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간정사)

 

논산, 부여를 다녀온 다음날 대전 가양동의 우암사적공원에 갔다..

논산의 돈암서원에서 이어진 인연을 마무리할 참이다..

사계의 제자 우암과 동춘당..조선 후기 성리학의 핵심 코드를 형성한 인물들..


우암 송시열은 소제(동구 소제동)에 살면서 흥농촌(興農村)에 서재를 세워 능인암(能仁庵)이라 하였고, 그 아래에 남간정사를 지었다.
우암이 노년(1683)에 세운 강학당이다.


샘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의 양쪽 축대 위에 방을 들이고 그 사이로 대청마루를 연결하여 공중에 뜬 누각처럼 만들었다.
집 앞에는 고봉산 계곡의 물길을 막아 연못을 만들었는데 가운데에 둥근 섬을 만들고 왕버들을 심어 운치를 더했다.

역시 직접 심었다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여기서도 빛난다..


 

남간정사의 현판은 곡운  김수증(金壽增)의 글씨다..

그는 3학사 김상헌의 손자로 김수항의 형이다..그 형제는 우암과 같은 노론으로 정치적 부침을 같이한 사람이다.  

그는 강원도 화천에 은거하면서 조세걸로 하여금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한 것을 보면 풍류를 좋아하는 인물 같다..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은 숙종시 영의정을 지냈고, 그의 5대손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유명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열었으니 과연 노론의 핵심들이다.. 

 

조세걸은 달마도로 유명한 김명국으로부터 그림을 배운사람이다..



(유물전시관-효종의 밀찰)


(효종이 하사한 초구)

 

효종이 즉위한후 재야세력인 사계 김장생의 문인들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기용하여 정국의 돌파를 시도한다..

중종이 조광조를 기용하듯..

효종은 대군시절 우암과 사제관계로 맺어져 잇어 그에게 큰 기대를 건다..

그리하여 그에게 자신의 북벌의사를 밝히는 밀찰을 보내고, 또 북벌시 만주벌판의 추운 날씨에 입으라고 담비 가죽옷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효종과 우암의 생각이 일치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우암이 효종만큼 북벌에 적극적이었느냐에 관하여는 의견이 분분하다..

우암이 명나라의 은혜에 대한 의리를 강조한 것은 분명하지만, 효종처럼 실질적으로 북벌을 단행하려는데에 대하여는 소극적이었다는 견해가 최근에 강력히 대두된다..

이러한 견해의 책들이 이덕일 저 "송시열, 그들만의 나라", 박성순 저 "선비의 배반"등이다.. 

  

 


(우암의 글씨)

 

 

그는 주자가 남송의 효종에게 말한 것 처럼 왕과 사대부들의 성리학에 터잡은 심성수양을 통한 내치를 완성하여야 북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효종의 실용적 경세 개혁을 통한 군비의 확충과 군사조련 등 우선정책을  천박하게 생각 하였다는 것이다..

효종 사후에 벌어진 예송논쟁이나 남인과의 투쟁에서 보여준 그의 역정은  그가 유비 사후 북벌의 대업을 짊어진 제갈량과는 다르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암사적공원 내 정자)

 

우암은 대전의 보문산을 지날 때는 산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부채로 가리고 지나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보문산은 그 모양이 다양하여 보는 시각에 따라 각기 산의 형태를 달리 해석하여 왔던 것이다. 즉 보문산은 젊은 여인이 머리를 풀고 통곡을 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여인의 나체로 누워있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형태를 지니고 있어 이 산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에서도 우암의 성격이 드러나는듯하다.

즉 그는 학문적인 정통성,엄격성을 유지하는데는 철저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고 강경, 과격하게 발현되어 적이 많았고, 결국 당쟁의 표적이 되어 83세의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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