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솔바람길 걷기를 마치고 연산 고정리 양천허씨 정려와 사계 묘소를 방문했다..
한 여인의 500리 걷기로 시작된 한 집안의 성장사를 보기 위하여..
충청도 양반 중에서도 광산 김문이 우리나라 제일의 양반이라고 자랑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임금 앞에서도 자랑했다는데, 그 근거가 대제학(요즘 s대 총장쯤 될까?)을 제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은 한 여인의 5백리 걷기에서 시작되었다..
사계 김장생의 7대조 할머니인 양천 허씨의 이야기다.
그녀는 조선 태조 때 대사헌을 지낸 허응의 딸로 한림원의 벼슬을 하던 김문과 혼인을 하였지만 남편이 일찍 사망하여 17세의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딸의 신세를 가엾게 여긴 친정부모는 몰래 다른 곳으로 개가를 시키려고 혼처를 알아보고 다녔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그 길로 친정인 개성을 떠나 시댁인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까지 500리를 걸어서 내려 왔다고 한다.
허씨 부인은 시부모를 모시며 유복자인 아들 김철산을 키웠는데, 김철산은 김국광(좌의정), 김겸광, 김정광, 김경광 아들 4형제를 낳았고, 김국광의 후손이 사계 김장생이다.
요약하자면, 한 여인이 청상과부가 되어 어린 아들을 데리고 5백리를 걸어 시댁에 내려와 수절하면서 외 아들을 고이 길렀더니 손자 대에 이르러 정승을 배출하고 대제학이 즐비하게 나왔단 이야기..
그 이야기의 하일라이트는 조선 유학 18현 중 2인의 자리를 차지한 사계 김장생과 아들 신독재 김집이다..
이집의 안내문을 보면 궁금증이 생긴다..
김극뉴는 김국광의 장남이다..
그런데, 여기는 그의 묘소가 없고, 그의 부인 의령 남씨를 제사 지내는 곳이다..
그러면 김극뉴의 묘소는 어디 있을까?
전남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첫부인 함안 박씨 곁에 묻혔다..
그런데, 그곳은 첫째부인 함안 박씨의 처가 동네인데, 그의 묘소는 말명당이라 하여 조선 8대 명당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의 명당 발복으로 현손인 사계 김장생을 시작으로 대제학 7명, 왕비 1명이 모두 그의 후손에서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난 명당 풍수보다는 양천 허씨의 걷기가 가져온 발복이라고 생각한다..
좌간, 의령 남씨는 김극뉴의 둘째 부인으로서 별도로 제사를 지내는 모양이다..
고정리에 양천 허씨, 아들 김철산의 묘소와 7세손 사계의 묘소가 함께 있다..
제일 위에 있는 묘소가 사계 묘소이다..
<사계 묘소>
<돈암 서원>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있는 돈암서원은 원래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경희당을 세워 학문 연구에 힘쓰던 곳이고, 이후 김장생이 양성당을 세워 후진양성을 하던 곳인데. 후세에 이 경희당과 양성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세우게 된 것이다. 원래는 현재 위치에서 떨어진 돼지바위(돈암)에 위치했다가 수해를 피해 고종 연간에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한다.
돈암서원은 사계선생에게 내려진 사액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시에도 예외로 인정받아 보존된 정통서원이다.
사계 김장생은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은 물론 제자인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명재 윤중의 아버지인 윤선거 등 서인의 굵직한 사람을 교육시켰다.
임진왜란 후 전쟁의 당사자 3국은 모두 탈진하였다. 결국엔 중국 명나라는 청에게 망하였고,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정권이 붕괴되고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막부가 새로 성립되었다.
그러나 가장 혹독한 피해를 입은 우리나라는 왜 왕조의 교체가 없었을까?
이는 양반 사대부들이 예학을 통하여 사회기강을 바로 잡고 가부장 질서을 강화하는 등 기반사회의 장악력을 높임으로써 사회의 동요를 막았기 떄문이 아닐까싶다. 그 기초이론이 예학(특히 상례)이다.
현종년간에 벌어진 서인과 남인의 "예송논쟁"은 목숨과 권력을 건 일대 사투였다. 그 중심에 사계의 제자 우암 송시열이 있었다.
하지만, 영,정조 이후에는 교조주의, 형식주의, 허례허식에 빠지고, 세도정치와 결합함으로써 예학이 주도한 우리나라는 새로운 변화에 대응할 수없는 불치병 환자꼴이 되었다.
돈암서원 안 숭례사는 사계 김장생을 모시고 아들 신독재 김집, 제자인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을 배향한 사당이다.
이들은 모두 이른바 해동18현(海東18賢)에 추앙되어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었다.
해동 18현이란 신라, 고려, 조선조에 걸쳐 뛰어난 유학자 상위 랭커라할 것이다. 그 이름을 보면, 설총, 최치원, 안유(안향), 정몽주(포은), 김굉필(사옹), 정여창(일두), 조광조(정암), 이언적(회재), 김인후(하서), 이이(율곡), 이황(퇴계), 성혼(우계), 김장생(사계), 조헌(중봉), 김집(신독재), 송시열(우암), 송준길(동춘당), 박세채(남계)이다.
성혼까지는 별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이후의 6명은 모두 서인 측 사람이다. 동인 쪽 서애 유성룡 등과 비교해 보면 혹 인조반정으로 서인 집권 후에 정하여진 결과가 아닌가 하는 논란의 여지도 있을 것 같다.
서원내 원정비는 돈암서원을 세우게 된 배경과 서원의 구조, 김장생의 행적 등에 관해 기록해 놓았는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한다. 이 두 사람은 그런 콤비로 서인 노론의 지도자로 평생을 사이 좋게 살았다.
지(地) 부(負) 해(海) 함(涵)
사당 담장에 전서체로 우측으로부터 지부해함의 글씨를 새겼다.
땅이 온갖 것을 다 실어주고, 바다가 모든 물을 다 받아 주듯이 모든것을 포용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곳 학풍이 예학이라 그런지 영남학파인 서애 유성룡의 터전 하회 마을의 시비(詩碑)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좀 근엄한 충청도 양반이랄까?
<사계고택 (계룡시 두계읍)>
사계 김장생은 예학의 대가다.
소시적에는 예학에 밝은 구봉 송익필에게 배우고, 20세에 이이 율곡의 에게 배웠으며, 그뒤 목민관이 되어서는 예론의 실천으로 선정을 베풀었고, 청백리로도 녹선되었다.
사계고택((沙溪古宅 )은 계룡시 두계면 면사무소 뒤편에 위치한다.
사계 김장생이 광해군시절 영창대군을 둘러싼 계축옥사(1613)무렵 처벌의 위기에서 벗어나 이곳으로 낙향하여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등 많은 후진을 양성하며 말년을 보낸 곳이다.
당초에는 초가였지만 사계의 여덟째 아들 두계공 김규와 그 자손으로 이어져 현재에 이르면서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고택은 사랑채 이름을 따서 은농재(隱農齋)라고도 불리는데, 사계 당시의 건물인지는 모르나, "은농(隱農)"은 사계 7세손의 호(號)다.
고택을 둘러보다 주련중 “만변수작 의리일관(萬變酬酌 義理一貫)”에 눈이 간다.
“만가지로 변하고 수작을 부려도 의리로 일관하겠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가문다운 주련이다.
집안내력을 살펴보자.
사계선생의 부인 창녕 조씨는 김은, 김집, 김반 3형제를 두었고, 후실부인은 순천 김씨로 김영, 김경, 김고, 김구, 김규, 김비의 6형제를 두었다한다.
큰 아들은 임진왜란 때 전 가족이 사망하였고, 둘째가 신독재 김집(돈암서원 참조)이다.
셋째는 김반이다. 이분은 병자호란 때 둘째 아들 김익희와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모시고 항전을 하였는데, 강화도로 피난간 부인 서씨과 셋째 아들 김익겸은 강화도 함락시에서 순절하였다. (김익겸 정려비 참조)
이 때 같이 강화도에 들어간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강화도를 탈출하는데, 이것이 후일 우암과 제자 윤증 간의 감정대립의 한 요소가 되었다는 사실을 일단 기억해두시라
한편, 김익겸의 처는 임신한 채로 강화도를 탈출하는 뱃전에서 서포 김만중을 낳았다.
김익희는 광산 김문의 자랑인 9대제학 중의 한 분으로 매봉산(엑스포 학생과학관 뒤편)에 묻혀있다.
한 집안의 내력를 통해 마치 나이테처럼 우리나라의 역사의 단면을 들여다 본다.
<김익겸 정려>
* 김익겸 정려각, 김만중 소설비 ( 대전 유성구 전민동)
동춘당이 위치한 대덕구 송촌동은 계족산을 등지고 남쪽 산록에 위치하고 갑천이 우측으로 흐르는 평안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갑천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들판이 아주 넓고 사방 산이 맑고 화려하다. 세가닥 큰 냇물이 들 복판에서 합류하여 관개할 수가 있다. 땅은 모두 1묘에 소출이 1종이나 되며, 목화를 가꾸기에도 알맞다. 또한 강경이 멀지 않고, 앞에 큰 시장이 있어 해협의 이로운 점이 잇으니 영원히 대를 이어 살만한 곳이다."
이런 좋은 자리에 은진 송씨만 거주할리가 없다.
회덕에서 갑천을 거슬러 건너 대전 엑스포 개최지 뒷편(연구단지 중앙부) 우성이산 서쪽 기슭(유성구 도룡동)에 여흥 민씨의 세거지가 있다.
하긴, 유성(儒城)이란 말 자체가 "선비의 고장"이란 의미이고 더구나 박사들이 가득한 연구단지 등이 있으니 명실상부한 선비 마을이다.
그 우성이산 북동 쪽 기슭의 갑천변(회덕 쪽에서 갑천 건너편) 즉 유성구 전민동에는 사계 김장생의 아들 김반의 묘역이 있고, 그런 연고로 그 후손들이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신독재 김집(金集)의 아우다.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벼슬을 단념하고 10여 년 간 은거하며 학문에만 매달렸다. 인조반정후, 이괄의 난이 일어나서 인조가 공주로 피난오자 아버지 사계와 함께 호종하였고, 왕이 공주에서 실시한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이곳 묘소에는 아들인 김익겸의 묘가, 아버지 김반의 묘보다 위에 조성되어 소위 역장(逆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예학의 집안에서 어찌 그런가 의아할 수도 있다.
김익겸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함락시 남문 성루에서 김상용(척화파 삼학사 김상헌의 형) 등과 같이 항복을 거부하고 자폭하였다. 그의 어머니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햇다..그때 김익겸의 나이 23살 꽃다운 나이였다. 이런 아들의 의기를 기리기 위하여, 김반 자신이 아들의 묘를 위로 쓰도록 배려한 연유이다.
김익겸의 부인은 어린 아들 김만기와 태중의 아이 서포 김만중을 임신한 채로 강화도 탈출선에 몸을 실고 가다가 배위에서 유복자 김만중을 낳는다. 당시 아버지 김반과 형 김익희는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니 한 집안이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다.
<김익겸의 글씨, 순천 선암사의 육조고사 현판>
그 뒤 김익겸의 아들 중 큰 아들 김만기는 딸이 숙종의 첫 왕비가 되어 왕의 장인이 되었고, 유복자로 태어난 김만중은 당쟁의 와중에도 구운몽, 사씨남정기로 유명한 문인으로 성장한다.
이런 연유로 대전 유성구 전민동에는 김익겸과 어머니 연산 서씨의 정려각와 아들 서포 김만중의 소설비가 서있다.
한 여인의 500리 걷기로 시작된 역사..마치 뜬봉샘에서 시작하여 천리 금강이 되어 흐르고 흘러 바다에 이르듯 장대한 결말을 일구어냈다..
돈암서원 http://blog.daum.net/servan/6348505
사계고택 http://blog.daum.net/servan/6348482
김익희 묘소 http://blog.daum.net/servan/6349155
김익겸 정려, 김만중 소설비 http://blog.daum.net/servan/6348517
김만중의 귀양처 남해 노도 http://blog.daum.net/servan/6348514
'걷기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 걷기 - 마라도 (0) | 2015.03.12 |
---|---|
제주 걷기 - 올레 11코스 (모슬포 - 무릉생태학교) (0) | 2015.03.11 |
논산 걷기 - 솔바람길과 탑정호 수변공원 (0) | 2015.03.03 |
금산 걷기 - 산안2리 : 자진뱅이 둘레길 (0) | 2015.02.24 |
금산 걷기 - 장선리 : 봄비 맞으며 걷기 좋은 길 (0) | 2015.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