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에 박문수 묘라고 치고 갔더니 이상한 좁은 길로 끌고 간다..

연구결과

<내비>에 고령박씨종중재실(북면)을 입력, 선택하던가, 아니면 북면 은지리 은석골경로당을 치고 가야 된다..



가는 길에 만난 거시기..버섯농장 상징이 이쁘다..

승용차는 재실 앞마당에 주차할 수있다...




재실 앞에 어사 박문수의 동상이 있다..

그의 관직 생활중 암행어사 활동 기간은 1년도 안되는데, 그의 이미지가 어사로 굳어진 것은 그 활동 기간 행적이 뛰어 났기 때문이리라..



이곳에 그의 묘가 있는 것은

그가 영조 초기 이인좌의 난 때 종사관으로 종군하여 토벌에 공을 세워 영성군에 봉해지고, 은석산 일대의 땅을 사패지(공신전)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공신이 되면, 땅을 하사 받고 초상화를 그려주는데, 그의 초상화는 천안 박물관으로 이관,보관 중이다..



뽀샵이 금지되고 정밀 실사로 그리는 조선시대 초상화임을 감안하면 그는 참 준수한 용모의 선비이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그는 해학, 유머를 자주 했다고 한다..왕 앞에서도..



고령박씨재실..

원래는 후손이 살던 집인데, 서울로 이사가면서 재실로 쓰인단다..



현판에 시서일가(詩書一架)라 써있다..

시서가 한 시렁이라..

즉, 시집이 서가에 가득하다..는 것이니 선비의 청아한 생활을 묘사한 글이다..



길 표시 판은 우측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반대편 재실 옆 오솔길로 걸어가는 것이 좋더라..







재실 옆 오솔길이 이리로 나와 합류한다..



이즈음 어디를 가나 단풍이 이쁜 길들이 요소 요소 가득하다..



어사 마패...위 그림상으로 4마리다..

어사의 마패는 역에서 말을 빌릴 수 있는 마리 수를 표시한다..

4마패는 말 4마리를 빌릴 수 있는 것이다..

또 어사용 마패와 일반 마패가 달랐다고 하는데, 영조 때는 암행어사에게 주로 3마패를 하사햇다고 한다..



우측 은석사 쪽으로 올라간다..



박문수는  숙종 17년 1671년에 태어나 영조 시대에 벼슬을 한 사람이다..

그는 평택 진위면 외가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왔으나 할아버지·큰아버지·아버지가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다시 외가에 내려와 자란다..

훗날 외삼촌 이태좌는 좌의정을, 한 살 밑인 외사촌 동생 이종성은 영의정을 지낸다..



그는 1723년(경종3년) 33세에 과거에 급제한다..

합격에 관한 야사가 전설의 고향에서 방영되었단다..

그가 과거보러가다가 어느 대가 집에 묵는데, 야밤에 월장하는 사람을 목격한다.. 

그 다음날 서울 가는 길에 초립동자를 만났는데 과거시험이 끝났다면서 장원급제자의 시를 읊어주었다..

그러나, 마지막 귀절은 기억이 안난다며 풀피리를 불며 가버렸다...

박문수는 낙담하여 서울 집안 어른 집에 도착하였는데, 그 어른이 무슨 소리냐, 과거 시험은 3일 뒤에 벌어진다고 알려준다..

그가 과거장에 가니 초립동자가 알려준 시귀절 첫머리가 시제로 걸렸다..

그는 초립동자가 알려준 시에다가 마지막 귀절을 창작하여 제출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시는 이렇다..


落照吐紅掛碧山 낙 조 토 홍 괘 벽 산       지는 해는 푸른 산에 걸려 붉은 해를 토하고
寒鴉尺盡白雲間 한 아 척 진 백 운 간       찬 하늘에 까마귀는 흰 구름 사이로 사라진다.
問津行客鞭應急 문 진 행 객 편 응 급       나루를 묻는 길손의 채찍질 급하고
尋寺歸僧杖不閑 심 사 귀 승 장 불 한       절 찾아 가는 스님의 지팡이도 바쁘다.
放牧園中牛帶影 방 목 원 중 우 대 영       뒷동산 풀어 놓은 소 그림자 길기만 한데
望夫臺上妾低鬟 망 부 대 상 첩 저 환       망부대 위로 아낙네 쪽머리 그림자 나지막하구나.
蒼煙古木溪南路 창 연 고 목 계 남 로       오랜 고목들이 줄지어 선 남쪽 냇길에
短髮樵童弄笛還 단 발 초 동 농 적 환        짧은 머리 초동이 피리 불며 돌아온다.


과거 급제후 귀향길에 전에 들린 대갓집에서 그날 꼬마신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그날 월장하던 사람을 수소문과 추리 끝에 찾아내어 신부의 정부이고, 꼬마신랑을 살해한 것임을 밝혀낸다..



1728년 영조 즉위 초기 경종 독살설을 제기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 난 때 병조판서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워 2등 공신이 되엇다

천안의 옛이름인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지고, 이때 북면 은지리 일대 많은 땅을 나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후 경상도관찰사로 발탁되면서 승승장구한다.



그는 1727년(36세)에 영남, 1731년(40세)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된다..

영남어사로 나가서는 부정관리를 적발햇으며, 충청어사로 나가서는 기아민 구휼에 힘썼다..


더구나 경상 관찰사 시절 수해를 보고는 구호곡들을 미리 거둬 배로 보내 배로 보내 함경도의 백성들을 구한 것이다

노론의 엄청난 공격을 받았으나 영조가 용서하였다 

1741년에는 함경도 진휼사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가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그외에도 당시 삼정문란의 원인인 균역법의 개정을 위해 노력하는데, 양반에게도 군포을 부과하는 개혁을 시도하다 좌천되기도 한다..

그의 개혁노력은 대원군 집권시 양반에게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 실시로 완결된다...


그는 1755년 나주괘서 사건에 연루 누명을 쓰자, 사직하고, 이듬해 65세 나이로 사망한다..



계곡 따라 가는 길은 아직 무릎에 무리다..

계곡 건너편 임도를 따라 은석사까지 가볼까 하다가 얼릉 포기하고 벤취에 앉아 물마시고 요기하며 쉰다..



돌아오는 길에 무덤앞 효부 표창패를 보았다..

그 아래 자녀들의 기념시를 읽어본다..



읽다가 보니

송가인의 엄마아리랑이 저절로 나온다..

https://youtu.be/C9dheXI7Dag




재실 오솔길로 들어간다...

황금에 눈이 어두운 나방이 세월가는 줄 모른다..




재실 기와 위에 익어가는 홍시들..

나훈아의 홍시를 불러온다..





박문수의 어사시절, 관료행적이 당시 민중의 뇌리에 인상적으로 박힌모양이다...

우리 야사에 박문수의 일화가 97건으로 제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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