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에서 배를 타고 하의도 당두선착장에 도착했다.
이곳까지는 3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배에서 내리자 마자 김대중 생가로 향한다.
이 곳에 캠핑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길가에 천사들이 늘어서 있다??
신안군이 1004개의 섬이 있다고 광고하더니, 상징을 천사(엔젤)로 슬적 치환한다.
더구나 김대중 생가 앞에 집중 배치하니, 마치 천당으로 가는 길을 연출하는 모양새다..
생가 앞에 그는 비둘기를 들고 있다.
비둘기??
노아가 대홍수 끝에 육지를 찾으려고 날려 보냈던 새..
그래서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성령을 상징하기도 한다.
복원된 생가는 생각보다 크다. (구미의 박정희 생가보다..ㅎ)
실제 집터는 작은 것을 보면 실제와는 좀 다른 것 같기도 한다.
그는 이곳에서 1924년에 태어나 1936년 목포로 이사갈 때까지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무엇하는 사람일까?
안내문에는 일본인 땅의 소작인이었다고 한다.
단순한 농민이 아니고, 이장을 지내고, 소작쟁의 때에는 앞장서는 말빨이 있는 사람이었단다.
그는 하의도에 소학교가 들어서기 전에 서당에서 공부를 했다.
그래선지 그는 서예휘호를 많이 남겼다.
하의도에 소학교가 생기자 10살 쯤 하의 보통학교에 입학한다.
4학년 때 목포로 전학간다.
중고등학교 때는 은행원을 목표로 공부했단다.
그 당시 식민지 학생들의 안정된 직업은 은행원, 교사였다.
박정희는 사범학교에 진학한 것처럼..
그는 고등학교 2학년때 창시개명을 해 도요타 다이쥬(豊田 大中 풍전 대중)로 창씨개명했다.
박정희의 창씨명이 다까끼 마사오이듯, 그 시대를 살던 사람이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는 목포공립상업학교를 1944년 졸업하고, 만주 건국대학을 진학하려다가 징집문제 때문에 포기한다.
그 직전 박정희는 1938년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만주국은 일본의 위성국이어서 조선인이 바라는 장학금제도가 많았다.
그는 고졸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직원으로 취직한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이 떠나자 적산회사의 관리인이 되어, 졸지에 청년사업가로 변신한다.
그는 해방후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선전부원으로 활동하였고, 공산주의 계열인 조선신민당의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6.25. 당시 목포해운공사 사장으로 선박 여러척을 보유한 자산가라는 죄목으로 인민군에게 잡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는 바람에 겨우 살아났다고 한다.
그의 생가에 걸린 글씨 한 점
양춘포덕택 陽春布德澤
만물생광휘 萬物生光輝
따뜻한 봄볕이 은덕과 혜택을 베푸니
만물이 살아나 빛을 발한다.
그래서 그는 북한에 햇볕정책을 썻던가?
그러나 북한은 살아나 빛나는 폭탄(원폭)으로 보답하는가??
복원생가 옆 원래 집터..협소해 보인다.
그도 가난 속에서 성장했다..
박정희도 그렇다.
그 시대의 선각자들은 어떻게 가난을 벗어나느냐로 고민했다.
그의 마음 속에도 붉음이 잇었다.
문득 돌아본 그의 동상에 다시 필이 꽃혔다.
이 동상의 모습이 그의 인생을 시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그는 왼손을 뒤로 감추고 잇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왼손??
그는 항상 군부와 호남 밖 사람들의 의심을 받았다.
80년대 3김을 평가한 말이 잇다
"JP는 때묻었고, YS는 어리고, DJ는 의심스럽다"
그는 장인(첫 부인 차용애의 부친)의 권유로 한민당에 입당한다.
그 당시는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사장으로서 사설도 썼단다.
이렇게 기른 필력으로 훗날 저서를 여러권 썻다.
그래서 "김영삼이 읽은 책보다 김대중이 쓴 책이 더 많다" 웃으개 소리도 잇었다.
54년 선거에 목포에 출마하여 낙선한다.
장차 호남의 맹주가 될 사람의 출발은 이렇게 미약했다.
그리고 1956년 민주당 신파 (장면 파)에 가입하고, 장면을 대부로 하여 카톨릭 세례를 받는다.
그의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
이 세레명을 받자, 그가 탄식했다.
"왜 하필이면 목 잘린 사람의 이름을 주시는가?"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의 저자로서 신앙을 지키다 헨리8세에게 죽는다.
이 세례명이 그의 인생의 나침판 처럼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판 헨리8세 박정희의 핍박을 받으면 대항마로 성장하였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다.
그는 민주당 신파의 추천으로 1961년 강원도 인제 보선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그러나 2일만에 5.16이 터지며 국회가 해산된다.
박정희와의 첫 악연이다.
1962년 이희호와 재혼한다.
첫부인은 그의 낙선시절 미용실을 운영하며 고생하다가 병사햇다. 김홍일, 김홍업은 첫부인의 소생이다.
1963년부터 그의 인생이 피기 시작한다.
목포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한일조약 반대 투쟁당시 그는 실익을 따져 협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의 반일프레임으로 걸었으면 그는 토착왜구로 몰렸을 것이다.
그의 사업경력과 신문사 사설집필 경력으로 그의 모토 하나가 탄생한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겸비해야 한다"
그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터진다.
"40대 기수론"
박정희의 3선개헌이 통과되자, 김영삼이 야당의 쇄신책으로 40대기수론을 주장한다.
여기에 이철승, 김대중이 가담한다.
그리고 70년 야당 대선 후보 전당대회가 열린다.
대표이던 유진산은 같은 민주당 구파(윤보선 계) 출신 김영삼을 지지한다.
1차 투표결과 1위 김영삼 2위 김대중 3위 이철승이 되었다.
다음날 결선 투표를 앞두고, 김영삼이 후보수락 연설문을 쓰는 동안, 김대중은 이철승과 접촉하여 차기 당대표로 이철승을 밀어주는 조건으로 지지를 얻어낸다.
그리고 결선투표결과 김대중이 역전하여 대선 후보가 된다.
이제 그와 박정희의 운명의 대결이 시작된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착공당시 김대중, 김영삼이 반대했다는 것은 두고 두고 회자된다.
그러나, 그는 71년 대선에서 유명한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 정권 교체를 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
이에 대한 박정희 대답은 이렇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 "
그들의 말대로 역사는 흘러갔다.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당시 일본 방문중이던 김대중은 일본에 망명하여 반정부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중정에 의해 일본에서 납치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국내로 끌려들어와 가택연금된다.
10.26.후 서울의 봄에 5.18.광주항쟁으로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불사조처럼 살아나 대권의욕을 보여 4수만에 대통령에 당선된다.
IMF가 터졌다. 정권 교체의 기회를 잡았다.
그는 적과의 동침을 선택했다.
5.16 세력인 김종필과 DJP 연합을 구축하여 승리를 이끌었다.
그의 "상인적 현실감"을 극적으로 발휘한 사건이다..
"국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올바른 방향과 정책이 어떤 것이냐"를 생각했다는 것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대통령이 된후
1. 그는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다.
2. 한일관계를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미래의 공동발전으로 설정한 것이다.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선언으로 일본 문화를 개방하고, 2002 한일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요즘 적폐청산에 집착하여 미래의 비전을 몰각하고, 반일 프레임으로 한일관계를 극단으로 몰고가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3. 그러나 그의 햇볕정책은 논란의 여지가 잇다.
너무 평화에만 집착하여 북한의 변화유도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핵개발의 숨통만 틔워주었다.
그의 노벨상 수상은 현재까지 북한의 핵개발 가속화로 빛이 바랬다.
4. 그가 남북정상회담을 자랑하였으나 국군포로와 납북자 귀환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내 생애 3대불가능 중
마이카 시대는 박정희가 열어주었고, 평화적 정권교체는 김대중이 완수했다.
이제 마지막 남북통일은 누가 이룩할 것인가?
통일은 구걸이나 평화집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처방과 진단 그리고 부드럽고 단호한 정책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그와 노무현을 비교한 말이 잇다.
"김대중은 생각의 과녁이 너무 멀어 맞추기가 어렵고,
노무현은 과녁은 가까우나 막 움직여서 맞추기가 어려웠다"
생가 뒷편에 청소년을 위한 유스호스텔도 있다.
생가 언덕 정자에 올라 바람을 맞는다.
변방의 섬에서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바람을 맞던 소년들이 대통령이 되엇다.
동쪽 거제의 김영삼, 서쪽 하의도의 김대중
시대와 역사는 참으로 절묘한 포석을 하였다.
그가 꿈꾸던 마하아시아의 평화는 손바닥 위에 어리광처럼 인연과 조건을 맞추지 못하고
눈길에 어지러운 발자국만 남기고 말앗다.
전환의 시대에 태어나 4번의 위기와 4번의 도전으로 정상에 오른 의지의 한국인이엇다.
그가 꿈꾸던 평화는 더 멀어진 듯이 보인다.
하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것이 낫다는 말로 위로해본다.
태극정원에는 서해5도까지 선명하다
누가 만든 태극인가?
태극이 무극이 되는 그날이 오면 우리나라는 7040의 부강국이 될 것인가?
지금도 어딘선가 변방의 땅에서 큰 포부 키우며 사는 소년들이 있으리라.
그들의 빛나는 인생과 업적을 미리 수기하고 축복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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