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 옛길 걷기에 나섰다..

차는 대관령 하행휴게소에 도착..

이곳은 선자령 둘레길, 대관령 옛길의 출발점이다..



장식용 풍력기가 맞아준다..

돌지 않는 풍차..

풍력 발전, 태양열 발전..말은 그럴 듯하지만, 태반이 국고 손실만 끼치고 산림훼손의 피해만 주는 현실이다..

정말 적지에 효율적인 시설을 해야한다..

국민 세금을 피를 수혈하듯 해야지 아버지 돈 축내듯이 하면 안된다..이넘들아..




작은 시내 봄물에 가마우지가 목욕하던 길..

등나무 한가지 꺽어 비스듬이 메고 가네...




대관령 양떼 목장을 지난다..

양떼도, 사람떼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도 다 때가 있나보자..




순이같은 철쭉이 피엇다..

화려하지 않으면서 단아하고 고운 우리 순이처럼..



붉은 병꽃도 환영대열에 나선다..




대관령 국사 성황당에 사람이 몰려들고, 방송국 기자도 보인다..

오늘이 강릉 단오제 행사가 있는가?




산신당에 주석한 대관령 산신은 누구신고?

의외로 김유신 장군이다..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난 허균이 쓰기를,

"‘신라 장군 김유신은 어려서 명주(강릉의 옛 지명)에 유학하여 대관령 산신에게 검술을 배웠다.

그는 강릉 남쪽에 있는 선지사에서 명검을 만들었고, 그 신통한 검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사후에 대관령산신이 되어 이 지방을 보호해 주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대관령과 송정의 모든 소나무를 군사와 노적가리로 보익하여 왜군이 근접치 못하게 했다."


화부산사에 있는 ‘순충장렬흥무대왕화산재기공비’에,

‘말갈이 신라의 북변을 침입하여 괴롭히므로 문무왕은 원년(661년)에 김유신에게 명하여 말갈을 정벌케 했다.

이에 김유신은 하슬라주(강릉)에 출병하여 화부산 아래에 주둔하고, 오대산에서 무기를 만들고, 군대의 훈련을 팔송(송정동)에서 시키는 등 무력을 크게 과시했다.

이에 말갈이 두려워 도망치고 말았다. 김유신을 보자마자 말갈이 도망갔으므로 현지 주민들은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김유신의 공덕을 잊지 않았다.’



그럼 옆에 행사를 진행하는 성황사 안에 계신 분은 누구신가?

신라 하대의 고승 범일 선사다..


그는 강릉 학산리 출신으로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경주에서 구족계를 받고 흥덕왕 6년(831)에 당나라로 건너가

마조선사의 제자인 염관 제안선사로부터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부처나 보상에 대한 소견을 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라는 말에 깨우침을 얻는다.

6년간 염관의 밑에 수행하다가 그 문하를 떠나 석두 희천의 제자인 약산 유엄(751~834년)을 만나 선문답을 나누기도 했다.

845년 무종의 법난(회창파불)이 일어나자, 범일은 섬서성 상산의 산속에 숨어 지내다가 광동성 소관으로 가서 혜능대사 진신상에 참배하고, 847년에 귀국했다.

16년만이었다.

그는 충남 대덕 백달산에서 수행하던 중, 명주(현 강릉) 도독 김공의 요청으로 강릉 사굴산에 산문을 열었다. 이때가 문성왕 12년(851년)의 일이다.

그는 굴산사에서 40여 년을 보냈으며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의 부름을 받았지만, 왕실에 나아가지 않았다.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창시자가 됐으며, 동해 삼화사와 강릉 신복사를 창건하고 양양 낙산사를 중창하여 영동 지방 선종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이 지역을 교화하는데 힘써 영동지방의 정신적 지주가 됐으며, 진성여왕 3년(889) 굴산사에서 입적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범일선사를 범일국사로 부르고 대관령 국사성황신으로 추앙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강릉단오제의 개막을 고하는 국사성황신에 대한 제의가 11시경에 시작되어 끝나고 준다는 떡을 기다릴 새가 없어 그냥 길건너 옛길로 올라선다..



중턱에 오르면 선자령둘레길과 대관령 옛길로 갈라진다..



대관령..

영동과 영서를 구분하는 분수령..

후삼국 시절 궁예는 원주 양길의 부하로 일군을 이끌고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은 점령하고 북상하여 강릉 지역 당시 명주의 김순식의 항복을 받는다..

그리고 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태백산맥을 넘어 화천, 금화, 쇠둘레(철원)지역을 점령하여 자신의 근거지로 삼는다..

그뒤 궁예가 퇴출되고 왕건이 왕으로 추대되자, 명주 장군 순식은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왕건측의 설득으로 고려에 귀순하여 왕씨 성을 하사받는다..

그가 궁예나 왕건을 돕기 위해 출병한 길이 이 길이다..

그 도중 대관령에서 제단을 만들고 승전을 기원하였다..

이것이 국사성황당의 시초였을 것이다.. 




대관령 구름이 처음 걷히니

꼭대기의 눈이 아직도 남았있네

양 내장 같이 구불 구불한 산길이 험난한데

새길같은 역정은 멀기도 하네

늙은 나무 신당을 에워싸고

맑은 안개 바다 산에 접했어라

높이 올라 글을 지으니

풍경이 사람의 흥을 돋우네..


- 김시습-



김시습의 시가 거짓이 없구나

구불 구불하고 새길 처럼 좁고 험한 길이 이어진다..




새가 다닐 험한 길은 하늘에 걸렸으니

이길 가고 잇는 나도 반공중을 걷는 형국이다

연이은 산들은 눈이 내려 흰 빛이고

물은 붉은 해에 씻기어 붉게 비친다

훤히 트인 바다는 아득히 천리에 뻗었고

구름은 한눈에 시원히 트였구나

평생에 품엇던 온갖 뜻이

오늘에야 긴 바람을 타는구나..


- 한원진 -


한원진은 누구인가??

남당 한원진(1682- 1751)은 송시열- 권상하를 잇는 주자학자이다..

그는 아산 외암민속마을의 주인장 외암 이간과 '인물동성론" 논쟁을 하였다..

즉 그는 사람과 동물은 서로 본성이 서로 같은가, 다른가? 하는 논쟁(호락논쟁)에서

그는 다르다는 인물성이론을 주장했고, 그의 이론을 지지하는 팀을 호론(충청도)이라 했다..

이런 입장은 후일 조선과 금수와 같은 일본은 근본이 다르다는 위정척사론으로 이어지고, 홍주(홍성) 의병 봉기의 토양으로 인식된다..




반정주막터..

영동고속도로 뚤리기 전의 국도가 지나가는 길이다..`

`







반정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강릉 시내와 동해바다가 보인다..




반정..길 절반이라는 의미..

강릉 쪽 초입인 구산역에서 고개의 횡계역까지 절반 지점인 이곳에 주막이 있었다..



단원 김홍도가 대관령의 그림을 그렸고

율곡의 어머니 신 사임당이 이곳에서 고향을 바라보며 시를 지었다.. 


`

장가온 이원수와 19세에 결혼하여 주로 친정에 살다가 남편의 직장을 따라 다녔고 33살에 율곡을 출산하러 친정으로 가서 오죽헌에서 율곡을 출산한다

38살에 시집 살림을 주관하려 고향을 떠나는데, 이곳에서 이르러 "<유대관령 망친정> 대관령에서 친정을 바라보다"라는 7언절구의 시를 지었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이따금 머리를 들어 북촌을 바라보니

 흰구름 떠있는 곳에 저녁 산만 푸르네


신사임당은 33살 때 낳은 율곡 이이가 15살 때 병들어 48세에 죽는다..

율곡은 3년상을 마치고 방황하다 19세 무렵에 금강산에 들어가 중이 되엇다가 1년만에 환속한다..

그리고 자경문을 집필하고, 퇴계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성리학자를 매진하여 대가가 된다..


***

대관령 옛길은 몇 구비일까?

예전에 율곡이 강릉 외가에서 한양갈 때 곶감 100개를 챙겨 1굽이 돌 때마다 빼먹엇더니 대관령을 다 넘고 보니 곶감이 1개 남았단다..

그래서 아흔 아홉구비라고 한다..



예전엔 시인묵객들의 영감을 주던 길
이제는 시시덕 거리며 걷는다
시인의 시대는 가고
예능의 시대가 되었으니
한 귀절 절창을 찾는 것은
올드트롯을 부르는 것과 같구나
그러나 누가 알랴
마지막 날에 가인이 부르듯
심금을 울리는 절귀 한소절 남길지도..




국사성황당 > 강릉 쪽으로 진행하면 대부분 내리막길이라 걷기 어렵지 않다..

일행이 말한다..

"거꾸러 걸어야 운동이 되겟네.."





물 좋은 계곡을 만나니 너 나 할 것 없이 신 벗고 발을 물에 담근다..





조선왕조 500년 tv 드라마 작가 신봉승의 시에도 대관령 아흔 아홉구비가 나온다..



주막이 나온다..

주모!! 하고 부르고 방을 들여다 보니 주모가 방안에 앉아있네..



평민들은 앉아서 술먹고 수다떨고, 칸막이 옆에 양반은 책을 읽고 잇네..

실제 그랬을까?






길은 개울 옆으로 이어진다..

맑은 물, 흰 돌, 빛나는 해...500년전에도 그랫으리..






오..반가운 표지판..전에 대관령 자연휴양림에서 잘 때 아침 산책 나왔던 길이 보인다..

http://blog.daum.net/servan/6351033 참조..



산길이 끝나는 곳에 막걸리 집 유혹이 강렬하다..

아이스 께끼 선착순..이라는 말에 얼릉 하나 집어든다..

세상에 제일 맛있는 것은 뭐든 공짜로 먹는 거다..




길은 차도로 이어진다..

이 코스의 종착점은 보광리로 되어 있다..



5월 장미가 매혹적이다..

스스로 이쁜 걸 안다는 듯이..

미스트롯의 두리공주와 겨루어도 될 것같다..






장미의 망상을 부숴주는 작약의 황홀함..



소나무 위에 달린 엄청큰 벌집..목청이다..





아름다운 아가씨들의 향기가 풍기는 아까시..

벌들의 일터도 이젠 슬슬 문닫을 시간이 되어간다..

아까시, 장미가 스러지면 6월의 여왕 개망초가 등장하겠지..ㅎ



보광리에서 대관령을 바라보니 풍력기는 아직도 해찰하고 있다..






<오늘 걷기> 바우길 2구간( = 아리바우길 6구간) 중 대관령 옛길 1코스 - 14.7k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