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산 정상에서 다시 내려간다.
목표는 궐리사 방향으로 하산하여 명재고택을 관람하고 애향공원 주차장으로 복귀한다.
다시온 문제의 삼거리..어??
표지판에 변화가 있다??
관청이 수정을 해주지 않자, 의병이 나서서 매직펜으로 궐리사를 추가해 주었네..ㅎ
아직도 의병과 죽창에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가??
내려가는 길은 짧지만 제법 가파르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코스인가본데 하산할 수록 길이 희미해지는 미스테리..ㅎ
엉겅퀴에 반한 나비..
모든 것에 짝이 있다는 음양 조화의 신비..ㅎ
다시 신작 임도와 만나는데..
그런데, 여기서도 성의 없는 표지판이 말썽이다..
표지판의 궐리사는 숲속의 오솔길을 가리키는데..동행은 옆 넓은 임도길이라고 말한다..
결국 오솔길은 고라니 다니는 길 같고, 임도길이 대문으로 가는 길임이 판명된다..
표지판 좀 정확히 설치하자..ㅎ
하여간 고라니 오솔길로 권리사 뒷담장에 도착..
궐리사 내력을 보니..
공자의 고향, 노나라 니구산 궐리촌에서 따온 것이다.
공자 사당이다..
顔色整齊 中心必式 夙興夜寐 衣帶必飭
안색정제 중심필식 숙흥야매 의대필칙
주련에 소학의 한 귀절이 걸렸다..
얼굴빛을 바르게 하면 속마음도 반드시 경건하게 되고
일찍 일어나고 밤에는 잠자며, 옷과 띠를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잘 웃지도 못하고 밤에 딴짓 못하겠다..ㅎ
조선시대에 양반 유머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알겠다.
지금도 정치인이 "웃으며 화내는 법"을 모르고, 직설로 공격하기를 좋아하는 문화적 DNA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논어 속의 공자를 보면 지혜와 언어의 달인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그는 제자 수준에 따른 맞춤교육으로 교사라는 직업을 탄생시켰다..
늦은 앵두가 붉은 입술로 송별해준다..
금계국의 환영을 받으며 들어가는 명재고택..
입구 건물 초연당.
안에 학생들이 점심을 먹고있길래, "여기 식사되나요?"하고 물으니
왈, "여기는 도서관인데요.." 헉!!
고택의 장독이 늘어 이제는 고택의 경관을 빛나게 한다..
전에 왔을 때는 이정도로 많지 않았다.
명재 집안의 장맛은 몇백년의 전통이 있다..
전에 350년전통의 보성선씨 종가의 간장이 1리터에 500만원씩 팔렸다하여 화제가 되었는데, 이 집의 간장도 백화점에 출시된단다..
이제는 찾는사람이 많아 사랑채 옆 빈터에 많은 장독을 두고 간장의 생산을 늘렸나보다..
산에서 내려와 노곤한 참에 400년 묵은 느티나무가 보내는 시원한 바람에 저절로 누워 눈을 감게된다.
잠결에 주인장에 손님에게 이 집 풍수에 대해 설명하는 소리가 들린다.
좌 청룡 (동쪽)가 허해서 비보하기 위하여 느티나무를 심었단다.
그렇다고 해도, 이 나무가 몇백년을 지탱해주는 것이 신기하다..
명재 윤증..
그는 숙종년간에 스승 송시열과 분당하여 소론의 영수 역할을 하면서 백의정승이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다..
이 집은 명재 윤증이 눌러 살던 집은 아니란다..
본인은 원래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단촐한 집에서 살앗는데, 제자들이 주선하여 이 집을 지었으나,
정작 본인은 분에 넘친다고 생각한 듯 이곳에서 살기를 싫어하여 아들이 살았고, 가끔와서 묵기는 하였단다.
명재 윤증은 개성과 소신이 뚜렷하다.
그는 무실과 실심을 강조한 실용주의자 같다고나 할까?
특히 허례허식을 싫어하여, "제상에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 것이며, 일꺼리가 많은 유밀과 기름이 들어가는 전도 올리지 말라”고 한 유언할 정도였단다.
그의 집안 제사상에는 조기도 한마리가 아니라 토막으로 올린단다..
음식은 종이를 입에 물고 남자들이 장만한다..
추석 제사상의 경우 앞줄에 과일, 2번째 줄에 김치, 3째줄에 백설기..
이렇게만 딱 차린다..
송편 대신 백설기를 올리는 것은 "변하지 않는 마음"을 뜻한다던가?
설날에는 백설기 대신 떡국를 올린다..
그뒤 후손들은 이 정신을 계승하여 기제사도 한밤중이 아닌 저녁에 지내고, 구한말에는 이미 양력으로 제사날을 정했다고 한다..
이런 실용, 간이의 정신은 정통파 내지는 교조주의적 성리학자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명재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이고, 그 아버지 윤선거는 송시열과는 동문수학한 친구 사이다..
명재는 벼슬을 한 적이 없고, 임금이 벼슬을 내리고 불렀어도 나가지 않았단다..
10차례 벼슬이 내려지다가 우의정 벼슬까지 내리며 불러도 사양하였으니 백의정승이라 할 만하다.
왜 그는 그의 스승 송시열과 반목하고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을까?
우선 우암 송시열은 보수적 성리학자를 넘어서 교조주의적인데, 심하게 말하는 사람은 주자탈레반이라고 부른다.
주자전서의 1자 1획도 고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백호 윤휴가 "중용"에 집주를 달면서 독창적인 견해를 내자,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이단자)으로 몰아 부쳤다..
이때 윤선거가 윤휴를 긍정적으로 보아주자, 송시열은 윤선거의 과거사(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고, 동지인 김익겸이나 자신의 처 등이 순절하였는데, 본인은 탈출한 사건)을 들먹이며 힐난하면서 이른바, 회니논쟁이 벌어졌다.
그뒤, 윤선거가 죽자 아들인 윤증이 아버지의 친구이자 스승인 송시열에게 비문 작성을 부탁하자 성의없게 작성해주었고, 재차 요청하는데도 거절하면서 스승과 제자는 갈라서게 된다.
이 두사람의 관계는 이황과 기대승의 관계와 비교된다.
이, 황 두 사람도 "사단칠정론"으로 논쟁이 붙었으나 서로 존중하였고, 안동사람인 이황이 죽으면서 자신의 비문작성을 호남의 기대승에게 부탁하였고, 기대승은 흔쾌히 성의껏 작성해주었다..
사랑채에 걸린 글씨..
위 글씨는 허한고와(虛閑高臥)..아래 쪽 글씨는 도원인가(桃源人家)
다 비우고 한가롭게 누웠으니 여기가 바로 무릉 도원이라..
이은시사(離隱時舍)
떠나고 은거할 때를 아는 사람이 사는 곳..
***
명재 윤증이 벼슬에 나가지 않은 이유는 세가지..
첫째, 서인들이 남인들의 쌓인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외척의 세도를 막지 못하면 안 된다.
셋째, 당론이 다른 자는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만 등용하는 풍토도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전제들이 해소되지 않는한 정계에 진출해보아야 진흙탕 싸움에서 벗어 날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대화를 함께 하며 명재를 지지했던 박세채는 훗날 영조 때 탕평책을 뒷받침하였던 것을 보면 명재가 탕평책의 선구였음을 알겟다..
결국 조용히 은거하며 집안에서 세운 사립학교격인 종학당에서 후진을 양성한다..
그 결과 집안의 후손중 42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
***
요즘 뜨고 있는 윤석열은 이 집안 사람이다. 윤증은 그의 9대 종조부 쯤 된단다.
사람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한다는 신념..
여야를 막론하고 공평하게 수사하겠다는 의지..
검수완박이라는 압박에 저항하여 과감히 사표내고 나오는 기개는 조상의 DNA와 닮았다.
그러나, 그가 별의 순간을 어떻게 관리하고 성장하여 정상을 밟을지는 국가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윤증과 송시열의 관계가 문통과 윤석열의 데자뷰처럼 여겨진다.
안주인인 사랑채를 설명하면서 댓돌위에 늘어놓은 돌이 금강산을 묘사한 것이란다..
윤씨 집안의 포부가 크긴 큰가보다..
조선시대 충청도 양반 중 논산의 3명문가를 비교한 "삼치례" 이야기가 잇다..
광산 김씨는 먹치레
파평 윤씨는 묘치레
은진 송씨는 집치레
연산의 광산 김씨는 제사를 모시는데 성의를 다하고 제수를 푸짐하게 장만하고 제물을 1자씩 괴고 각종 음식도 많이 만들어 밤중에 제사가 끝나면 나누어 먹고 아침엔 각자 봉게도 싸주어 보낸단다..
노성 파평 윤씨는 조그만 제사상에 조촐하게 제사를 지내지만, 묘을 단장하고 석물을 잘 꾸미는 전통이 있단다..
은진 송씨는 좋은 집을 짓고 단장하는데 관심이 많단다..
향교 정문을 지나 몇백미터 가면 애향공원 주차장이다.
그늘 시원한 곳에 앉아 점심을 먹고 다시 벤치에 누워 오수를 청한다.
한가하고 나무 그늘 좋은 넓은 공원이 부럽다..
<오늘걷기> 노성애향공원 - 옥리봉- 정상 - 옥리봉 - 궐리사 - 명재고택 - 애향공원 약 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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