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황복사 삼층탑은 신문왕릉의 위치를 제대로 밝혀달라는 한많은 하소연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처음에 드림빌더가 신문왕릉부터 가자고 우긴 이유를 알 것같다..
그가 위 기사를 나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저만치 진평왕릉(아니 신문왕릉인가??)을 바라본다..
왜 이리 경주 왕릉은 위치가 뒤죽박죽이 되었는가??
조선 중기에 조상왕릉찾기 열풍이 불때 각 문중이 정한 위치가 지금껏 내려오기 때문이란다..
이제라도 발굴조사를 해서 정확한 위치를 확인해 볼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제 보문들을 지나 진평왕릉(또는 신문왕릉)을 향해 간다..
진평왕릉(또는 신문왕릉)을 지나자, 빗속에 두꺼비가 나타났다..
선덕여왕 5년(636년) 5월 두꺼비와 개구리가 떼를 지어 궁성의 서쪽 옥문지(연못)로 모여들었다.
여왕은 이 말을 듣고 신하에게, "두꺼비와 개구리는 눈의 생김이 성난 것 같으니, 이것은 군사들의 모습을 닮은 것이다. 내가 일찌기 서남쪽 변방에 옥문곡이라는 골짜기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들의 징조를 보니 반드시 백제군이 몰래 그곳에 침범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장군 알천과 필탄 등에게 명하여 이를 수색하여 무찌르게 하였다. 알천 등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보니, 과연 왕의 말과 같이 백제의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5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옥문곡에 숨어 있었다. 알천 등은 적을 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즉위초에 왕후가 죽자 이곳에 멋진 능을 조성했다. 그리고 왕이 죽자 이 능에 흥덕왕도 합장되어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앵무새 이야기가 나온다..
흥덕왕 즉위후 왕비가 죽은지 얼마 안되어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이 앵무새 한쌍을 가져왔다.
오래지 않아 암놈은 죽고 수놈이 슬피 우는지라, 왕이 거울을 앞에 걸어주도록 하였다.
수놈은 거울 속의 그림자를 짝으로 생각하여 거울을 쪼았는데 그림자임을 알고 슬피 울다가 죽었다.
이에 왕이 노래를 지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실제 흥덕왕은 즉위초에 상처를 하고도 재혼하지 않았다.
마치 고려말 노국공주를 못잊는 공민왕을 연상시키지만, 그는 정치는 무난히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후사를 남지 못한 것이 뒷날 혼란의 시대를 불러온다.
(하긴, 그의 나이 50세에 재혼하여 아들을 얻는다 해도, 성년도 되기 전에 왕이 죽으면 다시 애장왕꼴이 날 수도 있으니 재혼 안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실제로 조선의 선조는 51세 나이에 19살 인목왕후와 결혼하여 영창대군을 낳고 55세에 사망함으로써 광해군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크나큰 실책을 저지른다. 선조의 늦장가는 조선에 큰 민폐가 된 셈이다)
경주 기념품으로 석사자상도 만들어 팔았으면 좋겠다..
이제 궁금증을 유발하는 귀부로 향하면서 흥덕왕 시대를 생각한다.
그의 치세에 지진, 가뭄, 기근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바다에는 해적이 들끓었다.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여 해적을 소탕하게 하고 그가 얻은 무역이익 중 일부를 세금으로 받아 재정에 충당한다.
그의 묘역에 서있는 무인상 석물의 모델도 장보고와 무역하던 서역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마침, 손순이 기근 속에서 모친봉양을 위해 아들을 파묻으려다 석종을 발견했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포상한다.
효와 충을 강조하여 자신의 정권안정을 기한다.
그가 후사없이 죽자, 신라는 왕위계승 분쟁에 휘말리고, 장보고도 이에 휩쓸려 죽게 된다.
장보고의 18년간의 부귀영화도 일장춘몽이 되고, 5년뒤 청해진마저 사라진다..
흥덕왕의 무덤은 웅장하고 정교한 호석도 갖추었는데, 왜 비석을 새우는 귀부는 머리조각도 제대로 못하고 마무리가 엉성할까?
보통 왕릉은 왕의 생존시에 자리를 잡고 축조하기 시작한단다..그리고 실제 흥덕왕 즉위 초에 죽은 왕비의 능으로 만든 것이니 얼마나 잘 만들었겠나?
그러나, 비석은 사후에 후계자가 만들어 주는 법이라..
그의 사후 왕위계승싸움이 벌어지는데, 승리하여 즉위한 희강왕이 1년만에 살해당하고, 민애왕(김명)이 즉위한다.
그러나 1년도 안돼 장보고의 도움을 받은 김우징(신무왕)이 승리하여 신무왕으로 등극하나, 또 1년도 안돼 죽고, 아들 문성왕이 즉위한다.. 문성왕도 초기에 3-4번의 반란을 맞아 진압하느라 바쁜 세월을 보낸다.
이렇게 흥덕왕 사후 5-10년간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흥덕왕릉비의 귀부는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비문은 산산조각이 난 것으로 보인다..
원래 귀부에 비석을 세우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이 홈을 파야 하는데, 흥덕왕 귀부에 이 작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발굴조사 결과, 흥덕왕비석의 비편 59개가 수습되었다. 비편에서 예서체로 '흥덕(興德)'이라 쓰여진 부분이 판독되었고, '貿易之人'이라는 글자도 확인되고 '太祖 星漢이라는 글씨도 발견되는데..
태조 성한은 문무왕비문에도 나오는 바, 이른바 훙노왕 후손 김일제라는 논란이 되는 인물이다.. 비문의 글씨는 당대 구양순체의 달인 요극일이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