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걷기 여행 3일째 진도로 건너갔다..
운림산방으로 향한다..
해남 녹우당에서 소치 허련이 그 집안의 공재화첩을 보며 그림 공부를 했고, 일지암에서 초의를 만나 사부로 모시고 공부를 심화하였으며,
초의의 소개로 추사를 만나 그의 예술적 재능이 만개한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점찰산 밑에 운림산방은 예술가의 안목을 보여주는 터답다..
이 운림산방 글씨는 허백련이 썻다..
그는 소치의 직계는 아니나, 소치의 아들 허형에게 그림을 배웠다..
산방 주련에 추사의 글씨가 붙엇다..
차호명월성삼우..
이때 밝은 달을 불러 세친구가 되었다..
기와 건물 뒤에 소치의 생가와 화실이 있다..
소치 본인이 부채에 그린 당시의 운림산방 모습과 생활상이다..
일과를 보자
아침에 일어나 차 마시고 글을 읽는다..
식사를 마치고 그림을 그리고, 화첩을 본다..
오후 늦으막이 동네 마실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눈다
석양에 돌아오다 석양을 바라본다..
지금도 이렇게 살면 웰빙이다..
운림묵연
중국과 조선의 화론에 대하여 썼다..
"불법에 귀의하요 부용을 잡고"..초의선사와의 인연을 말한다..그에게 글과 차를 배웟다..
"세번 바다에 들어갈 때".. 귀양간 스승 추사를 만나러 제주로 건너간 것을 말한다...
그는 추사를 만나기 위해 초의가 제다한 차를 가지고 위험을 무릅쓰고 세 번씩이나 제주도를 찾았다.
헌종7년(1841) 2월부터 6월 초에 처음 내도하여 4개월 동안 스승의 수발을 들고, 그림 그리기, 시 읊기, 글씨 연습 등의 일로 나날을 보냈다.
이때 소치가 추사의 초상화인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을 그려 올린다.
"임금님 은혜를 입다"..그의 나이 40세(1848년)에 헌종이 하사한 붓으로 그림을 그려 바치게 된다..그리고 낙선재애서 헌종을 만난다..
헌종은 조선 후기 춤의 정치를 꿈꾸던 그의 아버지 효명세자의 피를 이어받아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소치와 그림을 같이 보며 추사의 근황을 묻기도 했다..그 덕에 무관직 벼슬까지 하사 받았던 소치...
그러나 호사다마..헌종은 소치가 관직을 얻은 다음 해(1849)에 세상을 떠난다..
"과천길에 이르러도 스승은 이미 가고"..추사가 귀양에서 돌아와 과천에 살다가 1856년(48세)에 죽는다..
소치는 다음 해(1897년)에 고향 진도에 운림산방을 짓고 은거한다..
운림산방에서 대를 이은 자식농사가 풍성하다..
남도 지방에 남종화의 텃밭을 제대로 일군 것이다..
운림산방 입구에 남도미술관에는 소치의 샘물에서 발원하여 자식들의 개울을 거쳐 남도의 큰 강이 된 작가들의 그림이 가득하다..
인아산붕처
무위도자성
범유하심자
만복자귀의
사람,나, 산이 무너지는 곳에
무위도는 스스로 이루어지고
무릇 마음을 비우고 있으면
만복이 저절로 찾아든다네..
시중화 화중시..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
진도 운림산방에는 예술의 대하성(大河聲)의 울림이 면면하고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