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로 향한다..



이 절은 세종대왕 영릉이 옮겨오자 영릉의 원찰이 되었다.




불이문의 사천왕도가 인상적이다..








조사당에 지공, 나옹, 무학 대사의 영정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절은 나옹화상과 인연이 깊다..

그가 이 절에서 열반하여 다비할 때 많은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나옹은 충목왕 때 중국 원나라에 구법유학을 떠났다..

거기서 인도 출신 지공화상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수행끝에 지공과 평산 처림의 인가를 받고, 수년간 중국에서 설법하였다.

공민왕 7년 고려로 돌아와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환대를 받는다..

광명사에서 오교양종의 모든 승려들을 상대로 공부선을 주관할 때 환암 혼수를 인가한다..

그후 주로 양주군 회암사에 주석했다..

그러나 화암사 중창을 거창하게 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자, 역풍을 맞는다..

우왕 2년에  경북 밀양 영원사로 떠나라는 왕명을 받고 병든 몸으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열반에 이른다..

세속 나이 57세, 법랍 37세 였다..

그의 제자는 환암 혼수, 무학대사 등 48명이 된다..



지공화상과 나옹선사의 사리가 보관된 라마탑형 사리함..

일본인에 의해 도굴되어 현재는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잇단다..



한국 조계종의 종조가 누구냐? 하는 논쟁이 있다


- 신라말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의 선불교 계통을 이은 구산선문 중 가지산파 창시자 도의국사를 원조로 하는 것은 다툼이 없다..

그러나 고려 대몽항쟁기에 도의국사의 법맥이 유명무실해진다..

고려말 중국 원나라에 구법유학을 한 인물들이 있었으니, 태고 보우, 나옹 혜근, 백운 경한 등 3명이다..

태고 보우는 임제종 석옥 청공의 인가를 받앗고, 나옹은 평산 처림과 지공의 인가를 받았고, 백운은 석옥과 지공의 인가를 받았다..

그런데 종조가 되려면 출중한 제자들로 법맥이 이어져야 한다..

나옹이 왕명으로 공부선을 개최하였을 때 환암 혼수를 인가하였고, 환암 혼수는 태고 보우의 인가도 받는다..

한편, 환암 혼수의 법맥은 청허 서산, 사명당 등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 법맥이 되었다..

따라서 조계종의 종조가 되려면, 환암 혼수를 인가한 나옹이나 태고 보우가 되어야 한다는 귀결이 된다..


이에 대해 기성종단(비구 + 대처)이었던 태고종은 태고 보우선사를 종조로 모셨는데,

그러나 대처승 퇴출을 주장하며 등장한 현 조계종은 종조를 보조국사 지눌로 모시는 것으로 차별화하였다..

보조국사 지눌은 중국에 유학한 적도 없고 국내에서 육조단경과 서장을 가지고 수도하여 독자적으로 깨달은 분이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의 인가에 의한 전등설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에서 현재까지 법맥이 이어지지 않는 단점이 잇다..


그후 성철 스님이 이의를 제기하고, 보조국사를 종조로 하면 불교의 법맥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환암 혼수의 스승으로 중국 임제종의 맥을 이은 태고 보우선사를 종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최근에 한 스님은 환암 혼수의 진정한 스승은 나옹선사라고 주장하면서, 나옹선사를 조계종의 종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조국사 지눌, 태고 보우 선사, 나옹 혜근 선사 중 누구를 한국 조계종의 종조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 쟁점인데

결국 훌륭한 제자로 이어진 라인(법맥)이 어디냐가 종조 논란의 귀결이다..

종조 논쟁은 위 3분 중 누가 도력이 뛰어나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법맥이 오래 훌륭한 제자를 끊이지 않게 배출햇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https://shindonga.donga.com/3/all/13/859548/2  참조



나옹선사의 유명한 시가 있다..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의 제자 중에 뛰어난 사람은 환암 혼수와 무학 대사인데,

환암 혼수는 고려의 마지막 국사로서 조선 건국 무렵 사망하고, 조선초기 무학대사가 각광을 받으면서 나옹의 법맥의 주류를 형성하였으나

조선 중기 이후에 그 법맥이 끊어지고, 법맥이 계속 이어진 환암 혼수 법맥이 주류가 되었다..

즉, 오래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때 사람 김병기의 송덕비가 절에 서있다.

왜 여기에 있을까??


1856년(철종 7) 4월 12일 여주읍내에 큰 불이 일어나 가옥 수백 채가 불에 탔는데 김병기가 그의 아버지 김영근과 함께 수백 석의 식량과 돈을 풀어 백성들을 구휼한 바 있는데 이를 기리기 위한 공덕비가 경기도 여주시 영월루 공원에, 여주시 신륵사에 송덕비가, 여주시 상동에 구휼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안동 김씨 중에서는 인덕이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당시 흥선대원군과도 좋은 관계를 맺었기에 대원군 집권시 안동김씨를 퇴출시킬 때에도 김병기만은 예외로 중용한다..




은행나무 한 줄기에서도 보살을 찾는 정성..ㅎ



구룡루

원효의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아홉 룡과 관련이 있다.




보우, 나옹과 변조 신돈은 같은 시대를 살았다.

보우는 공민왕의 국사, 나옹은 왕사 대접을 받았는데,

신돈은 노국대장공주 사후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6년간 개혁정치를 시도한 인물이다.

신돈은 불교계에서는 화엄종 사람들을 기용하고, 보우와 나옹을 박해했다고 한다.

1371년 신돈의 실각후 보우와 나옹은 다시 중용되었다.




여기도 황포돛배가 다닌다..

강에는 배가 다녀야 강 답다..

강은 근대까지 고속도로역할을 했다..

이 강으로 영월 아우라지의 뗏목이 내려왔으며, 이황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도 배를 타고 갔고, 나옹도 여주에 올 때는 배를 이용했다고 한다..





강 건너는 금은모래 강변유원지이고 폰 박물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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