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사계 솔바람길을 걷고 나서 논산을 쏘다녔다...

먼저 간 곳은 개태사..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고려 왕건이 귀부한 견훤을 앞세우고 후백제의 신검군을 일리천 전투에서 격파하고 추격하여 황산벌에 이르자, 신검이 항복하였다..

삼국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기념하여 세운 절이 개태사(開泰寺)..

태평시대를 열렀다는 의미..

 

 

그 부지가 10만평 정도 되었다하는데..임진왜란 때 불탔다고 한다..

지금의 개태사는 원래 유적지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1930년대에 개인이 지었단다.

 

 

성세와 난세..

전성기와 폐사기..

 

수렁 속에서 연꽃 피어나듯 퍠사지에서 다시 부활하였다..

 

 

 

 

 

개태사의 과거를 증거하는 철확..

1000인분의 된장국을 끓일 수있는 솥..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고 신물로서 보관하던 것 아닐까 추측..

쇠솥은 거푸집을 짜서 쇠를 부어 한번에 만들어 내는데 최근에도 이 정도 크기의 쇠솥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이 쇠솥은 일제시대 조선물산공진회 박람회 때 쌍계사의 꽃살무늬 창살문과 함께 기차에 실려 서울 나들이도 하였다..

 

 

저 두꺼운 솥 두께..

그런데 테두리가 잘려나간 것은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 통에 일제가 쇠붙이 공출을 강제하자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쇠솥 가장자리를 떼어내어 바쳤기 떄문이란다..

 

 

 

 

태조 왕건의 어진전이 최근에 조성되었다.,

왕건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 사진은 고려 951년 조성되어 개성 봉은사 태조진전에 봉안되엇다가 세종 11년 현릉(왕건의 능)에 묻혔다가  1992년 북한이 보수작업 중 발굴한 동상 사진이다.. 

 

 

천호산..

원래 황산벌이 위치하여 황산이라 불렸단다..

황산의 내력도 원래 산이 연이져 잇다는 있다는 "느러뫼"가 "누르뫼"로 변이하여 누렇다는 뜻의 황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면 이름은 연산(連山)인 것을 보면 그럴듯하다..

하여간 그런 황산인데, 왕건이 "하늘의 보호를 받아 대업을 이루었다"하여  천호산(天護山)이라 개칭하였다

 

 

태평한 시대가 되어선지 동자도 졸고 풍경의 금어도 존다..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

쌍계사 가는 저수지 옆 길에는 루드베키아가 철지난 마담처럼 멋쩍은 미소를 짓고 있다..

 

 

 

 

절의 연조를 말해주는 것은 부도탑이다..

 

 

 

쌍계사는 지리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양촌면 쌍계사도 제법 연조가 오래된 절이다..

천왕문 대신 봉황루에 현판이 붙었다..

 

 

 

 

유명한 쌍계사의 꽃살문이다..

 

 

 

세상사를 둘러보면 마치 꿈속의 일 같도다..

 

 

핵심은 일기추(一機抽)에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일기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눈에 보이는 특이한 현상만 광고한다..

"비가 와도 얼굴이 젖지 읺는" 요 딴 것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니..원..

이런 것을 가리켜 외도라고 일갈하지 않았던가?

 

 

 

일기추는 관세음 보살의 얼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더구나 아름다운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수렁에서 피어난 연꽃이 풍기는 향과 같은 것..

연향이 풍기면 온갖 벌들이 모여들지 않던가?

이제 연향을 맡지도 못하고 오히려 꽃 모양에만 집착하는구나..

 

 

 

 

 

쌍계사를 나와 견훤릉으로 가는 길..

성삼문 묘 표지가 보인다..

얼릉 차를 갖다 댄다..

 

 

개망초 무성하고 풀에 박석도 묻혀버린 길 끝에 성삼문의 묘가 있다..

태어날 때 하늘이 세번을 물었다면, 죽을 때는 몇번을 물었던가?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 둥둥둥 북소리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데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 : 고개 돌려 보니 해도 서산으로 지는구나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 황천길에 주막 하나 없다 하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 오늘 밤은 누구 집에서 자고 갈거나..

 

 

왜 그의 묘가 여기에 있는가?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

 

 성삼문은 소로 사지를 찢는 거열형을 당하고 죽었는데, 잔혹한 세조가 그 시신을 전국으로 조리 돌렸다고 한다. 그래서 인부들이 시신 일부를 지게에 지고 이 근처 공개를 지니다가 주저 앉아 푸념을 하였단다  “날도 덥고 무겁고 피곤해 죽겠네"

그랬더니 음성이 들렸단다. “그렇게 무겁고 힘들거든 아무 데나 묻으시오!” .

인부들은 혼비백산하여 지게를 벗어 던지고 도망가 버리고 변에 살던 선비들이 성삼문의 시신을 근처 산에 매장하였단다...

 

이 설화는 "그렇게 바쁘시면 어제 오지 그랬슈.." 식의 이야기 일뿐..

세조의 서슬이 시퍼렀던 시절..어찌 전국의 군기를 잡으려는 조리 돌림을 어찌 그리 허수륵하게 끝나겟는가?

아마도 충청도를 다 돌고 이 곳에 버려진 것을 누군가 기개있는 선비가 주축이 되어 무덤이라도 만들어 준 것아니겠는가?

그러다가 왜 무덤을 만들어 주었냐고 관에서 닥달이라도 한다면 변명거리로 쓸 요량으로 만들어진 이야기 아닐까?

 

 

 

그의 호는 매죽헌이다..

매(梅)..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지조

죽(竹)..대쪽 같은 기개..

 

이 둘을 매치시켜 호로 삼고, 그대로 일생을 살았으니 지행합일의 삶이다..

 

 

 

무이문..둘이 없는 문..

불교의 불이문과는 다른 의미겠지..

그에게는 불사이군의 유교정신대로 살았으니..

그에게는 "둘은 없다"..오직 정통의 임금 단종만이 있을 뿐..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든다..

어차피 어린 임금..성인이 될 때까지 은인자중..참고 때를 기다렸으면 어땠을까?

 

 

성인각..인(仁) 이룬 집..

나를 이기고 예를 회복해야 가능하다는 인..

그 예가 정통성이다..

정통왕실을 회복하려는 정신을 지키려다가 죽음을 맞았으니 인을 이루었다 할 수 있겠다..

 

그 글씨를 쓴 사람이 종 후손??

성삼문의 신원은 숙종 17년 (1691년)에야 신원이 된다..

하지만, 성삼문의 집안은 남자는 다 죽고, 시집간 딸 만 살아 남았다..

하니, 종 후손이란 직계가 아닌 같은 창녕 성씨 문중의 후손을 말하는 것 같다...

성삼문의 부인과 딸은 박종우에게 노비로 끌려갔는데 부인은 12년만에 풀려났다고 한다..그녀의 묘소는 성삼문의 고향인 홍성군 홍북면에서 있다..

 

 

마지막 방문지..견훤왕릉..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그는 상주 출신으로 스스로 백제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아바지와 불화하고, 아들과 불화하여 이들 3대가 모두 왕건에게 항복하였으니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라고 할지, 왕건의 도량이 그만큼 컸다고 해야 할지..

 

 

전성기 시절..그는 왕건에게 편지를 보냇다..

"내 꿈은 평양성 누각에 활을 걸고 대동강 물로 말을 먹이는 것이오"

 

그 정도로 호쾌한 남자가 큰 아들 신검에 대한 복수심으로 밤중에 배를 타고 탈출하여 왕건에게 항복한다..

그리고 그의 일익이 되어 아들과 맞선다..

그의 마지막 일념은 배신자 아들의 목숨을 거두는 것이었으나 그 마저도 왕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왕건을 모사 능환만 죽이고 신검 형제는 살려 주었다..

 

 

그는 분노 속에서 그리고 허망함 속 지새다가 인황산불사에 병들어 누웠다..

의 마지막에 보고 싶어 했다던 완산성...

 

그런데 희한하게 함락되지 않은 후백제의 완산성은 존재조차 사리지고 위치조차 모른다니..

패자의 역사는 슬프다..

 

 

 

 

그의 능은 신라의 왕릉을 보는듯하다..

통일의 대박을 선사한 왕건의 마지막 배려였을까?

 

 

 

최근 뉴스에 능소화에 대한 독성 누명이 벗겨졌다고 한다..

능소화의 억울함을 감싸고 아름다움을 취하듯이..

논산..승자 뿐 아니라 억울한 자의 역사도 소중히 감싸고 그들의 마음을 후세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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