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라진 금산 천내리 금강 풍경)
만리를 걷다.
1. 누가 만리를 걸으라 하나?
독만권서(讀萬卷書), 행만리로(行萬里路)..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를 걸어야 통찰력을 갖춘 위인이 되고, 걸출한 작품이 나온다는 말씀이다.
이런 인물이 사마천이다. 사마천은 평생 유람을 좋아하여 젊어서 자부심이 가득할 때는 발바닥이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한다. 이는 그가 오직 경치구경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다. 장차 천하의 위대한 경관을 다 구경하면서 자신의 기상을 기른 뒤에 다시 그것을 토하여 책으로 쓸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온 책이 사마천의 사기다.
지금 그의 책을 읽으면 그가 평생 유람했던 곳들이 모두 거기에 녹아있음을 느낄 것이다.
옛날 책이란 활자가 크고 두께도 얇아 만권 읽기가 가능할지 몰라도 요즘 책은 활자도 작고 페이지도 두꺼워 만권의 책을 읽기 쉽지 않다.
하지만, 길이야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거나 줄어들지 아니하였으니 지금도 만리(萬里)를 걷는 것이야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영월 동강 거북이 마을 가는 길)
2. 때늦은 필연
물론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우연히 2009. 3. 28. 충북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 부근 금강을 걸으며 나의 걷기는 시작되었다.
이를 일컬어 때늦은 필연이라고 한다던가..
따스한 봄볕이 등을 토닥 토닥 두드리는 것 같은 포근함..신선한 바람..물오른 신록의 가지들..재잘거리는 강물..함께 부르는 노래..
바람은 불어 불어 청산을 가고
냇물은 흘러 흘러 천리를 가네
냇물따라 가고 싶은 나의 마음은
추억의 꽃잎을 따며 가는 내 마음
이 노래처럼 걷기는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싹을 띄웠다.
그 이후 야금 야금 걷기의 보폭은 넓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매주 주말엔 각종 올레길, 둘레길을 걸으러 나섰다.
드디어 4년이 지난 2013. 11. 2. 익산 무왕길을 걸으며 총 4000km(1만리) 걷기를 달성했다.
골프로 치면 첫 싱글, 활쏘기로 치면 첫 몰기, 태권도로 치면 초단 입단 정도의 의미지만 나에게 소중한 의미로 다가온다.
어느 꽃이 아름답지 아니하고, 어느 길인들 개성이 없었으랴만
그동안 걸은 만리의 코스 중 인상적인 길을 몇 가지를 굳이 꼽아 추억을 되살려보자.
(1) 단연 첫손가락은 제주 올레길이다.
제주 올레길을 만들어 "걷기 문화“ 열풍을 일으키고 전국에 각양 각종의 길을 창출하고 일본 큐슈에 올레길을 수출하고 아웃도어 시장을 급성장시키고 국민건강보험지출을 감소시킨 공로로 제주올레 개척자 서명숙씨는 국민으로부터 훈장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제주올레길 걷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그중 우도봉과 1코스 성산일출봉 일대의 봄꽃은 아직도 생생하다.
(2) 울릉도 둘레길 : 이국적인 풍광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라.
(3) 곰배령과 아침가리 계곡 :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아침가리골의 계곡트래킹과 계곡의 장광설을 들으며 오르는 곰배령 길 그리고 그 정상에서 만나는 야생화들..
(4) 퇴계 오솔길 : 낙동강 상류 경북 안동시 가선리 농암종택에서 물길따라 걷는 오솔길, 퇴계선생의 시라도 한수 읊으며 걸으면 더욱 좋다.
(5) 하회마을 가는 길 : 경북 안동시 병산서원에서 강변 산길을 너머 하회마을을 구경하고 탈 박물관에 이르는 강변길에서 유비무환의 교훈을 말해주는 노재상의 넋두리를 듣는다.
(4) 지리산 둘레길 : 특히 천왕봉을 바라보며 걷는 3코스에서 지리산을 큰 종으로 생각하며 수양했던 옛선비의 호연지기를 담는다.
(5) 양구 DMZ길 : 분단의 현실을 각인하고 통일이야 말로 청년들의 활로를 열고 7040의 비상을 이루는 길임을 자각한다.
(6) 부산 갈맷길 : 푸른 바다와 갈매기와 함께 겨울에 걸어라.
(7) 태안 해변길 : 걷고 걷고 또 걷는다! 멀리 반짝이는 윤슬이 볕밭 지나서..
(8) 전남 삼남길: 유장한 들판을 만나거든 육자배기를 따라 부르며 걸어라.
(9) 통영 미륵산 둘레길 : 정상에 올라 한산대첩의 현장을 바라보고 그 감개로 둘레길을 걷자.
(10) 대청호 오백리와 계족산 둘레길 : 세상을 돌고 돌아보고서 우리나라가 IT 강국임을 깨닫듯이 만리를 걷고 걸어보니 비로소 동네 길의 진가가 눈에 들어 오네.
(대청호 막지리 가는 길)
3. 걷기도(道)
그 동안 우리나라에 불어 닥친 걷기 열풍은 뜨겁다.
덩달아 아웃도어 시장도 급성장하고 다 죽어가던 외국의 브랜드가 우리나라에서 기사회생하였다.
왜 걷기일까? 아마 우리 세대 60-90시대를 “경쟁과 빨리 빨리”로 숨가쁘게 살아왔던 시대에 대한 반작용인가?
경제 수준은 올라갔으나 행복감은 떨어지고, 자기는 열심히 일한다고 하는데 평가자(파트너,소비자,국민)의 불평만 들리는 현실 속에 “삶의 속도를 영혼이 따라가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걷기는 삶의 속도를 인위적으로 낮추어 주는 “느림의 문화”이다.
따라서 걷기는 간새처럼 걷고 해찰하며 걷어야 제 맛이다.
차와 함께 빠르게 살면서 놓쳤던 풍경 속의 나무, 꽃, 돌, 흐르는 물과 눈을 맞추는 여유가 필수다.
그러나 여기도 60-90의 타성이 붙어서 장거리 걷기와 무슨 코스 완주를 목표로 하는 걷기는 노탱큐다.
이런 느림의 철학이 슬로시티, 슬로프드, 슬로패션의 문화를 창출하였고, 더 나아가 “가치관의 전환”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차 중심의 도로 설계, 도시설계에서 사람, 걷기 중심의 도로설계와 도시설계로 바뀔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나라사랑은 먼저 세종 연간 세종실록 지리지를 통해 나라의 풍속과 전승이 곱게 정비 되었고, 영,정조 시대 불었던 진경 산수화 시대에 우리 산하를 그리고 감상하면서 꽃 피웠다.
해방이후 나라에 대한 낮은 자긍심은 2002 월드컵을 거치면서 입을 통해 고양되었으며, 이제 제3의 물결처럼 닥친 올레 걷기 열풍으로 국토 사랑을 발과 마음으로 확인한다.
외국을 다녀보고 우리 땅을 요모 조모 걸어보고서야 진정한 우리 땅의 진가를 깨닫기 때문이다.
그래서 걷기는 느림이요, 깨달음이요, 사랑이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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