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저에게는 1곳의 관광지가 남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표현을 패러디하며 스스로를 달랜다..

그래..발포로 가자..

이순신 장군이 수군으로서 첫 근무지인데 어찌 안 볼쏘냐..


 

발포는 참 작은 포구다..

35세에 한양 훈련원 봉사로 8개월 근무하다가 충청도 해미의 병마절도사 군관으로 부임..9개월후 이곳 발포의 만호(종4품)로 부임한다..

1년 8개월후 무기검열 과정에서 모함보고로 파직되었다가, 4개월후 훈련원 봉사(종8품)으로 강등 복직된다...


 

 

이곳 발포진에 주둔 병력은 얼마였을까?

이순신 장군은 임진전란이 일어나기 1년 전(1591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주로 고흥지역에 있는 1관 4포를 순회하며, 군비확충 및 판옥선을 개조해서 거북선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1관 4포의 전력은 판옥선 11척과 거북선 1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수군 병력은 1100∼1400여 명이었단다..

그중 발포에는 판옥선 2척과 거북선 1척이 있었다..

대략 판옥선 1척당 정원은 130명 정도 된다..


 

 

 

 

충무사의 사당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보지 못햇다..

평소 참배객이 들어 갈 수 있게 관라해주기 바란다..

 

 

충청도 해미병영에서 모범적으로 군관생활을 하던 이순신은 충청병사의 추천으로 발포만호(종4품)으로 발탁 승진한다..

이를 시기하여 모함이 끊이지 않았다..

전라감사 손식이 순시하다가 흥양현에 이르자 발만만호 이순신을 불러 진서를 강론하라 명한다..

일종의 실력 테스트..

이순신이 진서를 강론하고 진도를 그려가며  설명하는 것을 보고 소문과 다르다고 오히려 칭찬..

직속상관인 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기 위하여 발포진 안마당의 오동나무를 베어 오라고 명하자, 공물임을 들어 명을 거부..

후임 좌수사 이용에게도 찍히고..

무기 검열을 나온 서익은 훈련원 근무시절의 악감정으로 모함하는 보고를 올려 이순신을 파직에 이르게 한다..

 

 

충무사의 공중수도가 거북선이다..

왕년에 발포에 주둔하던 거북선을 추모하는 것인지...


 

임진왜란이 터지자,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 함대가 출진한다..

1592년 5. 7. 첫 전투인 옥포 해전에 흥양현감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사도첨사 김완, 여도권관 김인영, 발포만호 황정록 장군 등 1관 4포 장수들이 참전하여 승전에 일조한다.. 그중 경장(조방장)으로 출전한 정걸은 고흥군(흥양현) 포두면 출신으로 전공을 많이 세우고 이미 수군 수사까지 역임한 사람이었다..그는 이후에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행주대첩시 한강으로 진입하여 권율장군에게 화살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그는 1585년 고령으로 관직에서 사임하고 귀향하였으나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해에 83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순절한다..

그의 아들 정연은 고흥 의병을 이끌고 고창 흥덕 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하고, 손자 정홍록도 1년후 흥덕 전투에서 전사하였단다..

 

 

 

 

공과 사가 엄격한 이순신..

김영란법이 시행되는 우리나라에서 벤치마킹할 사람이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총 6차례 흥양(고흥)을 다녀간다..

 

 

 

 

 

발포진성에서 바라보니 건너편 산에 백로가 가득하다..

청렴한 이순신 장군의 깨끗함을 흠모하여 모여들엇나?

 

 

한 남자가 있었다..

남들은 태평성대인양 흥청망청 놀고 지낼때 그는 원칙대로 근무하고 실력을 닦았다..

실력으로 시비,질시, 모함을 넘어서고 나라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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