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락당에서 계곡 따라 상류로 조금 올라가면 정혜사지가 나온다.

회재 이언적이 젊엇을 때 공부햇던 절이고, 낙향하여 독락정에 은거할 때는 절의 고승들과 교유하엿다고 한다.

 

지금은 절은 멸실되고 13층석탑만 남아있다.

원래 정혜사 자리는 신라 선덕왕 원년(780년)에 당나라 사람 백우경이 망명와서 살던 장소였다.

백우경은 중국 소주지방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이부상서까지 지냇으나 모함에 걸려 신라로 망명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 터에 영월당 만세암을 짓고 살았는데, 수원 백씨의 비조가 된다.

9세기 쯤에 이 터에 절이 세워지고, 독특한 모양의 13층석탑이 세워진다.

 

우리 석탑의 모델은 불국사 석가탑으로 친다.

이와 비교하면 이곳 13층 석탑은 이색적인 모습이다.

 

 

석탑에 다가가자 갑자기 확성기에서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소리가 나와,화들짝 놀랏다는..ㅎㅎ

 

돌아서는 발길을 잡는 끽다거..차 한잔 하고가라는 말씀..

 

차를 찾아 들어간 곳에 차향보다는 꽃향이 사로잡는다.

유채꽃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다화구망(茶花具忘)..

차도 잊고 꽃도 잊고 충만한 마음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에 멀리 스투파 모양의 탑이 보인다..

알아보니 대흥사 사리보탑이란다..

안강읍에는 개성만점의 탑들이 많구나..

 

경주로 오는 길에 만난 형산강가의 금장대.. 

서천과 북천이 합류하는 예기청소.. 경주 출신 소설가 김동리작 무녀도의 배경이 되는 장소다..

https://blog.daum.net/servan/6350520

 

***

1박 2일의 경주 꽃길 여행의 막을 내린다..

하지만, 고속도로 진입차량 행렬을 피해 건천ic로 진입해야한다..

북천하상도로를 이용하여 현곡프로지오 아파트를 스치고 건천으로 가니 기름칠한듯 막히지 않고 쭉쭉 빠진다..

행복하고 만족한 걷기여행이었다.

옥산서원에서 700미터 쯤 자계천을 따라 올라가면 독락정이 있다.

회재 이언적이 명종때 당시 권신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좌천되고, 이후 고향으로 귀향한다.

그의 나이 40세..

고향인 경주 양동마을 무첨당에서 지내면서 이 자옥산 계곡에 독락당을 짓고 수양과 공부를 한다.

그러다가 6년뒤 1537년 김안로가 실각하자 복귀하여 요직에 기용된다.

1545년 을사사화가 터진후 55세나이로 의금부판사직에 물러나 귀향하였으나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귀양간다. 

유배생활 속에서도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에 매진하다가 1553년 63세 나이로 강계유배지에서 사망한다.

퇴계 이황이 회재의 행장을 지었다.

 

원래 이곳에는 아버지 이번이 세운 정자가 있었는데, 이름을 계정이라 고쳐 지었다.

그는 젊어서 근처 정혜사에서 공부한 적도 있었다..

그는 외가집인 경주 손씨 종가 양동마을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외삼촌인 손중돈(성종 때 문신)에게 학문을 배운다.

손중돈은 길재의 학맥을 이은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였으니, 회재는 영남 학맥의 적통을 이은 셈이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한 수제였다..

 

자옥산 아래 벚꽃 핀 한옥마을이 그림같다..

 

독락계정의 글씨가 우아하다..

 

손자들이 독락당 수호를 위해 토지를 출연하고 후손들이 토지를 처분하지 못하게 합의문을 만들었다.

요즘보다 더 법치주의에 밝은 사람들이다..

 

 

독락당은 옥산정사라고도 불린다. 

현판도 2개..

옥산정사의 글씨는 퇴계 이황의 글씨다..

 

전국에 독락당이라는 당호가 많다..

대부분 맹자 진심장구 상에서 나온 '古之賢士何獨不然. 樂其道而忘人之勢'라는 구절을 신조로 삼았다.

"(옛날 어진 왕은 선을 좋아하고 권세를 잊었으니) 옛날 어진 선비들이 어찌 그들만 그렇지 않았겟는가? 도를 즐기고 다른 사람의 권세를 잊었다."

 

이 현판글씨는 아계 이산해의 글씨다..

이산해는 토정 이지함의 조카이고, 동인에서 분파된 북인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냈다..

***

회재의 시 독락(獨樂)을 보자

 

무리 떠나 홀로 사니 누구와 함께 시를 읊나

산새와 물고기가 내 얼굴을 잘 안다오

그 가운데 특별히 아름다운 정경은

두견새 울음 속에 달이 산을 엿볼 때지

離群誰與共吟壇

巖鳥溪魚慣我顔

欲識箇中奇絶處

子規聲裏月窺山

 

서애 유성룡이 을해년(1575년) 추석에 지은 시가 걸려있다.

 

양진암.. 

퇴계 이황의 글씨다..

회재 이언적의 은퇴생활은 퇴계에게 모델이 되었다..

회재는 젊어서 인근 정혜사에서 공부한 적이 있거니와 이곳에 은거할 때도 정혜사 승려들과 교유를 했단다.

원래 성리학은 불교 교리에서 자극받아 시작한 심학(心學)으로서, 마음공부가 선불교의 선수행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수장고에는 회재의 친필저서가 보관 중이고, 

희귀본로 김생, 최치원 등 역대 명필의 석각본 탁본 글씨를 모아 놓은 "해동명적"이 있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간인본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여주 이씨 옥산문중본이다.

또한 옥산서원에는 국보로 지정된 1573년판 삼국사기 완질본이 보관되어 있다.

 

수천권의 책을 보관해놓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산과 계곡을 걸으며 숙고를 하고, 그 자득한 결과를 저술하는 생활..

내가 꿈꾸는 생활이다.

 

계정...

이 글씨는 한석봉이 쓴 글씨다..

***

회재가 계정에 관해 지은 시

 

숲속에 우는 새 듣기에도 즐겁구나

시냇가 경치 따라 집 한채 지엇네

밝은 달 벗을 삼아 술 한잔 기울이니

한칸 옆에는 흰구름이 머무는구나.

喜聞유鳥傍林啼

新構茅첨壓小溪 

獨酌只요明月伴 

一間聊共白雲棲

 

누마루에 앉아 침을 튀겨가며 한참 역사를 논한다..

 

위 편액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적혀있다.

동악 이안눌이 1613년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였는데, 1614년 옥산서원을 방문하여 회재의 후손 구암 이준을 만낫다.

동악은 자신의 증조부 이기가 회재와 얽힌 잘못을 상기하고, 앞으로 우의를 돈독히 할 것을 다짐하고

<동악의 증조부 이기는 회재의 추천으로 형조, 병조판서를 지냈으나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키고 회재를 강계로 귀양보내 죽게한 사람이다>

구암이 지은 정자의 이름을 적벽부의 귀절에서 따 무금정(無禁亭)이라 지어 준다.

그리고 "제무금정(題無禁亭)" 시를 한수 지어 준다.

 

우거진 숲 성밖엔 시내가 휘감아 흐르고

띠로 엮은 소쇄한 정자는 세속과 단절된듯

시내와 바람과 달은 원래 주인이 없으니

온 들판 구름과 산은 모두 그대 것이라 

맑은 물 곧장 내달려 바다로 흘러가고

좌우의 푸른 무지개는 보랏빛 노을과 구별되네

해질녁 피리소리에 고기잡는 아이들 돌아가고

홀로 앉은 물가의 백로떼가 비상함을 바라보네

넓은 들과 곧은 산에 시내가 돌아 흐르고

이곳 높은 대는 고도의 형승이라

몇곡조 긴 피리소리에 술 한통이 제격인데

안개비가 가득한 하늘에 물새가 날아가네

 

다시 세월이 흘러 1768년 동악 이안눌의 5대손 이은이 경상관찰사가 되어 옥산서원에 들렀다가 무금정 정자는 사라진후 동악의 시 편액만 보관된 것을 보고 감회에 젖어 사연을 추가한 편액을 다시 판각하여 건다.

 

계정이 참 절묘하게 자리잡고 잇다.

풍류를 아는 남자로 보인다..

 

독락당을 돌아나오며 회재의 조춘(早春)을 읊어본다.

 

구름과 숲에 천지에 드니 풍경이 새로운데 

물오른 복숭아와 살구꽃이 내 마음을 끄네

짚신과 대지팡이로 이제 나서서

물 건너고 산에 오르니 다시한번 참되도다.

春入雲林景物新

澗邊桃杏總精神

芒鞋竹杖從今始

臨水登山與更眞

***

오늘 도리화가 아니라 벚꽃이 피었을뿐 "여경진(與更眞)은 고금동(古今同)"이라.. 

 

옥산마을에 여강이씨 후손들 공부방으로 귀후재가 있다.

논산 윤증의 집안에 파평윤씨 후손들 공부방인 종학당과 비교된다.

조선시대에는 자손이 잘되고, 4대안에 과거급제자가 이어져야 양반지위가 유지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투자가 벤처사업이나 다를바 없다.

지금도 DNA처럼 이어져 조기유학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오늘 현곡- 흥덕왕릉을 거쳐 옥산서원을 오면서 생각하니,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경주 손씨다.

신라 6성의 하나가 경주 손씨인데, 경주 손씨의 터전은 무량대수촌으로 현재 건천 지역이다.

흥덕왕 시절 경주 손씨 중시조 손순이 취산의 들판에서 석종을 얻은 사연으로 흥덕왕으로부터 효자로 표창을 받고 하사 받은 집이 "현곡(문효사)"에 있다. (https://blog.daum.net/servan/6352150  )

 

한편,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경주 양동마을 내 경주 손씨 종가 서백당에서 조선 세조 때 공신 손소의 딸이 아들을 낳는다. 그 아들이 옥산서원의 주인공인 회재 이언적이다..

 

개나리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옥산서원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들어간다..

경주 양동마을을 포함하면, 회재 이언적의 관련지 2곳이 유네스코 셰계유산에 들어가니 대단하다고 하겠다..

 

일단 시골밥상에서 정갈한 점심을 먹고..

 

슬슬 자계천을 따라 서원으로 걸어간다..

 

하마비 옆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옥산서원이다..

 

회재 이언적은 중종 - 명종 때 문신으로 그의 성리학은 퇴계 이황에게 영향을 주었다.

옥산서원은 그의 사후 후학들이 1572년(선조 5년)에 창건하엿고, 1574년(선조 7년) 서원이름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역락문..

옆에 설명문이 가필되었다.

聞風卽回 望道而來 不亦樂哉 邦之英材

風俗을 듣고 곧 돌아서서, 도를 바라보고 왔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나라의 영재들이여!

 

무변루 누각 아래를 지나면 구인당의 옥산서원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옥산서원..이 글씨는 1839년 화재로 불타자, 헌종이 추사로 하여금 쓰게해서 보낸 것이다..

추사는 54세에 이 글씨를 쓰고 1년뒤 제주도로 귀양간다..

 

무변루..이름은 노수신이 짓고, 한석봉의 글씨다..

 

구인당..

이 글씨도 한석봉의 글씨다..

구인당은 강의와 토론이 벌어지는 강당으로 중심건물이다..

현판에 가필된 글씨를 보면,

心德何損 放而曰遠 一念知反 卽此是本

마음의 덕이 어찌 줄어들겠는가? 

방치하고서는 왈, 멀다 한다. 

한 번 생각하여 돌이킬 줄 알면 곧 이것이 바로 근본이다.

 

구인당 양측 해립재와 양진재는 교수와 유사의 거주공간..

해립재(偕立齋)

敬直義方 內外交相 惟操不忘 天德之光

안으로 敬하고 밖으로 義하여, 안과 밖이 서로 도와 굳게 잡아 잊지 않아야 천덕(天德)이 빛난다

 

양진재(兩進齋)

擇善惟明 反身惟誠 孰重孰輕 聖賢同行

선을 택함은 밝아야 하고 자신을 반성함은 성실하게 하여야 하니,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가벼운가?

성인과 현인이 함께 한다.

 

회재 이언적의 신도비는 호남의 기대승이 글을 짓고,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

동서 분당 전이라 영호충청의 선비들이 함께 모여 이를 추진했으니,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마당 웅덩이에 올챙이가 바글 바글..

이런 소박한 모습이 조선 후기로 가면 황소개구리로 변했다는..ㅎ

 

회재는 자계천에 독락당을 짓고 주변에 4산 오대의 이름을 붙였다..

사산은 도덕산·무학산·화개산·자옥산을 말하고, 오대는 관어대·탁영대·영귀대, 징심대, 세심대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옥산서원 이름도 자옥산에서 따온 것이다..

서원 옆 세심대에 아이들이 물놀이로 즐겁다..

 

세심대 옆 독탕..

여름에 동네 노인이 주변에 안경, 물, 책을 놓아두고 시원한 물놀이를 즐긴단다..ㅎ

이름을 독락탕이라고 하면 되겠다..ㅎ

 

브런치후 고단한 심신을 잠시 쉰다..

배터리 충전후 안강읍으로 간다..흥덕왕릉을 거쳐 옥산서원을 들린다..

북천변의 벚꽃은 한낮이 되니 푸른 하늘에 백옥처럼 빛난다..

 

삼릉 못지않게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

천년의 바람소리가 들려오는듯하다..

 

경주왕릉 소나무의 매력은 쭉쭉벋은 모습이 아니라 구불구불 뒤엉킨듯한 분망함에 잇다.

땅의 기운이나 사람의 기운이 나무에게도 미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솔숲이 마치  얽히고 섥힌 진골 귀족들의 근친혼과 정치알력의 단면을 보여주는듯하다..

 

솔숲사이로 왕릉이 보인다..

 

왕릉에 앞서 아이들이 뛰노는 거대한 귀부가 눈길을 끈다..

 

일단 왕릉을 참배하자..

 

주변에 선 무인상, 문인상이 이국적인 모습이다..

턱수염에 오뚝한 콧날하며..

 

왕릉도 다른 왕릉에 비해 거대하고 당당하다..

석사자상도 사방을 옹위하고 있다.

 

석사자상은 중국것과는 또다른 면모, 엉덩이가 토실한 순딩이 강아쥐를 연상시킨다.

 

 

무덤둘레 십이지신 호석을 둘렀다.

조각도 정교하다.

 

북쪽과 서쪽을 지키는 석사자는 제 몫을 잘 수호하고 잇는데..

 

남쪽 담당인 이넘은 동쪽 사자만 줄창 바라보고 있다..

남쪽 수호는 해찰하고 동쪽 사자를 짝사랑하고 있나보다..

 

**

흥덕왕의 형 헌덕왕은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8년을 통치한다.

흥덕왕은 헌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50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10년간 통치한다.

 

흥덕왕의 왕비..장화부인(정목왕후)는 애장왕과 남매사이이고, 흥덕왕과는 숙질간이다.

정변으로 애장왕이 죽어도 부부사이 금실은 좋았던 모양이다.

즉위초에  왕후가 죽자 이곳에 멋진 능을 조성했다. 그리고 왕이 죽자 이 능에 흥덕왕도 합장되어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앵무새 이야기가 나온다..

흥덕왕 즉위후 왕비가 죽은지 얼마 안되어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이 앵무새 한쌍을 가져왔다. 

오래지 않아 암놈은 죽고 수놈이 슬피 우는지라, 왕이 거울을 앞에 걸어주도록 하였다. 

수놈은 거울 속의 그림자를 짝으로 생각하여 거울을 쪼았는데 그림자임을 알고 슬피 울다가 죽었다.

이에 왕이 노래를 지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실제 흥덕왕은 즉위초에 상처를 하고도 재혼하지 않았다.

마치 고려말 노국공주를 못잊는 공민왕을 연상시키지만, 그는 정치는 무난히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후사를 남지 못한 것이 뒷날 혼란의 시대를 불러온다.

(하긴, 그의 나이 50세에 재혼하여 아들을 얻는다 해도, 성년도 되기 전에 왕이 죽으면 다시 애장왕꼴이 날 수도 있으니  재혼 안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실제로 조선의 선조는 51세 나이에 19살 인목왕후와 결혼하여 영창대군을 낳고 55세에 사망함으로써 광해군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크나큰 실책을 저지른다. 선조의 늦장가는 조선에 큰 민폐가 된 셈이다)

 

경주 기념품으로 석사자상도 만들어 팔았으면 좋겠다..

 

이제 궁금증을 유발하는 귀부로 향하면서 흥덕왕 시대를 생각한다.

그의 치세에 지진, 가뭄, 기근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바다에는 해적이 들끓었다.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여 해적을 소탕하게 하고 그가 얻은 무역이익 중 일부를 세금으로 받아 재정에 충당한다.

그의 묘역에 서있는 무인상 석물의 모델도 장보고와 무역하던 서역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마침, 손순이 기근 속에서 모친봉양을 위해 아들을 파묻으려다 석종을 발견했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포상한다.

효와 충을 강조하여 자신의 정권안정을 기한다.

 

그가 후사없이 죽자, 신라는 왕위계승 분쟁에 휘말리고, 장보고도 이에 휩쓸려 죽게 된다.

장보고의 18년간의 부귀영화도 일장춘몽이 되고, 5년뒤 청해진마저 사라진다..

 

 

 

흥덕왕의 무덤은 웅장하고 정교한 호석도 갖추었는데, 왜 비석을 새우는 귀부는 머리조각도 제대로 못하고 마무리가 엉성할까?

보통 왕릉은 왕의 생존시에 자리를 잡고 축조하기 시작한단다..그리고 실제 흥덕왕 즉위 초에 죽은 왕비의 능으로 만든 것이니 얼마나 잘 만들었겠나?

그러나, 비석은 사후에 후계자가 만들어 주는 법이라..

그의 사후 왕위계승싸움이 벌어지는데, 승리하여 즉위한 희강왕이 1년만에 살해당하고, 민애왕(김명)이 즉위한다.

그러나 1년도 안돼 장보고의 도움을 받은 김우징(신무왕)이 승리하여 신무왕으로 등극하나, 또 1년도 안돼 죽고, 아들 문성왕이 즉위한다..  문성왕도 초기에 3-4번의 반란을 맞아 진압하느라 바쁜 세월을 보낸다.

이렇게 흥덕왕 사후 5-10년간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흥덕왕릉비의 귀부는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비문은 산산조각이 난 것으로 보인다.. 

 

원래 귀부에 비석을 세우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이 홈을 파야 하는데, 흥덕왕 귀부에 이 작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발굴조사 결과, 흥덕왕비석의 비편 59개가 수습되었다.
비편에서 예서체로 '흥덕(興德)'이라 쓰여진 부분이 판독되었고,  '貿易之人'이라는 글자도 확인되고
 '太祖 星漢이라는 글씨도 발견되는데..

태조 성한은 문무왕비문에도 나오는 바, 이른바 훙노왕 후손 김일제라는 논란이 되는 인물이다..
비문의 글씨는 당대 구양순체의 달인 요극일이  썼다고 한다.

 

흥덕왕릉의 석사자와 귀부를 자세히 보니,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저녁 식사후 월지야경을 보러 간다.

차를 몰고 나서니 보문단지- 월성 구간 차도가 만원이다..

현지인 프레미엄을 이용하여 알천찻길을 이용하여 이리저리 하니 월지 700미터 전까지 어프러치..

퍼팅거리에 접근했으니..일단 승객만 차에서 내려 걸어가기로 한다..

 

황룡사 마루길을 걸어 월지로 간다..

 

신라의 미소가 웃는다..

이제 코로나 거리두기 무시하고 이렇게 경주로 몰려들기냐?? ㅎㅎ 

 

몇달전에 왔을 때는 야간개장을 안했는데..

오늘은 야간개장을 무료로 한단다..웬 떡이냐..

 

해설사 목소리가 들리는데..

안압지라는 말은 조선시대 용어이고..신라시대에는 동궁 월지라고 불렀단다..

 

야사꾸라..

구름같기도 하고, 안개같기도 하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누군가의 멘트가 떠오르는 밤이다.

코시국에 누구나 염원했던 광경이 오늘 여기서 벌어진다..

 

꿈과 같이 아름다운

그대와 나의 즐거운 밤

 

월지에 비친 모습은 

안견의 몽유도원도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봄날 꿈결같은 벚꽃의 정원에서 일장춘몽의 추억을 만든다..

웬지 이 노래와 어울릴 것 같다.

https://youtu.be/SAMxBmHzPDw

 

 

이무기능선 걷기를 마치고, 헌강왕릉 진달래꽃을 보러간다..

입구는 벚꽃이 장식하는데, 왕릉 뒤로는 진달래밭이다..

여기 사람은 참꽃밭이라고 하더만..ㅎ

 

헌강왕..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로 유명한 경문왕의 장자..

진성여왕의 큰오빠..

신라의 절정기..

성안에 초가집이 없고 기와집 처마와 담이 이어지고, 숯으로 밥을 해먹던 시절..

처용가 불릴 정도로 국제교역도 왕성하고 흥청망청한 사회분위기..

송악에서는 왕건이 태어나고, 견훤은 신라 중앙군 병사로 복무중이던 시절..

당나라에서 최치원이 귀국하여 계원필경을 왕에게 받치던 시절..

총명하고 독서을 좋아했던 왕이 재위 5년만에 죽자, 나라는 혼란해지고 진성여왕이 등극하지만 역부족..

후삼국으로 이어진다..

 

조선시대로 비정하면,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를 연상시킨다.

총명하여 춤과 음악으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새로운 중흥을 꿈꾸던 젊은 왕자..

요절하여 모든 꿈이 사라진다는..

 

진달래는 짧으면서 화려한 화양연화의 호시절을 연상시킨다..

헌강왕의 5년,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4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고위봉 정상에서 열반재로 하산한다.

내려가는 길에 녹원식당에서 신선주를 한잔한다고 해서 입맛부터 다신다.

그래, 진달래꽃 띄워 한잔해야징..ㅎㅎ

 

내려가다 보니, 보문들판 남촌에 경지재가 보인다.

좋은 아지트가 있어 이리 좋은 곳을 즐겁게 다닐 수 있다는거..ㅎ

 

금오봉을 배경으로 이무기능선이 펼쳐지고..

이무기 등짝마다 백설기에 박힌 콩처럼 등산객이 봄날을 즐기고 있다..ㅎ

 

 

진달래는 고명처럼 곳곳에 피어난다..

 

열반재에서 천룡재 방향으로 내려간다..

이무기 능선 하산시 반듯이 들려하는 밥집이란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이 꽃대궐을 이루는 녹원식당..

 

똘이도 해피하단다..

잘되는 식당 집 개는 짖지도 않는다..ㅎ

 

자목련, 백목련, 개나리가 만화방창..

천리포 수목원에 가지 않아도 되겠다..ㅎ

 

주말과 일욜일은 연중무휴이고, 주중 비오는 날에는 쉴 때있으니 전화확인바란단다..ㅎ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라..ㅎ

 

밥상이 떡하니 나오고, 신선주까정 곁들이니..

진달래 띄우고 신선주 건배!!

 

 

누구냣! 진달래 두잎 띄운 사람은?? ㅎ

남은 진달래 비빔밥 위에 고명으로 얹어서 꽃밥 만들어 먹는다..ㅎ

 

신선주 꽃술 2잔에 얼큰해져 나른 한 발길로 천룡사로 나간다,

 

탑위 장식은 인도불교의 흔적을 보여준다.

원래 인도 스투파는 사각 기단위에 둥근 사발모양 탑을 설치하고 그 위에 일산을 꼽는단다..

그런데, 중국으로 들어오면서 탑 상륜부 장식이 조금 변형되었다..

 

천룡사는 황룡사 9층탑, 사천왕사 처럼 호국사찰로 창건되었단다.

그래서 당나라 예부시랑 악붕구가 사신으로 와서 보고, 이절이 허물어지면 신라가 망할 거라고 예언했단다.

그후 최승로(최치원의 손자)의 손자 최제안이 중수했다.

그런데 조선 순조 때 유생들이 불을 질러 1819년 완전 소실되었단다.

그 당시 조실스님은 불에 타서 순교하고, 시자는 화상을 입었다. 

 

이 천룡사 절터는 현재 문화재 발굴작업을 하고 있고, 법륜 스님이 복원불사를 추진하고 있다.

법륜 스님의 법맥을 거슬러가면 도문 - 종헌 - 용성로 연결되는데, 

용성스님는 3.1 독립선언 33인 대표의 한사람이다.

그는 남원 덕밀암 혜월화상 문하로 출가했다.

혜월화상은 동학교주 최제우와 친구 사이로, 최제우의 도피생활을 도왔던 인연이 있었다.

용성스님은 천룡사 방화사건시 화상을 입은 시자스님을 9년간 시봉한 인연이 있었다.

이런 인연의 연기로 용성스님은 동학 후계자 손병희를 만나 3.1 독립선언에 가담하게 된다.

용성스님이 천룡사 복원불사를 유훈으로 남겨 4세 제자인 법륜스님이 이를 이어받아 불사를 추진중이다.

그는 말한다.

"새로운 통일 대한민국이 들어서게 하려면 이제 이 절이 다시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남북의 평화가 도래하고 통일도 이룰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믿음이 곧 원이 되는 것이니까요." 

 

 

생각하고 말하고 믿으면 이루어진다..

 

노랑, 하양, 초록의 삼색기는 봄 혁명군의 깃발이다...

 

열반재를 넘어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꽃술에 발걸음이 흔들리고, 눈꺼풀이 무거워져도 마음은 가볍다..

 

관음사의 해프닝..

동행들이 관음사 해우소에 들렀는데..

관음사 보살이 궁시렁거린다..

"여기 화장실은 등산객이 쓰는데가 아니요. 한번 청소차부르는데 30만원이나 들어요.."

급식공덕, 급수공덕이 크면 급똥공덕도 얼마나 클까마는.. 절 인심이 원.. 

 

아하?? 이래서 저 아래에 "천우사 화장실" 표시를 크게 써놨구나..ㅎㅎ

 

다시 돌아온 용장골 계곡에 자리깔고 누워 꽃술의 수면을 날려버리고 간다..

벚꽃의 합창이 우렁차다..

 

 

<오늘 걷기> 용장골주차장 - 이무기능선 - 고위봉 - 열반재 - 천룡사 - 열반재 - 용장골주차장 약 5km

경주에 꽃이 피었다는 소식에 1박2일 경주 꽃길여행을 떠난다.

건천ic를 지나자 여근곡에 벚꽃을 가득 풍은 오봉산이 손짓한다.

 

큰일났다.

꽃이 만개할 참이다..

 

용장계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안내판을 들여다 본다.

오늘 코스는 남산에서 제일 상급인 이무기 능선을 탄다.

용장골 주차장 - 천우사 - 이무기 능선 - 고위봉 - 열반재 - 녹원식당- 천룡사 - 열반재 - 원점회귀 약 5km

 

경주 남산 코스를 분류하자면, 

1) 초급 코스 : 삼릉 - 금오봉 구간..

2) 중급코스 ;  통일전 - 금오봉 - 용장사지 - 칠불암 코스

3) 상급코스 : 오늘 가는 이무기능선 코스..

 

주차장에서 뒷길로 주택가를 지나 등산로로 접근한다.

장점은 사람이 적다.

 

저 아래 길이 정식 코스다..ㅎ

 

슬슬 진달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몇년전 진달래 피는 시절에 용장사지를 넘어 칠불암 코스를 갔었다.

https://blog.daum.net/servan/6350506  ,   https://blog.daum.net/servan/6350507

진달래 먹고 즐겁게 걷던 시간이었다.

 

고위봉 표시로 간다.

그런데, "천우사 화장실"에 유의하라.. 내려올 때 관음사에서 잔소리 듣는 수가 있다..ㅎㅎ

 

요 계곡을 넘어서면 본격적인 이무기 능선이 시작된다.

 

처음 이무기 능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렇게 반문했다.

"공룡능선보다는 쉽겠지요??"

 

그런데 대뜸 바위 길을 올라서기 시작한다..

 

바위길을 엉금엉금 기어 오르다가 잠시 쉰다.

가이드 맡은 경지재 선생이 웃으면서 말한다.

"여지껏 같이온 멤버 중에 가장 짧은 거리에서 쉬네요.." 

 

애고..내 능력이 그런걸..ㅎㅎ

그런데, 그 순간 119복장의 남자가 잠시 자리를 피해달란다..

부상자 호송해서 내려오는 중이란다

벌써 부상을??

정말 발에 기부스한 사람이 업혀서 내려온다..

음.. 이무기 능선, 사람 겁 지대루 주는구나..ㅎㅎ

 

우리도 조심 조심 올라간다..

 

틈틈히 계단이 있기 망정이지, 아니면 정말 악산이었겠다..

남산이 아니라 남악산으로 불러야..ㅎㅎ

 

주차장에서 고위봉 정상까지 고작 1.7km인데, 가다가 쉬기를 반복한다..ㅎ

 

진달래가 자주 나와 위로해주길 망정이지, 아니면 유격훈련깜이라..

 

잠시 금오봉과 용장사지 능선을 바라본다..

저 아래 용장골 주차장은 엄청 작아졌다..

 

여기가 이무기 등뼈쯤될라나..ㅎ

 

고위봉이 아직 저만치 높다..

 

이무기 어깨쯤 되는 곳에 진달래가 탐스럽게 피었다..

 

진달래 시즌에 경주 남산이 정답이다..

 

이무기 턱쯤 되는 곳에 오늘의 난코스..

줄잡고 오르기..

선두 여성들이 줄잡고 씩씩하게 오른다..

이런거 보면, 이젠 여자도 군대가도 된다고 본다..ㅎㅎ

 

여자도 잘 올라가는데, 정작 내가 빌빌거리자, 각종 훈수가 난무한다..

이무기도 비웃는다..

어허 감히..ㅎㅎ

 

오늘의 최고 뷰포인트에 섰다.

이무기 고삐를 쥐었다고나할까??

 

남산위에 제일 이쁜 소나무..

 

마지막 고바위에 올라 진달래를 물에 띄워 마신다..

꽃과 하나되어 더 아름다운 봄날..

 

고위봉에 올랐다.

해발 494m 지만, 이무기능선을 끼고 베이글한 파워를 자랑한다.. 

 

행복한 걷기는 하산시 기다리는 진달래주 기대심으로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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