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양궁선수들이 우리나라 역대 금메달 중 25%이상을 따냈다.

양궁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동이(東夷)족의 후예로서 활 유전자가 내장되어 있어 그런  게 아닐까?

夷자는 大 + 弓 이 합쳐진 글자로서 그 의미를 활을 잘 쏘는 족속을 표시하는 글자이다.

흔히 이(夷)를 오랑캐 "이"라고 읽는데, 이는 중국 사람들 입장에서 오랑캐고, 우리 쪽에서는 "조상 이" 또는 “큰 활족  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최근에 나오는 천자문 책에도 “오랑캐 이”라고 되어있으니 일본이나 중국의 역사왜곡 광정뿐 아니라 우리의 주체적 인식을 바로 잡을 필요가 크다)

하여간 고구려 건국 설화의 동명왕의 별칭인 “주몽”도 활 잘 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 하고, 조선의 건국의 주인공 이성계도 명궁이었다 하니, 활로 일어선 나라의 역사라 할 것이고, 이제는 올림픽에서 활로 일어서고 있다 하겠다.

하지만 우리가 양궁의 선전에 열광하면서도 그 저변에 전통의 궁도(국궁)이 있어서 대전에만 활터가 4곳이 있고 전국 군단위에도 1-2곳의 활터가 있으며 각종 향토축제에서 100여개 이상의 궁도대회가 개최되고 있는 사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더구나 활의 종류나 용도에 있어서는 더 말 할 것도 없다.

예를 들어보자

“불멸의 이순신”장군은 평소 1일 10순(1순은 5발이므로 50발임) 내지 18순(90발)의 화살을 날리며 기량과 체력을 단련해왔으니 국궁은 일종의 전투체육이었다.

현재까지 전국에 활터가 많고 궁도대회가 많은 것도 우리 역사상 군대의 주력 무기인 활을 단련하는 전투체육으로 집중 육성을 해온 유산이기 때문이다.

우리 활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 소뿔, 소힘줄을 사용하여 만든 각궁(角弓)이다. 

그런데 이성계는 어떤 활을 사용하였을까?

고려말 위화도 회군이전에 공민왕의 명으로 이성계가 요동에 출병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고구려 옛도읍지였던 오녀산성에 있던 여진족이 있었는데, 산성이 높고 험난하여 공략이 어렵게 되자 성 아래에서 성위에 보이는 자를 편전(片箭)으로 쏘아 수십명을 살상하니 여진족이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였다고 한다.

또한, 전남지역에서 왜구들과 싸워 거둔 황산대첩시 적장 아기발도를 활로 쏘아 죽였다고 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이때에도 편전을 사용하지 않았나싶다.

편전은 길이 8치 정도의 작은 화살로 소칭“애기살”이라고 불리고, 이것은 대나무로 된 발사통이 달린 활에 넣어 쏘는데, 보통 비거리가 1000보(600~700미터)에 이른다고 하니, 그 정확성과 살상력이 대단하였던 것 같다.

또한 서울 중량천 하류에 “살곶이 다리"라는 곳이 있는데, 그 유래가 이렇다.

이성계가 함흥차사 사건이후 한양으로 복귀하는데 태종이 서울 도성 밖인 살곶이다리 부근까지 나와 차일을 치고 영접하려고 하는데, 이때 하륜이 차일 가운데 큰 기둥을 세우라고 권한다. 한편 이성계는 한양으로 들어오다가 태종이 눈에 들어오자, 방석,방번의 원한이 생각났는지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는데, 태종이 급히 큰기둥 뒤에 숨어 맞추질 못하였다.

그러자, 이성계가 하늘의 뜻인가 보다 하면서 탄식하였다하고, 화살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그 때부터 그곳을 “살곶이다리”로 부른다 한다.

내 생각에 그 때는 이성계가 우발적으로 홧김에 각궁을 쏘지 않았나 싶은데,  늙어서 실력이 줄었을 가능성도 크고, 그렇지 않으면, 태종 측에서 태종이 하늘의 명을 받은 임금이라는 선전용으로 유포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싶다.


자! 이렇게 들여다 보면 전통의 활도 살아 움직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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