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산성길에서 바라본 남한강)

 

충주 걷기..중원문화길 2코스(목계나루 - 장미산성 - 중앙탑) 중 장미산성길을 걷는다..

장미산 마을에서 시작한다..

 

 

장미산성 성벽이 나타난다..

삼국시대 산성으로 백제, 고구려, 신라가 각기 강성할 때마다 주인이 바뀌었단다..

 

 

길은 봉학사를 끼고 산신당을 지나 이어진다..

 

 

원주, 여주 방향으로 북류하는 남한강이 보인다..

 

 

 

 

남한강을 조망하며 걷는 이 길이 참 좋다..

물론 햇살도 참 좋다..

 

 

총멘 사람들을 만낫다..

포수..사냥꾼이다..멧돼지를 탐색 중이란다..

 

 

이젠 급경사 계단이 이어진다..바로 강변도로로..

 

 

장미산이 훈수한다..

 

지자요수, 인자요산이라..

지혜로운 자는 산을 좋아하고, 인덕이 있는 자는 산을 좋아한다..

 

 

버스로 이동하여 고구려비 전시관에 들렀다..

고구려 장수왕 때 백제, 신라를 몰아부쳐 죽령과 차령 선에서 국경을 정한 고구려..

장수왕의 손자 문자명왕이 할아버지를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웠단다..

고구려 유물 치곤 작고 소박하다..

 

누가 말한다..왜 고구려는 백제, 신라를 멸망시키고 통일하지 않았는가?

고구려는 수많은 속국을 둔 천하 패권국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굳이 남의 나라 대를 끊으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다시말해 그때는 아직 삼국 통일의 대의나 의식이 싹트지 않았다고 하겠다..

 

 

이번에 중앙탑에 왔다..

8-9 세기에 세워졌다니 통일신라 때의 건축물..

 

중앙탑 계단에서 수학여행팀 처럼 일렬로 서서 사진을 찍는다..

구호로 "도보여행"을 외치는데..

유쾌한 구경꾼이 묻는다..무슨 여행??

아! 부부여행이 아니고 도보여행..

 

그 사람에게 묻는다..거기는 무슨 여행이요?

"우린 불륜여행!!"

 

 

탄금대로 이동했다..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

 

 

감자꽃 노래비..

일제시대 충주 출신의 시인 권태응의 동시..

 

 

이곳이 신립장군의 순절지..

임진왜란 북상하는 왜군을 막아선 신립의 8천군사..

배수진을 치고 기병으로 승부보겠다는 생각이 어딘지 어설프다..

원래 배수진은 병법에서 금기..

그런데, 이를 변용하여 승리한 것이 유명한 한신..

승리후 그의 설명은 이렇다..

오합지졸을 사지에 몰아 넣고 죽기살기로 싸우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그런데, 신립은 기병이 주력이었다..그러면 배수진보다는 좀더 툭터진 마른 들판을 골랐어야하는데..

강을 등진 습지라니..

 

 

 

아이러니..

신립은 북방 여진족과 싸움에서 기병전으로 재미를 본 사람이다..

하지만, 이번엔 적을 몰랐다..적의 장기가 조총이라는 것을..

조총병과 기병의 전투는 첫발과 두번째 조준 사이의 1-2분의 간격을 노려야 하는 법..

탄금대 주변은 습지여서 기동력이 떨어졌다..

더구나, 왜군은 이미 다께다 신겐의 기마군 3만을 오다 노부나가의 조총병 3천명의 3열 발포로 궤멸 시켜본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다..

 

더 웃기는 아이러니..

거꾸로 병자호란때 쌍령전투..

우리는 왜군의 전법을 배워 1-2만명의 조총병을 이끌고 북상, 청나라 기병 800명과 쌍령에서 조우..

헌데, 적 기병의 질주에 기겁하여 사정거리 들어오기전에 발사하고, 우왕좌왕하다 궤멸..

이번에 조총으로 이겨 보려다 기병에게 당한다..

 

고려 적에는 승리의 장소였던 충주..

위 지도에 탄금대 본군에 앞서 단월역 부근의 방어진지가 있었는데, 그 곳이 대림산성으로 고려떄 몽고군과 싸울 때 김윤후가 승리를 거둔 곳이다..

그는 절대적 강자인 몽고군을 맞아 노비문서를 불태우면서 귀천을 불문하고 벼술을 주겠다며 독전하여 승리를 거두엇다..

 

히딩크나 이순신처럼 지도자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장면이다..

물론 신립도 최선을 다하였다.. 

 

***

탄금대 전투의 위치에 대하여 논란이 많다..

최근 "우리 역사를 바꾼 전쟁들"이라는 책에서는 탄금대 전투의 위치를 탄금대 쪽이 아닌  남쪽 단월역에 가까운 모시래들에서 달천을 뒤로 하고 진을 쳣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당시 최상의 방어처는 조령이 아니라 고모산성(토끼비리)이었으며, 이미 적이 통과한 뒤라 어쩔수 없는 선택의 순간..

달천 나루를 건너면 죽산을 통하여 한양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라 이를 막기 위하여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진지 구축이었으리라 추측한다. 하지만, 척후 순찰 등의 부실로 좌측 기마대가 동쪽 산속에 은밀히 엄페한 적의 조총대에 타격을 당하면서 급속히 조선군은 궤멸되고

신립 등은 달천과 남한강의 합수지점 까지 밀려 거기서 투신 자살하였다고 본다..

그러므로 탄금대  열두대에 세워진 신립장군순국지 표지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은 당시에는 풍광 제일이었을 터인데..지금은 잡목이 무성하여 조망은 별루다..

12줄 가야금으로 12곡을 작곡하고 이곳에서 연주하니 그 이름이 남아 열두대라 하네..

 

 

무심한 세월은 흘러 강물은 호수가 되었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이 없다"는 글귀가 무슨 만사처럼 느껴진다..

 

 

 <오늘 걷기> 장미산마을 -봉학사 - 장미산성 - 강변 약 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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