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걷기에 나섰다..

이번엔 전주 향교에서 출발하여 남고산성을 돌아 보는 길..

 

 

 

향교옆 전통혼례식장 현판이 화명원(和鳴院)..화락을  지저귀라는 뜻..

 

 

 

그런데.. 이 길도 여러 가지 사명을 띄고 있으니 요즘 시대의 트랜드처럼 투잡, 멀티플레이어 기능을 해야 하나보다..  

 

 

 

 

전주한옥마을도 엄청 붐비고 인심도 야박해져 가니 슬로시티라는 타이틀을 잘 유지할 수 있을까?

 

 

 

 

 

 

선생님들이 그런 사명으로 교육을 하실까?

상당수가 너무 정치적으로 변하지 않았는지.. 

 

 

 

산성벽화마을의 그림을 감상하며 산성으로 올라간다..

 

 

 

 

 

 

 

충경사..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정란을 기린다..

왜군이 호남의 전주를 노리고 남으로는 곰치고개로, 북으로는 대둔산 배티고개로 진군해온다..

당시 남쪽 곰치고개를 막던 군사는 패배..

남쪽으로 왜군이 전주성에 접근하였다..하지만, 이정란의 부대가 남고산성 인근 좁은 목에서 적을 요격하고, 전주성 방어 들어 갔다.

때마침 북쪽 대둔산 배티고개에서 권율장군이 대승을 거두자, 왜군은 합동작전이 실패함에 따라 퇴각하였다

 

그런데, 정유재란 때에는 전주성이 함락된다..왜 그랬을까?

이정란은 공주목사로 부임했다가 파직되어 낙향.. 그 사이에 정유재란이 발발..

당시 주둔하던 명군 진우충의 2천병력은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군이 접근하자 도주..전주성에 무혈 입성한다..

이정란은 그 직후 전주 부윤 겸 삼도초모사로 재임용되었던 것 같다..

 

 

 

 

 

 

남고산성이 견훤당시 후백제 도성 방어를 위해 축조한 성이다..

즉 남고산성안에 후백제의 정전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 후백제의 도성은 전주 어디에 있었을까?

전주박물관측은 노송동 일원(오목대 북쪽) 이엇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고 산성 서벽 천경대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돌아보면 전주 시내가 눈에 들어온다..

완산7봉도 보인다..

 

 

완산7봉??

936년 황산벌에서 후백제의 신검이 왕건에게 항복했다..

견훤이 왕건에게 아들 신검을 죽여달라고 청하였으나 가납되지 않자 견훤은 홧병이 났다..

황산벌의 작은 동산에서 견훤은 완산7봉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 와서 완산7봉을 바라보노라니 그 높이로 보아 논산의 황산벌에서 완산7봉이 보인다는 말은 허언인듯하다..

 

 

여기가 전주성의 중심부..

어떻게 아느냐고?? 풍남문의 위치를 보면 안다.,

 

 

 

 

 

 

 

 

 

 

북장대에 올라 전주를 바라보니 과연 남고산성은 전주의 방호벽이다..

 

 

 

 

 

창암 이삼만이 쓴 비석이란다..

창암은 전주 부근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마을 사람이다.. http://blog.daum.net/servan/6349170 참조..

학문, 교우, 취처가 늦어서 삼만이라 했다..

그는 병석에서도 하루에 천자를 썼으며 늘 말하기를 벼루 세 개를 구멍내지 아니하고는 글씨는 이루어 질 수 없다고 했다.

글씨를 배우러 찾아오면 한획 한점을 각각 한달씩 가르쳤다.

당시 최첨단 청나라 연경에 가서 물 좀 먹고 온 추사는 귀양가는 길에도 창암의 글씨를 시골 서생의 촌스런 글씨라 깔보았단다..

그러나 9년의 귀양을 살고나서 2% 성숙해진 추사..자신의 글씨도 군살이 빠진 다음에야 안목이 성숙해졌다..

그제야 창암 이삼만이나 원교 이광사의 글씨의 독창성을 예우하기 시작하엿단다..

 

 

 

 

 

보덕은 고구려 보장왕 때 도교 우대정책에 반발해 백제로 귀화하여 전주 고달산(현 고덕산) 경복사에서 열반경을 강론하엿다..

그의 제자들이 11명이 되는데, 명덕도 그중 한명이다..

 

 

聞我名者免三途(문아명자면삼도) 見我形者得解脫(견아형자득해탈)

나의 이름 듣는 이는 삼악도의 괴로움을 여의고, 나의 형상 보는 이는 해탈을 얻게 하소서 

- 나옹화상 발원문 중-

 

 

 

산중호우임간조(山中好友林間鳥)

세외청음석상천(世外淸音石上泉)

 

산중에 좋은 친구는 숲속의 새,

세상밖 맑은 소리는 돌 위 흐르는 물..

 

 

 

이 절의 법력은 개를 보면 알겠다..

어찌나 살갑게 구는지..

 

 

남고산성의 저 나무는 백제왕관 금관장식같다..

 

 

 

이서구..순조 때의 문신..

그가 전라 관찰사로 와서 이곳에 만경대에 올랐다가 정몽주의 글씨와 시를 보고 차운하여 시를 지어 암벽에 새겼다..

그는 조선 후기 4대 시인으로 알려져있는데, 삼남길을 걷다 보면 이서구의 선정비도 보이는데, 어쩌면 그는 전라도 지역에서 상당한 행정능력과 청렴성을 보였던 인물인 것 같다.

그는 흑질백장을 고아 먹고 도통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특했던 모양이다..

민간에서는 도술, 예언, 풍수에 아주 능한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그는 이런 능력을 백성을 위해 사용한다.

예언에 관한 것으로는 나합(세도정치 김좌근의 애첩)의 탄생을 예견한 내용이 있고, 풍수에 관련한 설화는 후대에 들어선 철도나 댐 등의 지형에 관한 내용이 많고, 전주의 집 방향을 서향에서 남향으로 바꿔 가난을 벗어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밖에 전주의 땅 기운을 지키고자 북고사를 진북사로 개칭한 이야기, 전주의 재물 운이 빠져나가지 않게 서북쪽에 숲을 조성해 숲정이라 부른다는 이야기, 승암산의 화재를 막으려고 인봉에 방죽을 만든 이야기, 북쪽 가련산의 지세를 비보하여 물을 바로 흐르게 한 이야기 등이 전승된다.

 

동학과 관련하여 이서구가 선운사 마애불의 비기가 숨겨있다는 말을 듣고 행차하여 마애불의 배꼽에 복장된 비기를 꺼내 첫장을 넘기는는데 "이서구 개탁"이라는 글씨를 보는 순간 천둥 번개가 치자 놀라서 황급히 비기를 제자리에 안장하고 돌아갔다는 설화가 있는데,

동학군이 이런 설화를 유포하고, 그 비기를 동학 접주 손화중이 입수햇다고 선전하여 동학 세력을 결집시키는데 활용하기도 하엿다..

 

 

정몽주의 글씨..만경대..

 

 

황산대첩..

고려말 왜구가 극심한 시절에 최무선이 화포로 왜선을 불태우는 진포대첩을 거두자, 배를 잃은 왜구들이 육지로 휩쓸고 다니다가

전라도 남원 운봉에서 이성계의 고려군에서 섬멸당한 대첩..아기발도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성계가 승전후 전주 오목대에서 잔치를 벌였다..

그 때 이성계는 한 고조 유방이 천하 통일을 이룬후 고향 잔치자리에서 불렀다는 대풍가를 불렀다고 한다..

http://blog.daum.net/servan/6348477 참조

이에 정몽주는 불쾌함을 느껴 자리를 떠 이곳 만경대에 올랐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목대를 바라보니 지척이다.. 

 

 

 

 

오랜 터는 마치 지층이 쌓이듯 역사와 인물이 첩첩이 등장한다..

 

 

 

 

전주는 그렇게 새로운 사람과 역사로 새로운 지층을 쌓아가고 있다..

 

 

 

<오늘 걷기> 전주향교 - 전주천 - 남천교 - 전주교대 - 산성벽화마을 - 남고산성 일주 - 원점회귀 약 9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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