 구간엔 벚나무가 많아 벚꽃 시즌에 걸으면 좋겠다..

내년엔 벚꽃필 때 오마..

 

일단 등산로를 따라간다..

상담마을을 지나가는데, 우선 처음보는 다래꽃이 눈길을 끈다..

 

요건 독일 붓꽃으로 흰색이다..

동행이 한포기 가져가고 싶어 안달이다..

 

금낭화..

누가 대아수목원으로 금낭화 길 걸으러 간댔는데, 나는 여기서 거저 얻어 걸렸다..ㅎ

 

바닷가에서만 피는 줄 알았던 해당화를 여기서 보네..ㅎ

 

정식 등산로 입구에는 전국 산악회 시그널이 다 붙어있다..

 

정암사 갈림길 임도 사거리까지 700미터 등산로는 찔레꽃 향기 퍼지는 호젓한 오솔길이라 좋다..

 

 우측에서 상담주차장에서 올라오는 2.4km 임도길과 만난다., 

 

이 사거리 부근에 주자창에 있어서 정상도전을 원하는 팀은 여기에 주차하기도 한다..

이 사거리에서 직진하면 정암사거쳐 정상까지 최단코스(2.5km)로 올라간다.

우리는  좌측 임도를 따라 백제부흥군길 1코스 쉰질바위까지 3Km를 걸어간다..

 

백제부흥군길 1코스는  총 14km 거리다..

 

걷다가 한 표지판을 보니, 쉰질바위에서 임도따라 오서산전망대에 가는 길이 보인다..

정상을 노리는 동행과 임도길에 끌리는 내가 모처럼 의사일치를 보아 전망대를 거쳐 정암사로 하산하는 것으로 노선을 수정한다..

 

쉰질바위 갈림길에 도착..

 

쉰질바위 전망대에서 오서산 능선을 조망하니.. 7부능선 쯤 임도길이 기러기재로 향한다..

 

다시 좀더 내려가니 복신굴이 나온다..

복신과 도침이 백제부흥군을 이끌고, 임존성의 흑치상지 등이 기각지세를 이루던 시절에는 200개의 성을 탈환하고 기세를 올렸는데, 일본에서 풍왕자를 모셔다 옹립한 뒤에 내분이 일어나 자멸한다..

내분시절 복신이 은거하다 피살되었다는 굴이다..

<전북 부안 우금암 아래에도 복신굴이 있단다..언제 거기도 방문한뒤 어느 곳이 진짜 현장인지 밝혀보겠다..ㅎㅎ>

 

 

쉰질바위..

쉰길..50길..사람키의 50배가 된다는 바위..

 

 

쉰길바위를 돌아나가면 다시 임도길이 이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정상으로 가는 임도길로 올라간다..

 

정상까지는 2Km 지만, 오서산전망대(구 오서정)까지는 1KM 정도 거리다..

 

거기서 만난 오늘의 주인공..등나무꽃..

꽃말처럼 우리를 열렬히 "환영"한다..

 

저아래 쉰질바위도 여기서 보니 전모가 보인다..

고개 돌리면 눈밝은 사람은 광천 새우젓토굴도 볼수 있다..ㅎ

 

임도의 끝..좌로 정상, 우로 전망대..

가만생각해보니, 걷기에 관심없던 20년전 홍성 근무시절 지인의 도움으로 찝차타고 이 삼거리까지 와서, 전망대까지 몇백미터 걸어가 오서산 억새를 봤던 기억이 난다.. 

 

군침 흘리는 동행을 다독거려 우회전한다..ㅎㅎ

뒤로 오서산 정상이 보인다..

 

전망대 쪽에도 오서산 정상석이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홍성 정상이라 부르고, 공식 정상(지리적 정상)을 보령 정상이라고 부른단다..

그러나 억새가 유명한 곳이 홍성 정상부니, 이곳이 정신적 정상이 아닌가 한다.. 

 

백제 시절에는 큰산 대접을 받았다.

산이름도 오산(烏산)인데, 까마귀는 고구려, 백제에서는 삼족오라 하여 해모수의 전령으로 국조 취급을 받는 새다.

그런 새의 산이니 당연히 최고 등급에 속한다..

그냥 높이로 따져도 충남 서해안에서는 제일 높다..

 

줌으로 보니, 보령 정상에도 정상석과 전망대가 보인다..ㅎ

 

가을에 유명한 억새는 지금은 싹수가 어리다..

 

 

정상부를 살짝 내려와 전망좋은 곳에 앉아 요기도 하고, 강쥐노래도 들으며 서해안을 아우른다..

하지만, 연무가 가득하여 서해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저 아래 흘러가는 물은 광천천으로 빙도를 거쳐 오천에서 서해와 만난다..

 

내려가다 아쉬워 돌아보니 저멀리 오서산 정산비 흑석이 손을 흔들며 아쉬워한다..

 

 

이제부터 고달픈 내리막길에 멋진 소나무를 발견하고 잠시 쉬며 단소를 꺼내분다..

그리워라~ 그리워라~

검은 물결 춤추는 그곳~~ 

 

푸른 물결춤추고 갈매기떼 넘나드는 곳은 보이지 않는다..

 

계속되는 내리받이 계단길..

잠시 벤취에 누워 한숨돌리고 일어나니 왼쪽 허벅지에 근육통이 발생..ㅎ

 

 

허벅지에 근육통 진통제를 바르고 잘 달래서 정암사에 도착..

 

드디어 처음 갈라섰던 임도 사거리까지 왔다..

 

주차장 도착 시간이 오후 4시 30분이니 6시간 이상 걸멍 쉬멍했다..

잔치국수로 점저를 한다..

 

 

<오늘 걷기> 상담마을 주차장 - 등산로 - 임도 사거리 - 쉰질바위 - 정상쪽 임도 - 오서산 전망대 - 정암사 - 주차장

                  약 8km

황홀한 유채밭 끝에서 청룡산 숲길이 시작된다.

 

완만한 오르막의 오솔길..아무도 없는 완벽한 거리두기 코스..ㅎ

원래는 청룡산 정상에서 다시 원점으로 회귀할 생각도 잇었는데,

걸어오다보니 동네 개도 왕왕거리고, 소똥냄새도 다시 맡기 싫고 해서 한용운 생가까지 내처 걷기로 했다..

 

내포문화숲길이 국가보조를 많이 받나보다..

계단 조성공사를 준비하고 있다..

 

오늘 나처럼 홀로 걷기를 즐기는 사람이 많나 보다..

 

바지와 신발을 노랗게 물들이는 주범은??

바로~~~오

송화가루...

 

조망이 없는 숲길을 걷다가 드디어 전망대를 만났다..

시간은 이르지만, 더 적당한 곳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아 점심요기를 하면서 풍광을 즐긴다..

 

좌측에 홍성방조제..우측 바다 가운데가 남당리 앞 죽도..그뒤로 안면도가 길게..

 

죽도가 궁금하시다고라??

https://blog.daum.net/servan/6351264

 

 

이 산속에 누가 이리 공든탑을 세웠나?

무슨 한이 그리 많아 돌마다 담아 쌓아놓았나?? 

 

정상석은 없고 정상지만..높이 236m

 

본격적으로 계단공사중..

 

그런데, 갑자기 절벽이 나타난다..

임도공사를 하면서 아직 연계통행로 공사가 미완성이다..

 

벼랑끝으로 조심 조심 지난다..

다행히 길은 계속 이어진다..

 

산속에서 만난 석관묘..

요즘 봉분이 멧돼지 등 습격에 허물어 지는데, 대안으로 이런 석관묘도 괜찮을 것 같다..

 

3.5Km의 숲길이 끝나고 이제 1.2KM는 아스팔트 길을 걸어야 한다..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한문선시에 익숙할 스님이 한글시를 멋들어지게 쓴다는 반전의 묘미..

 

그는 홍성군 결성면에서 태어나 강원도 설악산 오세암, 백담사를 거쳐 건봉사에서 수행을 한다..

민들레 홀씨처럼 훨훨 자유로이 날았다..

 

그는 3.1독립선언시 33인으로 참여했고, 독립선언서 말미의 공약삼장을 집필했다..

그리고 옥에 갇혔다.

그의 제자 춘성이 절 논을 팔아 옥바라지하다가 만해에게 혼나고 내쫓겼다는 말이 있다.

 

옥중감회

 

一念但覺淨無塵      
일념단각정무진
鐵窓明月自生新        
철창명월자생신
憂樂本空唯心在        
우락본공유심재
釋迦原來尋常人        
석가원래심상인


한생각으로 깨치면 티끌 없이 깨끗하나니
철창 사이로 비치는 명월도 스스로 새로워진다네
근심과 즐거움이 본래 공이요 오직 마음뿐이니
석가도 원래는 예사 사람이었다오

 

 

한용운 생가에서 김좌진 생가로 길은 이어진다..

 

아직 5km를 더가야 하는데, 주로 아스팔트를 걷는 코스라 여기서 마치기로 한다..

 

다시 돌아와 만해기념관을 관람한다..

만해의 아버지는 홍주 관아의 아전이었는데, 어려서 어린 한용운에게 위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해주어 어린 용운의 기상을 키워주었다.

동학혁명당시에는 홍주성 소속으로 동학군을 진압하는 일을 하다가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그러자 한용운은 오대산 오세암으로 출가한다. 백담사를 거쳐 건봉사에서 당시 고승 만화스님을 만나 만해라는 법호를 받는다.

그는 오세암에서 오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男兒到處是故鄕 

남아도처시고향 

幾人長在客愁中

기인장재객수중

一聲喝破三千界 

일성갈파삼천계 

雪裏桃花片片飛

설리도화편편비

 

장부 이르는 곳마다 고향이거늘

그 누가 오랫동안 객수에 젖었던가

한 소리 큰 할에 삼천세계를 타파하니

눈 속에 복사꽃이 편편히 날리는구나

 

만해는 독립운동가, 시인, 불교혁신가로만 알려져있지, 그의 구도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오세암에서 당나라 동안 상찰 선사가 지은 십현담을  매월 김시습이 주해한 서적을 읽고,  숙고하여 

십현담주해집을 지었다..

 

내용이 궁금한 분은 여기를 보시요..

https://kydong77.tistory.com/17953

 

그는 만년에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살다가 광복 1년전에 사망했다.

https://blog.daum.net/servan/6350650 참조

 

****

한용운 생가 주차장에서 결성택시를 호출하니, 처음에는 30분 걸리다더니, 혼자냐고 묻더니 10분만에 왔다.

노인 2분을 태우고 합승시켜서 차량주차장소로 간다..

요금 7천원...

 

거기서 차를 몰고 4코스 종점 김좌진 생가로 갔다..

그는 서인 김상용(병자호란때 강화성에서 김장생의 손자 김익겸 등과 함께 순사)의 후손으로, 재산이 많은 집안에서 여유있게 자랐다.

그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해 16세 나이로 가노를 해방하고 전답을 무상 분배해준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한다.

1906년 홍성의병이 거병하여 홍주성 일본군을 공격하여 성을 탈환한 소식을 그도 들엇을 것이다.

그 의병에 그의 집안 사람도 참여하였다..

 

생가가 부잣집답게 닐리리 기와집이다..

집안 마굿간에 백마 모형도 잇다.

10대때 부터 말을 타고 무예를 익혔을 것 같다..

 

1910년 경술국치를 맞고 군대가 해산 되자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나선다.

1920년 10월 21일 독립군을 이끌고 만주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거 섬멸한다..

그당시 민족의 우상같은 존재였다..

 

1930년 1월 24일 공산당원에게 암살 당한다..

이일은 훗날 아들 김두환이 우익의 기동대로 나서는 인연이 된다..

 

장군의 이웃사촌도 열심히 활동한다..ㅎㅎ

물론 그의 정신을 계승하겠지..

 

<오늘 걷기> 결성행정복지센터 - 결성관아 - 결성향교 - 청룡산 숲길 - 한용운 생가 약 8km

오늘은 홍성군 결성면에서 시작한다.

이번 테마는 내포문화숲길 중 내포역사인물길 4코스 <결성관아 - 김좌진 생가> 중 

결성관아- 청룡산숲길 - 만해 생가까지 걷는다.

<내비> 결성행정복지센타를 치고 가면, 주차장이 나온다..

사실은 여기보다 근처 사거리에 "클래식이 나오는 화장실" 옆 공용주차장에 주차하는 것이 편리하다.

클래식이 우아하게 나오는데, 헉..화장실에 휴지가 없다..ㅎㅎ

 

 

결성은 일제시대 이전에는 독립행정구역이었다.

마한 시대 고비리국, 백제 시대 결기군, 통일신라 시대이후 결성군이었는데, 일제시대 홍주와 합병되어

홍+성이 되었다..

내포역사인물길 4코스는 결성동헌에서 출발한다..

일단 청룡산 정상에서 원점회귀할지, 한용운 생가까지 갈지 결정하기로 한다..

 

결성아문..

 

원래 조선초에 현재 관아 뒷산 정상부에 있엇는데, 1665년 (현종 6년)에 이 자리에 건축되었다.

다시 1852년 임자년 현감 권명규가 개축했단다..

권명규는 1843(헌종 9년) 식년시에 합격한 사람이다.

 

동헌의 주건물은 망일헌(望日軒)이다..

해를 바라보는 건물..

여기서 해란 임금을 가리키겠지??

 

그옆에 작은 건물이 책실이다..

서재라는 말이다..

결성현감할만하다..

책실에서 책이나 보다가 심심하면 남당리가서 회좀 먹고..ㅎㅎ

 

돌아나오려다가 문득 사또의 살림집은 어디에 있지??

나중에 고지도를 보니 동헌 뒤에 계단이 있고, 그 뒤로 내아가 설치되어있다..

지금은 담장으로 가려졌지만..

 

관아 앞에 비석이 서있는데, 크기가 각각이다..

 

 

현감 이도연  거사비(去思碑)..

떠남을 아쉬워 하는 선정비, 공덕비와 같은 말이다..

크기로 봐서 적당히 공무수행하고 간 것 같다..

 

현감 권대응 영세불망비..

제일 크다. 비석돌도 좋고.. 영세불망..영원히 못잊는다??

비석이 온전 한 것보면 진짜 선정을 베푼것 같다..

 

반토막난 비석..

현감 박효??

누가 원한이 맺혀 부셨나?

하긴, 탐관오리들이 더 큰 선정비를 세우게 했다던가??

 

관아에서 조금 내려오면 형장청이 있다..

일제 시대때는 경찰 주재소를 여기에 설치했단다..

 

건물 옆에 형틀과 곤장이 있다..

저 곤장에 맞으면 10대만 맞아도 죽겠다..

흥부전에 돈 받고 대신 매를 맞아주는 알바가 있었다는 말이 실감난다..ㅎ

 

건물 뒷편에 1425년 정구령현감 전임때 심은 나무가 신목 대접을 받고 있다.

정구령은 1424년(세종 6) 9월에 덕행으로 천거되어 결성 현감에 제수되어 10개월 간 재임하고 이듬해 6월에 사직하였단다..

그는 사직후 안동시 풍양면 청곡리 포내 별실(浦內別室)에 괴목 3그루를 심고 삼수정(三樹亭)을 짓고 자신의 호로 삼고 자적(自適) 은거하였다..

그의 증손자 정광필이 영의정이 되었다..

 

이 나무는  일제시대 1935년  나무가지를 자른 주재소 주임 야마구치를 졸지에 벙어리가 되게 함으로써 신목의 지위에 올랐다..

항일 기개에 감복하여 신목께 절을 올리고 나온다..

 

고지도를 보면, 결성은 해미읍성과 함께 서해안 내포지역을 방어하는 임무를 띄고 있었다..

장차 읍성이 복원되면 제법 관광자원이 될만하겟다..

 

결성행정복지센터를 지나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본격적으로 내포역사인물길  4코스가 전개된다..

 

황매화도 곱게 피었다..

 

임득의 장군은 내포역사인물길 2코스 백월산 청난사에서 본적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 중 이몽학의 난 때 홍주목사 홍가신을 도와 반란군을 격파한 공로로 공신이 된 사람이다..

 

멀리 결성향교가 보인다..

고려 때에는 금곡리에 있었고, 조선 태종 때 이 자리에 세워졌다..

 

하마비와 홍살문을 지나면 데이지가 도포입고 도열하고 있는듯하다..

 

향교문을 들어서니 건물이 등을 돌리고 섰다??

명륜당...강의실이다..

원래 대성전과 마주보게 설계하나보다..

 

 

향교 마당에서 바라보니 오서산이 우뚝하다..

이제 여기로 와야지??

옙, 백제부흥군길 1코스로 찾아뵙겠습니당..ㅎ

함박꽃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향교가 있는 동네이름은 모두 교동이던가 교촌이다..

 

논도 모내기 준비하느라 물을 받고 있다..

 

홍성한우..유명하다..

이지역도 소똥냄새가 코를 찌른다..

 

 

드디어 청룡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초입에서 만난 유채꽃..

눈이 황홀하다..

 

청룡산 숲길이 기대된다..<계속>

산혜암을 지나 정상으로 계속간다.

진달래가 엔딩이 아니라 엔드리스로 이어진다.

 

울퉁불퉁 바위들이 모여선 장소..

용봉산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전설이 있다.

백월산과 용봉산이 중간지점 마을에 사는 노래 잘하고 이쁜 송가인 닮은 소향아씨를 두고 돌싸움을 벌였다.

백월산은 힘이세서 돌을 엄청 던져 용봉산을 이기고 소향아씨를 차지했다.

그래서 백월산보다 용봉산에 돌과 바위가 많아졌다는 이야그 올씨다..

 

중턱에 이르니 멀리 예산 봉수산이 보이고, 가까이에는 홍주경기장이 보인다.

경기장 뒷편에 왕년에 활쏘던 홍무정이 잇는데..ㅎ

 

막판 스퍼트..수직계단을 살곰 살곰 올라간다..

 

팔각정에 오르면 꽃과 나비가 너울 너울 춤추는 화접세상이다..

https://youtu.be/k1AiXrESNTA

 

 

얼굴바위..

정말 닮앗다..

 

코뿔소 바위..

코부분이 매력 포인트..ㅎ

 

이 코뿔소는 문신을 하고 꽃을 들고 사랑을 고백한다..

누규??

안면도(安面島)??

 

선녀가 우주선 타고 내려왔나?

우주선 불길로 땅이 정화되었나??

아니면, 선녀가 번질나게 내려와서 그런가???

 

그 뒷바위가 엄마에 기댄 아기 모습이라..

여기서 빌면 아이가 생길 것 같기는 하다..ㅎ

 

홍후만전묘..청난사라고도 한다.

홍주 목사 홍가신을 모신 사당이다..그의 호가 만전(晩全)이다

오늘 보니, 사당앞에서 무녀인듯한 사람이 불면증 환자를 치유하는 소박한 행사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홍주목사 홍가신은 백월산신이 되었을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 1596년 부여 홍산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이때를 배경으로 하고 잇다.

이몽학은 의병 모집 명분으로 세력을 모아  7월 6일 부여 홍산에서 거병하여 부여 임천, 청양, 정산, 대흥 등 3일만에 6고을을 점령한뒤 7월 9일 승세를 몰아 5천병력을 이끌고 내포의 맹주 홍주성을 공격한다.

홍주목사 홍가신은 인근 보령 오천성에 주둔하는 수군절도사 최호의 병력을 끌어들이고 남포, 보령의 군사도 집결시켜 방어에 들어간다.

또한 충청순찰사 종사관 신경행, 무사 박명현, 임득의 등 무사와 함께 평소 활터에서 수련하던 활꾼 수백명을 차출하여 만전의 준비를 갖춘다.

이윽고, 초반에 박명현이 출전하여 반란군 선봉을 급습하여 기세를 꺽고, 이어 대치 상황에 이르자, 밤중에 총통과 화전을 쏘아 반란군 막사와 민가를 불태우자 적은 혼란에 빠진다. 그런 상황에 비까지 내리자 기세가 꺽인 이몽학이 7월 11일 새벽 퇴각한다.  이때를 노려 대반격에 나서니 반란군은 괴멸되고, 이몽학은 부하에게 피살되며 반란은 진압된다. 

 

***

반란 평정후 청난공신을 책봉하는데, 

홍주목사 홍가신이 1등 공신, 충청수사 최호, 선봉으로 활약한 박명현이 2등공신, 전 병사 신경행과 임득의가 3등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이들은 임진왜란시 호성공신, 선무공신 등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홍가신..

그는 화담 서경덕의 제자였고, 퇴계 이황에게도 배운 사람이다.

이순신과 사돈관계이다(홍가신의 아들과 이순신의 딸이 결혼햇다)

광해군 2년 형조판서를 끝으로 퇴임하여 아산에서 살았다.

 

최호

충청수사 재직시 청난공신이 된후 정유재란시 충청수사로 원균휘하에 참전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박명현

무과급제자로 이몽학의 난때 홍주성에 참전하여 반란군을 청양까지 추격하여 괴멸시킨 공로로 청난공신이 된다.

그는 광해군 때 임해군 반역사건에 연루되어 죽고, 공신첩도 박탈된다.

 

임득의

청난공신이 된후 경상우도병사를 지낸다.

 

신경행

당시 충청순찰사 종사관이었는데, 홍주성에서 공을 세워 청난공신이 되고, 광해군 때 충청병사를 지낸다.

 

 

이몽학의 반란 여파로

전국 의병장들이 의심을 받게 되고, 이후 의병활동이 위축된다. 

특히 호남의 의병장 김덕령은 고문 받다가 죽게 되고, 곽재우도 몸조심하게 된다.

이는 정유재란 초반에 고전하는 이유가 된다..

더구나, 선조은 인기있는 장군들도 의심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이순신이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다 회생했다..

그때 선조가 이순신을 죽였으면, 조선의 앞날도 예측하기 어려웟을 것이다..

 

**

어쨋거나, 홍가신은 그뒤 이 지역 백성들 마음 속에 은인으로 자리잡아 "백월산신"으로 모셔지고 잇다

사당안에 홍가신과 그 가족의 목각, 공신 위패들이 모셔져 있다.

현재도 무속행사가 행해지고 있는 현장이다..

 

이몽학의 난 때 억울하게 죽은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마음을 대변하는 시..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타는구나.
저 산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내 몸에 연기 없는 불은 끌 물 없어 하노라.

 

팔각정에서 정상까지는 50미터 더가야 한다..

 

코끼리 바위라는데, 글쎄??

지나고 나서 보니 오히려 강아쥐 바위가 맞는데?? ㅎ

 

백월산 정상이다. 

394m에 불과하지만, 포부는 서해안 3대 월산을 자부한다.

황해도 구월산, 영암 월출산, 다음이 홍성 백월산이란다..

그리고 여기는 현역 산신도 계시는 곳이다..ㅎ 

 

정상에 앉아 자세히 들여다 보니 홍주성 동헌 자리가 보인다..

 

 

 

동쪽으로는 예산 봉수산이요..남쪽으로는 오서산이 우뚝하다..

 

북쪽으로는 용봉산이로다..

정상에 앉아 점심요기를 하면서 한참을 앉았다.

왕년에 활쏘고, 단소불던 시절을 떠올렸다.

***

2000년초반 이야기..

1) 홍성에 근무하러 갈 때 사람들이 당부하는 말이 "홍성에 가면 투서를 조심하라" 였다.

어떤 사람은 홍성에 가면 동네 슈퍼에서 법전을 판다는 말을 듣고 왔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결혼 혼수 중에 법전이 들어있다는 말을 들엇다는 농담도 했다.

겪어보니, 홍성 사람의 기질이 불의에 참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심하게 갑질을 하면 과감하게 투서하는 것이다. 반대로 공정하게 처리하면 사람들이 고마워 할 줄 안다.

 

2) 홍성 사람 기질을 이야기하려면, 홍성 출신 위인을 거론해야 한다.

  최영장군, 사육신 성삼문,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 만해 한용운..등이다..

이 말을 듣고 "제명대로 산 분은 없는 것 같네"하고 농담을 했지만, 그만큼 이 동네 기질이 백월산처럼 굳세고, 용봉산처럼 강건한 것 같다.

비슷한 기질의 동네를 거론하자면, 호남의 목포, 영남의 마산 쯤 되지 않을까??

 

 

내포역사인물길 2코스는 백월산 정상을 지나 병오의병비로 향한다..

병오의병??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에 의병이 봉기했다.

홍주(홍성)에서는 이듬해 1906년 병오년에 의병이 봉기했다.

민종식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전답을 팔아 의병을 모집했다. 

1906년 5.19. 백월산 아래 금마평(현 병오의병비)에 의병 600명이 집결했다. 

대포 2문을 앞세우고 홍주성 동문과 서문을 공격하자, 일본군민이 북문으로 도주했다.

홍주성을 점령하자 일본군 400명이 반격해왔다.  

5. 31. 새벽 홍주성을 빼았겼다. 체포된 의병장들은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의병의 유해는 홍주의사총에 안장되었다. 

 

활공장을 지나 하산하려다가 원래 계획대로 원점회귀한다..

 

<오늘 걷기> 이응노생가 - 산혜암 - 팔각정 - 청난사 - 정상 - 원점회귀 약 6km

홍성으로 간다. 내포역사인물길 2코스 구간을 걸으러..

얼마전, 동행이 무릎 부상을 입어 혼자 가는 길..

이제는 나이에 맞게 코스완주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걷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은 2코스 중 이응노생가 - 백월산 정상 사이를 왕복하는 6km를 걷기로 한다..

**

이응노생가에 도착하기 2km 전 용봉산이 보이는 동네에 연분홍과 진분홍 매화가 멋지게 피었다.

차를 돌려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고 깊이 감상한다.. 

 

성장한 차림의 요염한 여인이 유혹처럼 치명적인 아름다움..

 

반면, 백월산은 하얀 벚꽃의 시중을 받고 있다..

낙화로다..꿈이로다.. 

노래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듯하다..

 

벚꽃이 버들과 만나니, 시 한수가 생각난다..

조여청사모성설(朝如靑絲暮成雪)..

아침에는 검은 머리였는데 저녁에는 눈처럼 백발이 되었네

 

여기서는 우여청사좌성설(左如靑絲 右成雪)..

우측에는 푸른 실이 걸리고, 좌측에는 흰 눈이 내렸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개울건너 생가로 간다..

 

고암(죽사) 이응노..

구한말 왕실화가 해강 김규진으로 부터 한국화를 배우고 활동하다가 프랑스로 건너가 추상화를 그렸다.

한국화, 서예, 서양화를 아우르는 서예추상, 군상 등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었다.

그의 그림과 인생은 나중에 대전 이응노미술관 구경까지 한 후에 별도 글로 올리기로 하고, 

오늘은 걷기에 집중한다..

 

그러한 잠시, 복사꽃이 눈에 들어와 마음까지 흔들어 놓는다..

평생 같이 살라면 질리겠지만 봄날 한철은 같이 살기 좋은 꽃..ㅎ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버드나무에게 다가간다.

버드나무 최고의 시는 하지장의 "영류(詠柳, 버드나무를 노래함)"다..

 

이월춘풍사전도(二月春風似剪刀)라는 명귀를 쓴 시인

"(음력) 이월 봄바람은 가위같구나"

버드나무에 신록의 나뭇잎이  올라오는 모습을 마치 봄바람이 가위질하여 오려 붙인 것처럼 묘사한 감각이 너무 현대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碧玉妝成一樹高 
萬條垂下綠絲? 
不知細葉誰裁出 
二月春風似剪刀 

 

벽옥장성일수고
만조수하록사조
부지세엽수재출
이월춘풍사전도

 

푸른 옥빛으로 단장한 키 큰 버드나무
가지마다 푸른 끈을 아래로 드리웠네
저 가느다란 잎은 누가 오려 만들었을까
(음력) 이월의 봄바람은 가위와 같구나

 

***

어디 그뿐이랴, 김구선생이 인용하여 유명해진 시귀도 있다.

월도천휴여본질 (月到千虧餘本質) 

유경배별우신지 (柳經百別又新枝)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본질은 그대로이고

버드나무는 백번 부러져도 다시 새가지가 돋는다.

 

***

대중가요 실버들, 애교있는 투정도 멋지다.

 

실버들을 천만사 늘여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실버들 천만사 늘어진 물빛에 비친 백월산의 풍광이 오늘 걷기의 즐거움을 예고한다..

 

용봉산은 벚꽃비를 맞으며 장도를 환송한다..

 

왜가리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한다.

"아침부터 웬 신파여~"

 

왜가리가 뭐라카든 매화와도 눈인사하고, 수선화와도 딥인사를 한다..

 

이응노생가옆 전시관으로 들어가 전시품을 감상하고.. 

 

그는 파리에서 화가로 활동하던 중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생활을 하다가 

1969년 사면되어 파리로 떠났다.

1977년 부인 박인경이 백건우,윤정희부부 납치미수사건에 연루되면서 한국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1983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고, 19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한다.

그의 작품은 대전시에 기증되어 2007년 시립 이응노미술관이 개관하였고, 

2011년에는 홍성 이자리에 이응노생가가 복원되었다.

 

카페 벽이 쓰인 수상한 저 글씨 " 1937년 9월 11일 17시 40분 스탈린"

1937년 스탈린이 소련 연해주 한인들을 중앙아시아(우즈벡, 카자흐)로 강제이주 시킨 사건을 의미한다.

정추..라는 사람과 관련된다.

그는 광주 출신인데, 해방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1956년 장학생으로 소련 모스크바 유학중 남로당계 숙청사건에 자극을 받아 쏘련에 망명한다. 그후 카자흐스탄에서 음악활동을 하였다. 

그가 작곡한 <극적 교향조곡>에 “1937년 9월 11일 17시 40분 원동(연해주) 한인 강제 이주 희생 에 대한 추억”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그는 1991년부터 고향 광주를 방문하는 등 한국에서 음악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쏘련이 붕괴된후에는 카자흐스탄 시민권자가 되었고, 2013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사망했다.

 

***

정추의 행적과 완전 대비되는 사람이 윤이상이다..

윤이상..

한국에서 음악가로 활동하다가 1956년 파리로 건너간후 서베를린에 정착한다..

윤이상은 1963년 방북하는 등 친북활동을 하다가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하다가 1969년 특사로 석방된다.

그는 1971년  서독국적을 취득하고 친북활동을 이어가고, 한국내 활동은 금지되어 생전에 고향 통영을 방문하지 못한다. 1995년 독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

해방전후, 좌우의 대립, 이념과잉의 시대에 지식인, 예술인의 삶은 마치 봄날의 꽃처럼 다양하게 피고 지었다..

누구를 탓하랴~, 시대를 탓하랴~

 

이제 백월산을 향해 출발한다.

명자꽃이 자주고름을 입에 물고 뜨겁게 환송한다..ㅎ

 

벚꽃 엔딩..오늘 지대루 만났다.

입김만 스쳐도 휘날리네~~

 

철쭉부대가 착검을 하고 돌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보무도 당당히 주택가로 걸어들어간다..

 

 

거기서 복사꽃을 또 만났다..

오빠..나 좀 봐!

참 곱다..ㅎ

 

주택가 끝에서 산길이 시작된다..

 

아니?? 진달래..너 마저??

여기는 시간이 거꾸로 도나??

엔딩을 맞을 꽃들이 이리 싱싱하게 지천이네...

 

야는 자두꽃인가??

 

진달래가 유혹하는 대로 으슥한 샛길로 들어섰더니..

헉... 별천지네..

 

진달래, 벚꽃..자목련까지 춘정을 못이겨 땡땡한 몸매를 가누지 못하고 베베꼬꼬있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흰꽃과 백구가 하얌을 다투는 산사..

무쟁삼매는 어디 갔는고??

 

부처님은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산혜암 대웅전 벽에 달빛이 곱게 내려앉았는데..

이곳이 예전에 월산성(月山城)터였음을 증명하네..

 

 

백월산 올라가는 길에 만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백구의 세상이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