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걷기

이번엔 예산군 대흥면 예당저수지 건너편 봉수산 자연휴양림이다

19대 총선 투표를 불이나케 마치고 떠나온 길..

신양을 지나니 물안개 속에 예당호가 그림같다..

 

 

대흥면사무소 부근에서 먼저 비석거리를 만난다..

늘어선 영세불망비 중에 자발적으로 진심에서 세워진 것은 몇개일까?

그중 우측 2번째 귀부가 잇는 멋진 비석은 영의정 김육을 기리는 영세불망비다..

이 시골에서 영의정을 기리다니?

당시 영의정 김육이 대동법을 적극 시행하여 농민들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는 이야기..

대동법은 공물의 납부를 보유 농지와 비례하여 쌀로 세금을 납부케함으로써 중간업자들에 의한 방납 횡포를 막아 현물로 내던 하층 농민들의 고통을 감소시킨 개혁안이다.

광해군 때 시행되어 그뒤 김육이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대지주 양반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100년만에 완결시킨 제도.. 

김육은 1638년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고,

1650년에는 대동법 실시 문제로 반대세력인 충청 연산의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며 우암 송시열의 스승인 노론의 영수 신독재 김집(金集)과 논쟁하였고, 1651년 영의정에 임명되어 대동법을 충청도에까지 확장시행하였으며, 1654년 6월 다시 영의정이 되어 호남지역까지 대동법 확대에 힘쓰다가 1658년 9월 죽었다.
이 비는 정말 자발적으로 세운 것 같다. 

 

**2014.12.28. 추가분

대동법의 효과는 종전의 백성의 조세부담을 1/5 정도로 줄여 준 것과 같았다..

하여 효종에 전국적으로 시행된 이후 아들 현종 때 경신대기근이 발생하여 수백만명이 굶어죽었을데..

그때 백성들의 말이 " 그나마 대동법 때문에 살아남았지, 아니었으면 전부 죽었을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

결국 임진, 병자 양난을 거치고도 명, 왜와 달리 조선왕조가 살아 남은 것은 이러한 개혁덕분이라고 한다..

 

 

김육은 중종때 문신 김식의 자손이다.

김식은 조광조 측근으로 함께 역적으로 몰려 죽으면서 집안이 풍비박산되어 자손들은 가난하게 살았고,

더구나 김육은 어린 나이에 연속 8년간 상주 노룻하면서 죽을 고비도 넘겼고, 그뒤 생원시에 합격하여 셩균관 유생이 되어 공부하다가 광해군의 폐모사건 등에 실망하여 가평 잠곡에 은거..

초기에는 동굴에 살면서 숯을 지고 새벽에 동대문까지 걸어가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던 사람..

양반으로 백성보다 어려운 생활을 겪어왔기에 조세제도의 모순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다..

인조반정후 재야인물을 천거받는 유일로 벼슬에 나와 경제관료로 실력을 배양..조세제도를 연구..

충청관찰사로 부임하자 적극적으로 대동법 실시를 주장했던 것이다..

 

 

이동네에 의좋은 형제 공원과 동상이 있다..

세종실록에 나오는 대흥사람 이성만, 이순형제의 이야기..

 

 

담밤에 남몰래 볏섬을 상대방에게 날라주다가 어느날 밤에 마주쳤다는 이야기..

농심라면이 이를 모티브로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로 히트를 쳤다는 스토리의 원조..

흥부전의 정반대 버전..

길가다 주운 금덩이를 나누었다가 다시 강물에 버렸다는 양화진의 형제는 이들과 DNA가 비슷하겠다.

 

 

공원 형제집 주련에 "춘광선도길인가(春光先到吉人家)" 써있다..

봄볕이 먼저 닿는 집이 좋은 집이라니,

뭐, 봄볕을 찾아 다는 것도 좋은 일이렷다.

 

 

이제 길은 동네를 거쳐 봉수산 자연휴양림으로 향한다..

 

 

이 고장도 슬로시티로 지정된 마을이다..

슬로시티란 느리게 먹고 느리게 살기를 추구하는데, 자연히 자연과 전통을 보존하면서 행복한 발전을 도모한다는 것..

 

 

휴양림으로 오르다가 잠시 숨을 돌리니 예당호가 눈에 가득..

 

 

 

아! 진달래다..

이곳에 온 목적이 봉수산의 진달래를 감상하려고 한 것이라..

 

 

자연휴양림을 지나서

 

 

봉수산 임존성 북문지로 올라 전망대에 앉으니..

산슈유만 반기고..

진달래?는 아직 피지 않았고 물안개! 만 가득하다..

 

 

전망대에 앉아서 점심 요기를 하며 호수를 눈안에 넣으니 시원하다..

 

 

성벽따라 임존성 투어를 시작한다.

 

복원공사중인 남문지를 지나니 남서 성벽이 펼쳐진다.

백제 부흥을 위헤 모인 사람들..흑치상지, 복신, 도침..그러나 분열로 꿈은 사라지고..

 

 

이 성벽은 최근에 복원한 것..

이성은 그 후 후삼국시절, 고려의 몽고항전기에도 요충지였다 한다.

 

 

백제의 옛 땅위에 터를 닦아서

새날을 밝히려고 우리 모였네..

 

교가의 가사처럼

백제의 깃발이 나붓긴다.

 

 

성벽의 망루를 힘겹게 돌고 봉수산 정상을 거쳐 내려오는 길..

 

 

대흥 관아에 들린다.

임성아문이라 써있다.

백제의 임존성, 신라의 임성군, 고려이후 대흥현이 되었다.

 

 

관아의 고목은 이몽학의 난을 알려나.

영화 "구름을 벗어난 달은"의 주인공.. 이몽학은 임진왜란시 부여 홍산에서 거병하여 청양, 정산, 이곳 대흥을 함락시키고

홍주성(홍성)으로 진군하나, 패퇴한다..

 

 

미인안색고인서(美人顔色古人書)

미인의 얼굴은 옛 책속에 있다.

미인은 누구일까?

조선시대에는 왕을 뜻하니 미인을 보려면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해야한다는 의미렸다

 

요즘 버전으로

"10분 더 공부하면 남편(아내) 얼굴이 바뀐다."

 

우과송성인학행(雨過松聲引鶴行)

비온 뒤에 솔의 소리 학의 무리 끌어온다..

 

 

관아를 돌아나와 예당호를 돌아보면서 식당으로 향한다..

 

 

오늘의 메뉴는 저수지에서 잡힌 물고기로 끓인 어죽을 바라보며..대흥식당에 앉아 출렁이는 호수를 바라보다.

 

오늘 걸은 길  : 의좋은 형제 공원- 배맨나무 - 자연휴양림- 임존성-정상- 작은 비티고개 - 동헌 (약 9K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