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이 쓴 낭혜화상탑비..
능관인(能官人)..
최치원이 중국으로 떠나고 남보다 100배의 노력으로 18세에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하게한 원동력..
육두품..골품제를 철페하라는 뜻을 응축한 한마디...
낭혜대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옛 스승으로는 육경(시경, 서경, 예기, 악기, 역경, 춘추)이 있고, 오늘날 보좌하는 신하로는 삼경이 있습니다.
저같이 늙은 산승이 무어길래 편안히 앉아 메뚜기처럼 땔나무와 쌀을 축내겠습니까.
다만 왕께 드릴 말씀이라면, 바로 '능관인'(能官人) 세 글자뿐입니다."
이튿날 대사는 행장을 차리고 새처럼 훌훌 떠나갔다.
{능관인 : 관직을 잘 임명하는 것, 즉 골품제를 떠나 능력에 따라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라}
최치원이 귀국하여 한림학사로 중앙정계에서 활동하다 한계에 직면하자 외직으로 물러나는데...
함양 태수로 부임하며 노닐던 정자..학사루..
함양에서 제방을 정비하는등 지역민의 안정에 힘쓰니 지금껏 그의 신도비가 내려온다..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책 10조를 쓴 상서장..
그러나,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기에 신라는 너무 노쇠했다..
그것이 최치원의 운명이었다..
그가 은거하였다는 가야산 홍류동게곡 농산정..
산수를 희롱하기엔 그의 심중은 너무 무거웟으리..
말년의 신비한 행몰으로 그는 우리나라 유 불 선의 원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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