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의 땡볕에 바싹 구워져 지친 몸을 경주 숙소에 뉘였다.,

이런 여름엔 계곡을 가야 하는데, 경주엔 마땅한 계곡이 없다..

다음 날 아침 산책을 황성공원으로 갔다..

런던, 뉴욕 센트럴 파크급 공원이다..

일단 키큰 소나무 숲과 넓은 공간이 왕년의 왕도 다운 공원이다..

많은 사람들이 맨발걷기, 산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맥문동 보랏빛을 보여준다고 해서 간 것인데..

금년의 보랏빛은 미스터트롯 가수에게 빼앗긴 모양이다..

출사한 사진가도 넋을 놓고 있다는..ㅎ

호스트가 미안한지, 월지 연꽃을 보여준다고 데려 갔는데, 연꽃은 끝물이다..

다행히 오리 가족이 나와서 쉴드를 치고 분위기를 살려주네...ㅎ

 

 

이번에는 분황사 앞에 만발한 백일홍 꽃밭으로 간다..

노랑, 빨강, 핑크, 그린 4색 당파가 일치 단결하여 오늘의 더위에 항쟁하기로 모의한다..

 

황룡사터로 나서니..

아!! 황코스모스가 푸른 남산 그리메와 멋진 마리아주를 보여준다..

수년전에 보앗던 그 풍광 그대로..

아니다, 황룡사터에 전시관 건물이 새로 섰구나..

 

오늘 아침 꽃길로 산책을 마친다..

봄 가뭄을 해갈 시켜주는 단비가 2일째 계속된다..

아침 일찍 경주를 떠나려고 마음 먹엇는데, 일기에보를 보니 오전에는 소강상태란다..

그래서 '비내리는 금강산"을 걸어보자는 말에 혹해 서둘러 길을 나선다..

헌강왕릉 옆 한정식 "미담" 표지판 옆길으로 올라간다..

 

작은 산이지만 길 초반에 가파르게 올라간다..

비는 그치고 길은 촉촉하고 녹음은 더 푸르니 걷기 좋은 길이다..

 

능선에 올라서서 이제 여유있게 룰루랄라 간다..

가던 방향으로 계속가면 금강산 백율사가 나온단다..

그런데, 드림빌더가  약산을 지나쳤다고 해서 다시 돌아간다..

 

쏭알 쏭알 싸리잎에 은구슬..싸리꽃도 비에 젖었다..

 

좁은 산길 이리저리 돌다보니 약산 표지판이 보인다..

271m..

어찌보면 금강산 약산봉이라고 해야 맞다..

2천년전에 서벌(서울) 월성에 금강산이 있었다..

800년전 고려시대 강원도 금강산이 떡상하는 바람에 변두리 경주 금강산은 소금강산으로 격하된다..

1만2천봉를 거느린 현 금강산보다 작더라도  2봉정도 거느린들 누가 뭐라 하겠나??

 

영변의 약산만 알았는데..약산의 원조는 경주에 잇었구나..

조망이 없는 정상이라 바로 돌아선다..

 

올 첫 나리를 만났다..샤워를 마친 멋진 모습으로..ㅎ

 

이제 중간 갈림길에서 북군동 방향 하산루트로 들어선다..

 

드디어 오늘 조망처가 나타났다..

보문단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측 약산 건너편으로 보문단지가 전개된다..

 

대명 소노벨이 보이고..

 

보문호 우측으로 황룡사9층탑을 닮은 중도타워가 보인다..

9층탑 너머로 토함산엔 비구름이 가득하다..

 

하산길에 마주친 산딸기..수다를 더 즐겁게 만들어 준다..

 

쏭알 쏭알 싸리잎에 은구슬..

 

중도타워 9층탑이 자꾸 눈길을 잡는다..

1600년전 월성 한가운데 80미터 높이로 우뚝 솟은 황룡사9층탑..

만백성의 구심점이 되엇을 것이다..

 

오동나무도 새 열매을 품었다..무슨 야자 열매처럼 귀엽다..

 

오솔길은 북군동 아미새농원 옆에서 끝난다..

 

차를 몰고 동천동 헌강왕릉으로 향한다..

 

헌강왕릉에서 오늘의 들머리 약산을 바라본다..

경주 소금강산지구에 속하기는 하는데, 지도상 표시로 보니 약산 둘레를 걸은 것이다..

 

 

헌덕왕은 동생과 함께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켜 진압하느라 애쓴다..

재위 8년만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어 동생이 흥덕왕으로 즉위한다..

동생 흥덕왕이 집권한 후 신라는 잠시 안정을 찾는다..

흥덕왕 편 https://blog.daum.net/servan/6352235 참조

 

왕릉 주변에 석난간을 설치한 모습이 특이한다..

원래 모습이 아니고 복원하면서 설치한 것 아닌가 한다..

북천의 범람으로 왕릉이 훼손되어 복원시 12지신상은 몇개 남지 않은 것만 사용했다고 한다..

 

1400년전에는 볼수 없었던 개망초가 왕릉을 장식하고 있으니 제행무상이로다..

 

<오늘 걷기> 동천동 입구 - 약산 - 북군동 아미산농원입구, 실제거리는 3Km 정도인데, 약산 찾으러 왔다갔다 하느라 5Km 

<참고도> 아래 사진처럼, 동천동입구에서 소금강산 백률사까지 가는 등산로가 있음

경주 선덕여왕둘레길은 선덕여왕릉 - 황복사지3층석탑 - 진평왕릉 - 명활산성으로 이어지는 10km 구간이다..

이곳을 3-4번에 걸쳐 오늘에서 완결했다..ㅎㅎ

1) 선덕여왕릉 - 진평왕릉 : 오늘 구간 

2) 진평왕릉 - 명활산성 : https://blog.daum.net/servan/6352126

3) 진평왕릉 - 황복사지 : https://blog.daum.net/servan/6352148

 

오늘은 영남 알프스 가지산 등산을 가기로 한 날이다.

그런데, 아침부터 기다리던 단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해서, 숙소 경지재에서 천천히 아침을 먹고 논란끝에  코스를 시부거리 등산으로 바꾼다.

 차 1대를 날머리인  석굴암주차장에 파킹하러가는데,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와중에 차량은 밀리고, 주차장에도 빈자리가 없어 보여 다시 차를 돌린다..

내 머리 속에 밀린 숙제 "선덕여왕둘레길"이 떠올랐다..

<그래서 별똥별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생긴거다..>

선덕여왕릉으로!!

그런데, 도중에 드림빌더가 신문왕릉에 들리자고 우긴다..

최씨 고집보다 더 센 남로당 고집을 당할 수 없다..ㅎㅎ

 

 

 

신라 전성기의 왕릉답게 대문까지 번듯한 홍례문이다..

문무왕의 아들로, 국학을 세우고,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주어 귀족, 관료를 통제하고..

조선의 성종 비슷한 위상이다..

 

 

신문왕은 즉위초 장인 김흠돌의 반란을 제압하면서 대당전쟁시절 비대해진 군부세력 기를 꺽는다..

그리고 김흠돌의 딸인 왕비를 폐출하고, 새로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를 세운다. 

그렇게 그는 왕권강화의 시동을 걸었다..

김흠운은 요석공주의 남편이었으나 영동전투에서 전사한 사람이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신목왕후가 된다..

요석공주는 원효와 사랑에 빠졌고..

신라 왕족의 족보는 복잡하다..ㅎㅎ

 

 

릉주변에 받침석이 특이하다..

그중 "문(門)가 서있는 곳이 관이 들어간 입구로 추정한단다..

 

신문왕릉에서 나와 낭산 아래 사천왕사로 간다..

 

왕릉 자부송에게 물었다..

왕릉 자부송(自負松)아 네 어이 누웠는가?

광풍(狂風)을 못이기어 부러져서 누웠노라.

가다가 양공(良工)을 만나거든 나 예있다고 하구려.

 

근데, 신문왕릉에서 사천왕사 가는 길은 대로를 따라 가는 길이라 걷기는 비추..

 

단비가 논에 심은 모를 춤추게 하고, 황소도 기운나게 만든다..

오늘 하루종일 와야 땅속까지 스며들겠지..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

좋은 비가 시절을 알아 내리니

소리없이 만물에 스며드네

 

낭산 기슭에 세워진 사천왕사..

문무왕 14년(674년)..당의 웅진도독부를 수복하여 소부리주를 설치한 신라를 정벌하려고 당이 호시탐탐 침공을 시도하던 시기..

문무왕이  명랑대사와 상의하니, 호국사찰 사천왕사를 짓고 밀교 비법으로 기도하여 부처의 가피를 받아 적의 침략을 방어하자는 건의를 받는다..

그리하여 신령한 숲 낭산의 신유림 지역에 사천왕사를 짓기로 한다.

하지만, 건축에 시간이 걸리니, 임시로 절터에 비단 장막과 초막을 짓고 명승 12인과 함께 밀교의 문두루비법으로 기도를 한다.

그 무렵 침공을 준비하던 당의 군선이 풍랑으로 침몰하여 해로를 통한 당의 침략은 좌절되고..

그뒤에도 675년 매소성전투, 676년 기벌포 해전 승리까지 사천왕사는 나당전쟁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결국 사천왕사는 문무왕 19년 679년 완공되었다..

조선시대까지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무렵 소실되었다..

 

 

 

녹유신장(활을 든 신장)

사천왕사에 있던 녹유신장 걸작이 복원되어 다행이다..

승려 양지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사는 경덕왕 시절 이 절에서 수행하였다..

 

사천왕사 동귀부..사천왕사 사적비가 잇었을 것으로 추정

 

사천왕사 서귀부..문무대왕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

정조 20년(1796년)경 낭산 선덕여왕릉 아래에서 문무왕릉 비편이 처음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중에 일부 복원된 문무왕비에서, 문무왕은 자신의 조상이 흉노왕 김일제라고 밝히고 잇어 충격을 준다..ㅎ

 

사천왕사터

 

폐사후 절옆으로 일제가 동해남부선을 개설하면서 강당터가 휘손되었다..

이제 다시 철길이 폐선되자 절터를 발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굴다리를 지나 선덕여왕릉으로 간다..

 

신라초기부터 낭산일대 숲을 신유림이라 하여 보전하였는데..

근처에 거문고 명인 백결선생의 집..최치원의 독서당이 잇었단다.

 

 

지금도 솔숲은 신비함을 준다..

 

우중에 바라보는 경주 남산도 아련하고 신비하다..

 

선덕여왕..

진흥왕의 영토확장 정책의 후유증으로 백제 무왕, 의자왕에게 계속 공격당하는 세월을 보냈던 여왕..

내부적으로는 여자 임금에 대한 반감세력을 다스려야 했다..

그래도 슬기롭게 황룡사 9층으로 백성의 구심점을 만들고, 김춘추, 김유신 등 후계그룹을 탄탄하게 키워 삼국통일의 초석을 쌓앗으니 훌륭한 군주다..

 

낭산의 2봉우리 중 남봉에 선덕여왕릉이 잇다..

 

잠시 산길을  내려가다 보면 멀리 월성이 보인다..

 

접시꽃과 잠시 눈맞춤을 하고 가다보면..

무덤이 있는 넓은 터가 나오는데, 그 무덤 뒷쪽으로 낭산 오솔길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우측 오솔길로 진행하다보면..

 

의상사 입구로 나온다..

의상사??

근처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있던 자리에 황복사가 건재하던 시절, 청년 의상대사가 수행을 한 인연이 있다..

그런 인연을 살려 의상사를 지었나 보다..ㅎ

 

골목길에서 만난 앙코르와트식 불상..

 

신라갤러리 표지판을 지나면 비에 젖은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만난다..

 

그런데 석탑이 울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비에 젖은 삼층탑이 한맺혀 우는데

흐느껴 불러봐도 목놓아 불러봐도 대답이 없네...

https://youtu.be/b7hwuXfLDro

 

탑에 무슨 사연이 있는가??

 

***

1942.6.24. 이 탑을 발굴했는데, 탑밑에서 금동제 함이 발견되엇다.

판독결과, 함뚜껑에는 신문왕이 692년 죽자, 신목왕후와 효소왕이 선왕의 명복을 빌면서 이 탑을 세웠다고 내용이 써있었다..

그래서 이탑이 황복사 삼층석탑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탑과 황복사는 신문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임을 알게 되었고, 그렇다면 이 근처(낭산 동쪽)에 신문왕릉이 이었야 한다..

왜냐면 사서에 신문왕을  낭산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종합하면, 황복사와 가까이 있는 진평왕릉이 신문왕릉이 가능성이 높다는 설이 있다..

그러면, 낭산 남쪽의 신문왕릉은 누구 왕릉인가??

신문왕의 아들 효소왕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있다..

(사서에 효소왕을 망덕사 동쪽에 장사 지냈다고 나오는데, 망덕사의 위치가 사천왕사의 남쪽임은 사서에 나오고, 따라서 망덕사 동쪽은 현 신문왕릉과 일치한다는 말이다.)

 

참고: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20607/113813195/1

 

**

결국, 황복사 삼층탑은 신문왕릉의 위치를 제대로 밝혀달라는 한많은 하소연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처음에 드림빌더가 신문왕릉부터 가자고 우긴 이유를 알 것같다..

그가 위 기사를 나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저만치 진평왕릉(아니 신문왕릉인가??)을 바라본다..

왜 이리 경주 왕릉은 위치가 뒤죽박죽이 되었는가??

조선 중기에 조상왕릉찾기 열풍이 불때 각 문중이 정한 위치가 지금껏 내려오기 때문이란다..

이제라도 발굴조사를 해서 정확한 위치를 확인해 볼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제 보문들을 지나 진평왕릉(또는 신문왕릉)을 향해 간다..

 

진평왕릉(또는 신문왕릉)을 지나자, 빗속에 두꺼비가 나타났다..

 

선덕여왕 5년(636년) 5월 두꺼비와 개구리가  떼를 지어 궁성의 서쪽 옥문지(연못)로 모여들었다. 

여왕은 이 말을 듣고 신하에게, 
"두꺼비와 개구리는 눈의 생김이 성난 것 같으니, 이것은 군사들의 모습을 닮은 것이다. 내가 일찌기 서남쪽 변방에 옥문곡이라는 골짜기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들의 징조를 보니 반드시 백제군이 몰래 그곳에 침범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장군 알천과 필탄 등에게 명하여 이를 수색하여 무찌르게 하였다. 알천 등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보니, 과연 왕의 말과 같이 백제의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5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옥문곡에 숨어 있었다. 알천 등은 적을 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

옥문곡은 지금의 건천 여근곡이다..

참고 https://blog.daum.net/servan/6351728

 

경주..천년의 고도..삼국유사의 도시..

두꺼비를 봐도, 까마귀를 봐도, 석탑을 봐도, 기와조각을 봐도 역사가 튀어나오는 곳이다..

 

<오늘 걷기> 신문왕릉 - 사천왕사지 - 선덕여왕릉- 낭산 오솔길 - 황복사지 - 진평왕릉 약 4km

독락당에서 계곡 따라 상류로 조금 올라가면 정혜사지가 나온다.

회재 이언적이 젊엇을 때 공부햇던 절이고, 낙향하여 독락정에 은거할 때는 절의 고승들과 교유하엿다고 한다.

 

지금은 절은 멸실되고 13층석탑만 남아있다.

원래 정혜사 자리는 신라 선덕왕 원년(780년)에 당나라 사람 백우경이 망명와서 살던 장소였다.

백우경은 중국 소주지방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이부상서까지 지냇으나 모함에 걸려 신라로 망명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 터에 영월당 만세암을 짓고 살았는데, 수원 백씨의 비조가 된다.

9세기 쯤에 이 터에 절이 세워지고, 독특한 모양의 13층석탑이 세워진다.

 

우리 석탑의 모델은 불국사 석가탑으로 친다.

이와 비교하면 이곳 13층 석탑은 이색적인 모습이다.

 

 

석탑에 다가가자 갑자기 확성기에서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소리가 나와,화들짝 놀랏다는..ㅎㅎ

 

돌아서는 발길을 잡는 끽다거..차 한잔 하고가라는 말씀..

 

차를 찾아 들어간 곳에 차향보다는 꽃향이 사로잡는다.

유채꽃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다화구망(茶花具忘)..

차도 잊고 꽃도 잊고 충만한 마음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에 멀리 스투파 모양의 탑이 보인다..

알아보니 대흥사 사리보탑이란다..

안강읍에는 개성만점의 탑들이 많구나..

 

경주로 오는 길에 만난 형산강가의 금장대.. 

서천과 북천이 합류하는 예기청소.. 경주 출신 소설가 김동리작 무녀도의 배경이 되는 장소다..

https://blog.daum.net/servan/6350520

 

***

1박 2일의 경주 꽃길 여행의 막을 내린다..

하지만, 고속도로 진입차량 행렬을 피해 건천ic로 진입해야한다..

북천하상도로를 이용하여 현곡프로지오 아파트를 스치고 건천으로 가니 기름칠한듯 막히지 않고 쭉쭉 빠진다..

행복하고 만족한 걷기여행이었다.

옥산서원에서 700미터 쯤 자계천을 따라 올라가면 독락정이 있다.

회재 이언적이 명종때 당시 권신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좌천되고, 이후 고향으로 귀향한다.

그의 나이 40세..

고향인 경주 양동마을 무첨당에서 지내면서 이 자옥산 계곡에 독락당을 짓고 수양과 공부를 한다.

그러다가 6년뒤 1537년 김안로가 실각하자 복귀하여 요직에 기용된다.

1545년 을사사화가 터진후 55세나이로 의금부판사직에 물러나 귀향하였으나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귀양간다. 

유배생활 속에서도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에 매진하다가 1553년 63세 나이로 강계유배지에서 사망한다.

퇴계 이황이 회재의 행장을 지었다.

 

원래 이곳에는 아버지 이번이 세운 정자가 있었는데, 이름을 계정이라 고쳐 지었다.

그는 젊어서 근처 정혜사에서 공부한 적도 있었다..

그는 외가집인 경주 손씨 종가 양동마을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외삼촌인 손중돈(성종 때 문신)에게 학문을 배운다.

손중돈은 길재의 학맥을 이은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였으니, 회재는 영남 학맥의 적통을 이은 셈이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한 수제였다..

 

자옥산 아래 벚꽃 핀 한옥마을이 그림같다..

 

독락계정의 글씨가 우아하다..

 

손자들이 독락당 수호를 위해 토지를 출연하고 후손들이 토지를 처분하지 못하게 합의문을 만들었다.

요즘보다 더 법치주의에 밝은 사람들이다..

 

 

독락당은 옥산정사라고도 불린다. 

현판도 2개..

옥산정사의 글씨는 퇴계 이황의 글씨다..

 

전국에 독락당이라는 당호가 많다..

대부분 맹자 진심장구 상에서 나온 '古之賢士何獨不然. 樂其道而忘人之勢'라는 구절을 신조로 삼았다.

"(옛날 어진 왕은 선을 좋아하고 권세를 잊었으니) 옛날 어진 선비들이 어찌 그들만 그렇지 않았겟는가? 도를 즐기고 다른 사람의 권세를 잊었다."

 

이 현판글씨는 아계 이산해의 글씨다..

이산해는 토정 이지함의 조카이고, 동인에서 분파된 북인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냈다..

***

회재의 시 독락(獨樂)을 보자

 

무리 떠나 홀로 사니 누구와 함께 시를 읊나

산새와 물고기가 내 얼굴을 잘 안다오

그 가운데 특별히 아름다운 정경은

두견새 울음 속에 달이 산을 엿볼 때지

離群誰與共吟壇

巖鳥溪魚慣我顔

欲識箇中奇絶處

子規聲裏月窺山

 

서애 유성룡이 을해년(1575년) 추석에 지은 시가 걸려있다.

 

양진암.. 

퇴계 이황의 글씨다..

회재 이언적의 은퇴생활은 퇴계에게 모델이 되었다..

회재는 젊어서 인근 정혜사에서 공부한 적이 있거니와 이곳에 은거할 때도 정혜사 승려들과 교유를 했단다.

원래 성리학은 불교 교리에서 자극받아 시작한 심학(心學)으로서, 마음공부가 선불교의 선수행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수장고에는 회재의 친필저서가 보관 중이고, 

희귀본로 김생, 최치원 등 역대 명필의 석각본 탁본 글씨를 모아 놓은 "해동명적"이 있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간인본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여주 이씨 옥산문중본이다.

또한 옥산서원에는 국보로 지정된 1573년판 삼국사기 완질본이 보관되어 있다.

 

수천권의 책을 보관해놓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산과 계곡을 걸으며 숙고를 하고, 그 자득한 결과를 저술하는 생활..

내가 꿈꾸는 생활이다.

 

계정...

이 글씨는 한석봉이 쓴 글씨다..

***

회재가 계정에 관해 지은 시

 

숲속에 우는 새 듣기에도 즐겁구나

시냇가 경치 따라 집 한채 지엇네

밝은 달 벗을 삼아 술 한잔 기울이니

한칸 옆에는 흰구름이 머무는구나.

喜聞유鳥傍林啼

新構茅첨壓小溪 

獨酌只요明月伴 

一間聊共白雲棲

 

누마루에 앉아 침을 튀겨가며 한참 역사를 논한다..

 

위 편액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적혀있다.

동악 이안눌이 1613년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였는데, 1614년 옥산서원을 방문하여 회재의 후손 구암 이준을 만낫다.

동악은 자신의 증조부 이기가 회재와 얽힌 잘못을 상기하고, 앞으로 우의를 돈독히 할 것을 다짐하고

<동악의 증조부 이기는 회재의 추천으로 형조, 병조판서를 지냈으나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키고 회재를 강계로 귀양보내 죽게한 사람이다>

구암이 지은 정자의 이름을 적벽부의 귀절에서 따 무금정(無禁亭)이라 지어 준다.

그리고 "제무금정(題無禁亭)" 시를 한수 지어 준다.

 

우거진 숲 성밖엔 시내가 휘감아 흐르고

띠로 엮은 소쇄한 정자는 세속과 단절된듯

시내와 바람과 달은 원래 주인이 없으니

온 들판 구름과 산은 모두 그대 것이라 

맑은 물 곧장 내달려 바다로 흘러가고

좌우의 푸른 무지개는 보랏빛 노을과 구별되네

해질녁 피리소리에 고기잡는 아이들 돌아가고

홀로 앉은 물가의 백로떼가 비상함을 바라보네

넓은 들과 곧은 산에 시내가 돌아 흐르고

이곳 높은 대는 고도의 형승이라

몇곡조 긴 피리소리에 술 한통이 제격인데

안개비가 가득한 하늘에 물새가 날아가네

 

다시 세월이 흘러 1768년 동악 이안눌의 5대손 이은이 경상관찰사가 되어 옥산서원에 들렀다가 무금정 정자는 사라진후 동악의 시 편액만 보관된 것을 보고 감회에 젖어 사연을 추가한 편액을 다시 판각하여 건다.

 

계정이 참 절묘하게 자리잡고 잇다.

풍류를 아는 남자로 보인다..

 

독락당을 돌아나오며 회재의 조춘(早春)을 읊어본다.

 

구름과 숲에 천지에 드니 풍경이 새로운데 

물오른 복숭아와 살구꽃이 내 마음을 끄네

짚신과 대지팡이로 이제 나서서

물 건너고 산에 오르니 다시한번 참되도다.

春入雲林景物新

澗邊桃杏總精神

芒鞋竹杖從今始

臨水登山與更眞

***

오늘 도리화가 아니라 벚꽃이 피었을뿐 "여경진(與更眞)은 고금동(古今同)"이라.. 

 

옥산마을에 여강이씨 후손들 공부방으로 귀후재가 있다.

논산 윤증의 집안에 파평윤씨 후손들 공부방인 종학당과 비교된다.

조선시대에는 자손이 잘되고, 4대안에 과거급제자가 이어져야 양반지위가 유지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투자가 벤처사업이나 다를바 없다.

지금도 DNA처럼 이어져 조기유학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오늘 현곡- 흥덕왕릉을 거쳐 옥산서원을 오면서 생각하니,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경주 손씨다.

신라 6성의 하나가 경주 손씨인데, 경주 손씨의 터전은 무량대수촌으로 현재 건천 지역이다.

흥덕왕 시절 경주 손씨 중시조 손순이 취산의 들판에서 석종을 얻은 사연으로 흥덕왕으로부터 효자로 표창을 받고 하사 받은 집이 "현곡(문효사)"에 있다. (https://blog.daum.net/servan/6352150  )

 

한편,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경주 양동마을 내 경주 손씨 종가 서백당에서 조선 세조 때 공신 손소의 딸이 아들을 낳는다. 그 아들이 옥산서원의 주인공인 회재 이언적이다..

 

개나리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옥산서원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들어간다..

경주 양동마을을 포함하면, 회재 이언적의 관련지 2곳이 유네스코 셰계유산에 들어가니 대단하다고 하겠다..

 

일단 시골밥상에서 정갈한 점심을 먹고..

 

슬슬 자계천을 따라 서원으로 걸어간다..

 

하마비 옆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옥산서원이다..

 

회재 이언적은 중종 - 명종 때 문신으로 그의 성리학은 퇴계 이황에게 영향을 주었다.

옥산서원은 그의 사후 후학들이 1572년(선조 5년)에 창건하엿고, 1574년(선조 7년) 서원이름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역락문..

옆에 설명문이 가필되었다.

聞風卽回 望道而來 不亦樂哉 邦之英材

風俗을 듣고 곧 돌아서서, 도를 바라보고 왔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나라의 영재들이여!

 

무변루 누각 아래를 지나면 구인당의 옥산서원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옥산서원..이 글씨는 1839년 화재로 불타자, 헌종이 추사로 하여금 쓰게해서 보낸 것이다..

추사는 54세에 이 글씨를 쓰고 1년뒤 제주도로 귀양간다..

 

무변루..이름은 노수신이 짓고, 한석봉의 글씨다..

 

구인당..

이 글씨도 한석봉의 글씨다..

구인당은 강의와 토론이 벌어지는 강당으로 중심건물이다..

현판에 가필된 글씨를 보면,

心德何損 放而曰遠 一念知反 卽此是本

마음의 덕이 어찌 줄어들겠는가? 

방치하고서는 왈, 멀다 한다. 

한 번 생각하여 돌이킬 줄 알면 곧 이것이 바로 근본이다.

 

구인당 양측 해립재와 양진재는 교수와 유사의 거주공간..

해립재(偕立齋)

敬直義方 內外交相 惟操不忘 天德之光

안으로 敬하고 밖으로 義하여, 안과 밖이 서로 도와 굳게 잡아 잊지 않아야 천덕(天德)이 빛난다

 

양진재(兩進齋)

擇善惟明 反身惟誠 孰重孰輕 聖賢同行

선을 택함은 밝아야 하고 자신을 반성함은 성실하게 하여야 하니,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가벼운가?

성인과 현인이 함께 한다.

 

회재 이언적의 신도비는 호남의 기대승이 글을 짓고,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

동서 분당 전이라 영호충청의 선비들이 함께 모여 이를 추진했으니,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마당 웅덩이에 올챙이가 바글 바글..

이런 소박한 모습이 조선 후기로 가면 황소개구리로 변했다는..ㅎ

 

회재는 자계천에 독락당을 짓고 주변에 4산 오대의 이름을 붙였다..

사산은 도덕산·무학산·화개산·자옥산을 말하고, 오대는 관어대·탁영대·영귀대, 징심대, 세심대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옥산서원 이름도 자옥산에서 따온 것이다..

서원 옆 세심대에 아이들이 물놀이로 즐겁다..

 

세심대 옆 독탕..

여름에 동네 노인이 주변에 안경, 물, 책을 놓아두고 시원한 물놀이를 즐긴단다..ㅎ

이름을 독락탕이라고 하면 되겠다..ㅎ

 

브런치후 고단한 심신을 잠시 쉰다..

배터리 충전후 안강읍으로 간다..흥덕왕릉을 거쳐 옥산서원을 들린다..

북천변의 벚꽃은 한낮이 되니 푸른 하늘에 백옥처럼 빛난다..

 

삼릉 못지않게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

천년의 바람소리가 들려오는듯하다..

 

경주왕릉 소나무의 매력은 쭉쭉벋은 모습이 아니라 구불구불 뒤엉킨듯한 분망함에 잇다.

땅의 기운이나 사람의 기운이 나무에게도 미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솔숲이 마치  얽히고 섥힌 진골 귀족들의 근친혼과 정치알력의 단면을 보여주는듯하다..

 

솔숲사이로 왕릉이 보인다..

 

왕릉에 앞서 아이들이 뛰노는 거대한 귀부가 눈길을 끈다..

 

일단 왕릉을 참배하자..

 

주변에 선 무인상, 문인상이 이국적인 모습이다..

턱수염에 오뚝한 콧날하며..

 

왕릉도 다른 왕릉에 비해 거대하고 당당하다..

석사자상도 사방을 옹위하고 있다.

 

석사자상은 중국것과는 또다른 면모, 엉덩이가 토실한 순딩이 강아쥐를 연상시킨다.

 

 

무덤둘레 십이지신 호석을 둘렀다.

조각도 정교하다.

 

북쪽과 서쪽을 지키는 석사자는 제 몫을 잘 수호하고 잇는데..

 

남쪽 담당인 이넘은 동쪽 사자만 줄창 바라보고 있다..

남쪽 수호는 해찰하고 동쪽 사자를 짝사랑하고 있나보다..

 

**

흥덕왕의 형 헌덕왕은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8년을 통치한다.

흥덕왕은 헌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50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10년간 통치한다.

 

흥덕왕의 왕비..장화부인(정목왕후)는 애장왕과 남매사이이고, 흥덕왕과는 숙질간이다.

정변으로 애장왕이 죽어도 부부사이 금실은 좋았던 모양이다.

즉위초에  왕후가 죽자 이곳에 멋진 능을 조성했다. 그리고 왕이 죽자 이 능에 흥덕왕도 합장되어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앵무새 이야기가 나온다..

흥덕왕 즉위후 왕비가 죽은지 얼마 안되어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이 앵무새 한쌍을 가져왔다. 

오래지 않아 암놈은 죽고 수놈이 슬피 우는지라, 왕이 거울을 앞에 걸어주도록 하였다. 

수놈은 거울 속의 그림자를 짝으로 생각하여 거울을 쪼았는데 그림자임을 알고 슬피 울다가 죽었다.

이에 왕이 노래를 지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실제 흥덕왕은 즉위초에 상처를 하고도 재혼하지 않았다.

마치 고려말 노국공주를 못잊는 공민왕을 연상시키지만, 그는 정치는 무난히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후사를 남지 못한 것이 뒷날 혼란의 시대를 불러온다.

(하긴, 그의 나이 50세에 재혼하여 아들을 얻는다 해도, 성년도 되기 전에 왕이 죽으면 다시 애장왕꼴이 날 수도 있으니  재혼 안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실제로 조선의 선조는 51세 나이에 19살 인목왕후와 결혼하여 영창대군을 낳고 55세에 사망함으로써 광해군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크나큰 실책을 저지른다. 선조의 늦장가는 조선에 큰 민폐가 된 셈이다)

 

경주 기념품으로 석사자상도 만들어 팔았으면 좋겠다..

 

이제 궁금증을 유발하는 귀부로 향하면서 흥덕왕 시대를 생각한다.

그의 치세에 지진, 가뭄, 기근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바다에는 해적이 들끓었다.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여 해적을 소탕하게 하고 그가 얻은 무역이익 중 일부를 세금으로 받아 재정에 충당한다.

그의 묘역에 서있는 무인상 석물의 모델도 장보고와 무역하던 서역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마침, 손순이 기근 속에서 모친봉양을 위해 아들을 파묻으려다 석종을 발견했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포상한다.

효와 충을 강조하여 자신의 정권안정을 기한다.

 

그가 후사없이 죽자, 신라는 왕위계승 분쟁에 휘말리고, 장보고도 이에 휩쓸려 죽게 된다.

장보고의 18년간의 부귀영화도 일장춘몽이 되고, 5년뒤 청해진마저 사라진다..

 

 

 

흥덕왕의 무덤은 웅장하고 정교한 호석도 갖추었는데, 왜 비석을 새우는 귀부는 머리조각도 제대로 못하고 마무리가 엉성할까?

보통 왕릉은 왕의 생존시에 자리를 잡고 축조하기 시작한단다..그리고 실제 흥덕왕 즉위 초에 죽은 왕비의 능으로 만든 것이니 얼마나 잘 만들었겠나?

그러나, 비석은 사후에 후계자가 만들어 주는 법이라..

그의 사후 왕위계승싸움이 벌어지는데, 승리하여 즉위한 희강왕이 1년만에 살해당하고, 민애왕(김명)이 즉위한다.

그러나 1년도 안돼 장보고의 도움을 받은 김우징(신무왕)이 승리하여 신무왕으로 등극하나, 또 1년도 안돼 죽고, 아들 문성왕이 즉위한다..  문성왕도 초기에 3-4번의 반란을 맞아 진압하느라 바쁜 세월을 보낸다.

이렇게 흥덕왕 사후 5-10년간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흥덕왕릉비의 귀부는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비문은 산산조각이 난 것으로 보인다.. 

 

원래 귀부에 비석을 세우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이 홈을 파야 하는데, 흥덕왕 귀부에 이 작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발굴조사 결과, 흥덕왕비석의 비편 59개가 수습되었다.
비편에서 예서체로 '흥덕(興德)'이라 쓰여진 부분이 판독되었고,  '貿易之人'이라는 글자도 확인되고
 '太祖 星漢이라는 글씨도 발견되는데..

태조 성한은 문무왕비문에도 나오는 바, 이른바 훙노왕 후손 김일제라는 논란이 되는 인물이다..
비문의 글씨는 당대 구양순체의 달인 요극일이  썼다고 한다.

 

흥덕왕릉의 석사자와 귀부를 자세히 보니,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저녁 식사후 월지야경을 보러 간다.

차를 몰고 나서니 보문단지- 월성 구간 차도가 만원이다..

현지인 프레미엄을 이용하여 알천찻길을 이용하여 이리저리 하니 월지 700미터 전까지 어프러치..

퍼팅거리에 접근했으니..일단 승객만 차에서 내려 걸어가기로 한다..

 

황룡사 마루길을 걸어 월지로 간다..

 

신라의 미소가 웃는다..

이제 코로나 거리두기 무시하고 이렇게 경주로 몰려들기냐?? ㅎㅎ 

 

몇달전에 왔을 때는 야간개장을 안했는데..

오늘은 야간개장을 무료로 한단다..웬 떡이냐..

 

해설사 목소리가 들리는데..

안압지라는 말은 조선시대 용어이고..신라시대에는 동궁 월지라고 불렀단다..

 

야사꾸라..

구름같기도 하고, 안개같기도 하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누군가의 멘트가 떠오르는 밤이다.

코시국에 누구나 염원했던 광경이 오늘 여기서 벌어진다..

 

꿈과 같이 아름다운

그대와 나의 즐거운 밤

 

월지에 비친 모습은 

안견의 몽유도원도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봄날 꿈결같은 벚꽃의 정원에서 일장춘몽의 추억을 만든다..

웬지 이 노래와 어울릴 것 같다.

https://youtu.be/SAMxBmHzPD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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