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길을 걸은 후 곽재우 생가에 갔다..
의령에는 돈을 번 부자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돈을 멋지게 쓴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망우당 곽재우의 아버지 곽월은 진주 강씨에게 장가를 들어 처가인 의령 세간리로 이주한다.
강씨는 무남독녀 외동딸이라 처가의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더구나 강씨 사후 재혼한 허씨 부인도 외동딸이라 아버지의 재산은 더 불어났다
곽재우는 외가동네인 이곳에서 1552년 태어났다.
어머니는 3살에 돌아가시고 계모인 허씨 밑에서 자란다.
10대에 산청에 가서 남명 조식의 제자가 되고 그의 외손녀 김씨와 결혼한다..
그의 스승 남명 조식은 방울과 경의검을 지니고 잇었는데
방울은 성성자라 하여 마음을 밝히는 경(敬)을 닦고, 경의검으로는 결단의 용기(義)를 강조하엿다
그래서인지 조식의 제자 중에 의병장이 많이 배출되었다.
곽재우는 문무를 같이 닦았다..
그는 과거에 떨어지자 물려받은 재산관리 차원에서 농업에 힘써 재산을 많이 보유하고 잇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관군은 도망가기 바쁘고 왜군이 파죽지세로 의령까지 쳐들어 오는 상황에 이르자,
4월 22일 의병을 일으킨다.
최초의 병력은 지인 10명과 노비 50명의 소규모 병력이었다.
자신의 재산 내놓고 인근 텅빈 관아를 뒤져 무기와 군량을 확보했다..
그리고 낙동강과 남강 합류지점 부근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한다.
그가 재산이 많은들 왜군에게 나라가 망하면 그의 재산을 어찌 보존하겟는가?
재산을 다 풀어서라도 나라를 지키는 것이 떳떳한 일이다.
단지 용기의 문제이다.
그의 용기는 스승 남명 조식으로부터 배워 내공으로 쌓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초기에 곽재우 의병을 도적질로 오인하고 처벌하려고 햇다
다행히 학봉 김성일이 나서서 의병으로 인정해준다.
5월 26일 정암진에서 왜군과 접전, 매복작전으로 승리를 거둔다.
이 승리로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이때 붉은 옷을 입은 천강홍의장군의 전설이 생기기 시작한다.
정암진 전투 이후 왜군은 남강을 도하하여 경상우도로 진군하려하였으나 번번히 곽재우 의병에게 격퇴되어 결국 왜군은 금산과 웅치를 통하여 전라도 진출을 시도하다가 유명한 금산 전투, 배티고개 전투 등에서 타격을 입고 퇴각한다..
이후 곽재우는 의령과 삼가에 주둔하며 왜적에 대비하고, 현풍, 창녕, 영산 탈환전에 참여한다.
그리고 10월 1차 진주성 전투시 외각에서 군세를 과장하며 심리전을 펴서 왜군을 교란한다..
선조도 공을 인정하여 형조정랑의 벼슬을 내린다..
한때 곽재우의 의병은 2000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1595년 돌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1596년에 경상좌도방어사가 되어 정유재란 때에는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수비하였다..
이때 나의 조상들도 화왕산성맹약계를 맺고 화왕산성 수성에 동참하였다..
언젠가 화왕산성에 걸으러 갔을 때 보니, 험준한 산세에 왜적들이 공격을 포기하였음직하더라..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체찰사의 구원명령을 거부하였다.
1597년 8월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사직한다.
왜란 후 진주목사, 경상좌병사로 복귀하였다가 군제개혁의 상소를 올리고 사직한다.
그로 인해 유배되엇다가 1602년 풀려낫다
그뒤 현풍에 망우정을 짓고 벽곡(곡식을 끊는 도가적 수행)하며 지냈다.
정치적으로는 동문수학한 대북파(당시 집권당)와는 다른 노선을 걸어 남인과 가깝게 지냇다..
그와 비슷한 노선을 걸은 사람이 동계 정온 <거창 수승대 둘레길편 참조>이다.
그는 1613년 영창대군 사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1617년 망우정에서 세상을 떠낫다.
그에게 남은 재산은 옷한벌, 거문고, 낚시배가 전부였다.
그의 생가 앞에는 사대부집 후예 답게 은행너무가 냄새를 풍기며 서잇다..
생가 앞 동상은 왜 손에 칼을 들지 않고 대나무 같은 것을 들고 있을까??
그래서 해설사에게 물었다
등채 란다..
무관의 말채찍으로 주로 굵은 등나무로 만들고 막대기 형태란다..
무관은 철릭을 입고, 전립을 쓰고 목화를 신는다. 환도와 동개(마상용 화살)를 메고 등채를 든다..
1) 그는 기만술과 심리전에 능하여 게릴라전의 명장이다..
전국시대를 거친 일본은 정규전, 전면전에 능했지만, 곽재우가 시작한 게릴라전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게릴라라는 말은 나폴레옹이 1808년 스페인을 침공햇을 때 스페인 민중의 항쟁에서 나온 말인데,
우리의 의병은 200년전에 선구적 역할을 한 셈이다..
2) 그는 지는 싸움을 하려 하지 않았다.
1차 진주성 전투에는 출전하여 크게 기여하였지만, 2차 진주성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3) 또한 그는 명분론에 입각한 주전파는 아니었다. 정당하고 당당한 강화를 주장했다.
의병의 깃발을 들었던 그는 오늘도 의령의 가로등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