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5년 주문모 신부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 미사가 올려진 곳에 가회동 성당이 있다..






주문모..중국인 신부

그는 중국 소주 출신으로 과거 응시생이었다..과거에 실패하고 결혼 3년만에 아내도 사별한뒤 홀로 지내다가 북경교구 신학교에 들어가 제1회 졸업생으로 신부가 되었다..

그리고 1794년(정조 18)에 조선으로 파견되엇다.

그는 6개월만에 신분이 탄로나 체포령 속에서 도주하면서도 명도회를 결성하여 정약종, 황사영 등을 지도하였다..

1801년(순조 1) 주문모 신부는 잡혀 효수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2014년 8월 16일 시복되었다.


황사영..

1794년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세례명 알렉시오

정약현의 딸 정난주와 결혼한다..즉 다산 정약용의 조카 사위다..

1801년 충북 제천의 산중에 피신하여 토굴(현재의 배론 성지) 속에서 지냈다. ( 충주 박달재 배론 길에서 들린 적이 있다 http://blog.daum.net/servan/6350623 참조)

그는 여기서  주문모 신부의 입국 후부터 신유박해에 이르기까지 교세 및 박해의 상황 등을 적어 중국 천주교 구베아 주교 에게 전할 계획으로 황사영백서를 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황심 등과 함께 붙잡혀 모두 처형당하였다.

백서 내용중에

1. 청나라 황제가 조선을 중국의 한 성으로 편입하여 감독하거나

2. 서양 열강이 배 수백척에 병력 5만명을 파병하여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게 해달라

는  내용이 들어있어 당시 집권층인 정순왕후와 노론벽파에게 탄압의 명분을 보강해주는 결과를 빚었다..


그의 장인 정약현은 흑산도로, 그의 처 정난주는 제주도로 유배간다..

제주 올레 11코스에서 정난주 (마리아)를 묘에 들른 적이 있다..( http://blog.daum.net/servan/6349931 참조)



이곳은 강화도령과의 인연도 있다..

주문모 신부가 포교중일 때 그 당시 사도세자의 아들인 은언군은 강화도에 유배 중이었는데,

의 처 군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도 신도가 되었다..


은언군..

그는 사도세자의 서자이고 정조의 동생이며 훗날 철종이 되는 강화도령의 할아버지이다..

정조 즉위 초 홍국영이 정조를 보호하고 정조의 원수를 제거하는데 앞장서면서 권력에 핵심이 되어 많은 정적이 생긴다.

홍국영은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밀어 원빈으로 만든다..

그러나 원빈이 아들을 낳지못하자, 은언군의 장자 상계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세자를 옹립하려다 실패한다.

그리고 홍국영은 실각한다..

그러자, 홍국영에게 피해를 입은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 등의 세력이 은언군을 홍국영의 일당으로 보고 집요하게 핍박한다..

그리하여 사사하라는 상소 속에서 결국 아들 상계군은 자살하고 본인은 정조의 보호로 구명되어 강화도로 귀양간다..

그러한 괴로운 시기에 은언군 부인 송씨와 죽은 아들의 부인 신씨가 주문모 신부에게 귀의하여 천주교에서 의지처를 찾는다..


그러나 정조 사후 1801년(순조 1)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시 천주교를 박해하면서 군부인 송씨가 주문모를 숨겨준 사실이 발각되어

 송씨, 신씨 등은 사약을 받는다..

은언군도 강화도를 탈출하다가 잡혀 사사된다.

훗날  은언군의 손자 강화도령이 철종으로 즉위하자, 은언군, 송씨, 신씨는 복권되었다..





이 성당에서 조카의 결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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