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금도 캠핑 2일째, 아침 식사후에 고흥군 풍양면 송정마을로 간다..

마을회관 앞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간다.

 

천등산, 딸각산 표지로 가는데, 마을길이 헷갈려 주민에게 물어보니 우측 산쪽 길로 가란다..

네이버 등산로와 비교하며 올라가 등산 입구를 찾는다..

 

멀리 별학산이 보는 들판..온통 마늘 수확하느라 바쁘다..

마늘 살 수 있느냐 물으니, 집단출하 해서 현장에서는 못판단다..

집단 출하장으로 가보란다..<하산후 가보았는데..반응이???>

 

등산로 입구에는 찔레꽃과 아카시 꽃이 십일간의 허니문을 즐기고 잇었다..

찔레꽃 4부곡을 들으며 간다.

뒤따라 오는 일행이 노래에 관심을 보이길래, 여기에 다시 올린다..

https://blog.daum.net/servan/6352279

 

만화방창이요 백화제방이라는데,

때죽나무..스노우벨도 가만있을  수 없어 종을 들고 나섰다..ㅎ

 

적대봉보다는 수월하게 능선에 오르니 바다 조망이 시원하다..

여기서도 거금대교..인기 좋다..

 

딸각산, 달각산, 월각산..이넘의 정체는 무엇인가??

달각산을 월각산이라고도 부르는데 돌을 밟고 산을 오를때 딸각딸각 소리가 난다고 해서 딸각산이라고 부른다는 썰이 있다.

생각컨대, 이곳 사람들은 딸각산으로 부르는데, 한자어로 표시할 때는 달각, 월각(月角)으로 표시한 것이 아닌가한다..

네이버 지도에 보면, 이곳에 별학산과 벼락산이 다른 곳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시골에서는 벼락산이라고 부른 것을 한자어로 별학산(別鶴山)로 표기하면서 다른 곳인 것처럼 표시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네이버 지도 너무 믿지마라고 충고한다..오늘도 그런 상황에 부닥쳤다..(사연은 하산장면에서 나옴)

 

풍남항, 계도, 거금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달각산 정상에서 천등산을 바라본다..

달각산 정상비는 없고, 바위에 숯으로 글씨만 써있다..

딸각산 >> 달각산 >>월각산

 

달각산을 내려가 천등산으로 가는 길에서 남미 테푸이를 가는 느낌을 받는다..

 

천등산 정상부의 테푸이 능선 <저 바위 이름이 네이버 지도에는 벼락산이라고 표기하고 잇지만, 잘못된 것이다. 이름이 없다면 앞으로 테푸이 능선이라고 부르자..ㅎ>

 

임도 사거리에서 철쭉동산으로 가는 임도 길은 남파랑길 69코스 중 일부 구간이다..

 

찔레꽃이 지천인 오늘.. 

일행이 찔레순을 먹으라고 준다..

이연실의 "찔레꽃" 가사에

"찔레꽃 하얀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날 가만이 따먹었다오"

하던데, 꽃이 아니고 순이라고???

 

찔레꽃은 먹기 전에 그 향기가 상쾌하나 막상 입안에 들어가면 틉틉해 맛이 별로 없다.

그래서 찔레꽃보다 찔레순을 잘 먹는다.
연한 찔레 순은 보릿고개 시절 아이들의 요긴한 간식거리였단다..

 

일행이 찔레순 처음 먹어보냐고 묻는다..

"우리집은 읍내 살아서 보리밥은 먹었을지언정 찔레순을 안 먹었슈~~ "

 

철쭉공원에 도착..참외와 간식을 먹으며..

맞은편 월각산(딸각산)을 바라본다..

 

우리를 기다려준것 같은 철쭉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여보게 벽전(碧田)..철쭉 시좀 지어주게.. 그 시로 송가인 노래 만들어 대박나면 을메나 좋을까? ㅎㅎ

 

이 데크에서 비박하면 좋겠다..

차로 바로 아래 철쭉공원까지 올라올 수있으니..

 

뒤로 철쭉공원 너머로 우마장산, 우측으로 가화제, 유리도가 보인다.. 

 

천등산(天登山)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다..

잠시 쉬면서 점심으로 샌드위치와 게맛살을 먹는다..

 

이제 정상을 지나 테푸이 능선의 암릉을 지난다..

스릴, 서스펜스 만점의 걷기

 

 

앞을 보니 뾰족봉으로 모두 올라가네..헐..

 

길은 점입난국인데, 섬노린재는 웃고만 있다..

누가 오라켔는교??

 

난국에 오면 신나는 동행..

운전도 난코스와 도선 담당이다..ㅎ

 

테푸이 능선에서 내 사진기를 가져간 드림빌더가 찍은 장면..

천길 낭떨어지다..

 

이런 바위 능선을 엉금 엉금 기어서 가는데..

 

 

이런 칼바위능선을 만났다..

선두는 이리로 넘어갔단다..

나는 못가네..

정신 바짝차리고 살펴보니..아래로 편한 길이 있더라..

원래 약하고 게으른 사람이 유틸리티와 도구, 기계를 만드는 법이다..ㅎ 

 

이제 하산길이다..

근데 우연히 찍은 임도길.. 이길로 걸어 갈줄은 이때까지 생각도 못했다..

 

드디어 임도길과 만났다..

네이버 지도상으로는 이쯤에 저 아래 사동저수지로 바로 내려가는 등산로 표시가 잇다.

하지만, 임도가 개설 공사를 하면서 길이 사라진 모양이다..

 

한참을 길을 찾다가 지나가는 싸이클꾼에게 물어보니, 하산 등산로는 없고, 임도따라 쭈욱 4km 가야 한단다..

싸이클꾼에게 선두에게 전달 좀 해달라니, 알겠다고 하고 떠난다.

나중에 들으니, 싸이클꾼이 제데로 잘 상황설명을 해주었다고 한다..감사합니다..ㅎ

 

이제 맘편히 털레 털레 내려간다..

 

임도삼거리 정자에서 보니, 테푸이능선을 지나서 이곳으로 하산하는 갈림길이 있었다..

이곳으로 하산하는 것이 정답이다..

 

<오늘 걷기> 송정마을회관 - 딸각산(월각산)- 임도사거리 - 철쭉동산 - 정상 - 테푸이능선 - 임도 - 정자 - 사동저수지    약 10km

 

하산후에 도덕면소재지 학동마을 마늘 집하장으로 갔다..

마늘 소매는 안된다고 거절당했다..

아니, 지역특산품을 관광객에게 좀 팔면 안되나?? 

지나가다 보니 양파 밭 수확후 남겨진 낟알 주워가면 고발한다고 써있다..

참..고흥 인심 야박하다..

잘 나갈 때 잘해야 오래간다..

 



부여 충화면 팔충사..

백제의 마지막을 장식한 성충, 흥수, 계백..

그리고 부흥 운동에 앞장선 복신, 도침, 해오화상, 곡나진수, 억레복류..등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곳 충화면 지역은 계백의 전설이 많다..

계백은 혜오화상으로부터 무예를 배웠다고 한다..

충화면 천당리에는 계백의 고향이라는  표뜸[標村]’이라고도 불리는 상천(上天)마을이 있으며,

천등산 마루 동북쪽 정상에는 계백이 수련을 했다는 토굴터와 수련하면서 물을 먹었다는 백충대 우물터가 남아 있단다.

또한 계백이 수련할 때 바위를 디딘 곳에 자국이 생겼다는 장수 발자국 바위 등이 전해지고 있단다..


**지나다 보니, 천당리에서 천등산을 거쳐 서동요테마공원까지 트레킹 코스 표지도 있다..



사당의 주련을 읽어본다..


이충규간계옥성심

수유사사불변소심

사군신도살신호국

사승일패중과부적


충성으로 간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로하고

비록 죽을지언정 마음을 변치않고

임금을 섬기는 신하의 길은 몸을 받쳐 나라를 지킴이니

4승 1패이나 중과부적으로 당해내지 못했네..




4승1패는 계백장군의 황산벌 싸움을 말하는가?

김유신이 귀족의 아들인 화랑 반굴과 관창을 보내 전사를 불사하는 심리전을 전개하여 사기를 돋우워 총공세를 취하자..

5만의 신라군을 당하지 못하고 계백은 전사한다..



복신은 무왕의 조카로 부여, 공주가 함락되고 의자왕 등 왕족이 당으로 끌려가자, 주류성에서 도침 등과 부흥운동의 깃발을 올린다.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을 모셔와 왕으로 옹립한다..

한때 부흥운동 세력이 부여, 공주를 수복할 정도로 기세를 올리자, 나당이 증원군을 파견하여 격돌이 벌어진다.

<참고로 복신은 부여군 은산면에서 2년에 한번 씩 열리는 은산별신제의 장군신이다.>


그무렵 왜는 국력을 모아 백제 구원군을 파병한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성립하기전 400척 전선에 3만명의 군대를 파병한 이유가 무엇일까?


1설, 왜 조정이 당시 백제의 22개 담로 중 하나였기 때문

2설, 왜 조정과 백제 왕실은 피를 나눈 형제국가였기 때문

3설, 백제가 왜의 속국이어서 지원하고, 장차 당나라의 왜 침입을 선제 방어하기 위해

4설, 동맹국의 의리를 지키위해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의 전성기 때 판옥선이 100여척이고 수군이 1만여명이었다는 것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그 1000년 전인 663년에 400척에 3만명이라는 것은 왜 조정의 국력을 다 쏟은 것이라고 보인다.

지금도 월남전 파병이나 이라크에 소규모 파병에도 국론이 분열되는 상황인데, 그 당시 모든 국력을 쏟아 부은 것은  

백제와 왜 사이에 피치 못할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에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것은 피를 나눈 관계일 가능성이 많다.

단순히 동맹관계 정도에서 할 수 있는 성의를 넘은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1설이나 2설이 맞는다고 본다..



그러나, 백촌강 전투는 백제, 왜 연합군의 참패로 끝난다..

그리고 백제의 부흥운동도 저물었다..

그때 수많은 백제 귀족들이 왜로 탈출한다. 마치 베트남 멸망후 보트피풀 같은 상황이 아니었을까?


곡나진수

달솔 곡나진수도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주류성이 함락되자  좌평 여자신(餘自信),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억례복류(憶禮福留) 등과 함께 왜로 탈출한다.

671년 왜 조정에서 대산하(大山下) 벼슬을 받는다.


억례복류

달솔출신, 쿠슈 방어를 위해 달솔 사비복부(四比福夫)과 함께 백제식 산성을 쌓는다. 대산하 벼슬을 받았다..

그의 후손은 이시노무라치(石野連)씨가 되어 수공업에 종사한다.


목소귀자

달솔, 왜에서 대산하(大山下) 벼슬을 받고  덴지(天智) 천왕 아들인 오오토모(大友) 태자의 빈객이 되었다.


여자신

백제가 멸망할 무렵에 당시 관등은 달솔. 

백제부흥운동에서 맹활약을 하여 백제 사람들이 귀실복신과 함께 '좌평(佐平)'으로 높여 불렀다고 한다.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패퇴하자, 동년 9월 24일에 여자신은 일본 수군과 함께 탈출해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 등과 함께 왜로 들어갔다.

669년, 여자신, 귀실집사 등 백제 유민 700명과 함께 일본 간자키 군의 서남쪽에 옮겨 살게 되었다.

671년 정월, 사택소명과 함께 종 4위 대금하(大錦下)의 관직을 제수받고 법관대보로 임명되었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다카노미야코(高野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귀실집사

복신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부흥운동 당시 벼슬은 달솔,

662년 유민 400여 명과 왜국으로 가서, 오오미국(近江國) 가마에군(神前郡)-후의 가마자키군(神崎郡)에 정착했다.

665년 소금하(小錦下)에 임명된다,

669년, 좌평 여자신(餘自信)과 좌평 귀실집사(鬼室集斯) 등 남녀 700명이 오오미국(近江國) 가모우군(蒲生郡)에 옮겨졌다(오늘날의 일본 시가 현 가모 군 히노(日野) 정). 그들의 후손이 스즈카 산맥 류오산 아래에서 촌락을 이루고 살면서 귀실집사를 모시는 귀실신사(기시쓰 신사)를 관리한다고 한다.

 왜에서 26년을 살다가 688년 세상을 떠났다




<일본 귀실신사>


이런 인연으로 은산별신제를 여는 부여 은산면과 귀실신사를 모시는 일본 시가켄 가모군(蒲生郡) 히노쵸(日野町)는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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