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암 이삼만이 쓴 산광수색(山光水色)..
산의 빛과 물의 색..
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부는 ‘유수체(流水體)’
창암은 조선후기 서울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평양의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1772~1840)과 함께 당대 ‘삼필(三筆)’로 불렸다. 호남 서단에서 활동하며 문자 그대로 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부는 ‘유수체(流水體)’로 이름을 떨쳤으나, 각지고 모난 건축적 아름다움을 뽐낸 추사체 그늘에 가려 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바둑으로 치면 일본 바둑을 배워온 조훈현이 추사라면, 순 국산 서봉수가 창암에 비유할 수 있겟다..
http://news.joinsmsn.com/article/aid/2010/12/28/4516872.html?cloc=olink|article|default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은 1770년(영조 46년)에 전주 자만동(현 교동)의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나 한때 정읍 불무곡에서도 거주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글씨 쓰기에만 몰두하여 가산을 돌보지 아니하였으므로 점점 살림이 치폐되어 중년에는 전북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골들어가서 처사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엿다.
그의 부친이 독사에 물린 여독으로 작고하게 되자 그는 뱀이란 뱀은 눈에 띄는대로 잡아 죽이었으니 뱀막이로 이삼만이라 써 붙이면 뱀이 끓지 아니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그는 학문, 교우, 취처가 늦어서 삼만이라 했다던가.. 자는 윤원이요, 호를 창암이라고도 하였고, 젊었을 적에는 강암(强巖)으로도 불리웠다
77세 때 쓴 그의 서첩(書帖)에 의하면 우리나라 명필인 김생(金生)과 한호(韓濩) 같은 분을 추켜 올렸으니 그의 주체성을 살필 수 있는 것이요, 글씨의 변천된 과정과 더불어 글씨쓰는 법통을 밝혀냈고, 글씨쓰는 자세를 구명했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의하면 그는 병석에 누워 있었을지라도 하루에 천자를 썼으며 늘 말하기를 벼루 세 개를 구멍내지 아니하고는 글씨는 이루어 질 수 없다고 했다. 글씨를 배우러 찾아오면 한획 한점을 각각 한달씩 가르쳤다.
어느 분이 소장한 서첩에 의하면 해서(楷書)를 쓰는데 숙달하게 되면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는 절로 이뤄진다는 것을 강조하여 글씨는 해서에 기초를 둬야 한다고 되풀이 했다. 또한 글씨쓰는 사람들의 폐단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옛날 장해동이란 사람이 글씨로 당대에 이름이 났으나 그가 죽고나서 배척된 고사(古事)를 들어 글씨쓰는 법도에 있어 후진들을 경계했다.
글씨는 도(道)의 경지에서 다뤄져야 하는 것으로 인품이 고결한 연후에야만 묘경(妙境)에 들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글씨는 기교를 부리지 말아야하고 소박한 기풍을 본받아야만 될 것으로 속기(俗氣)에 접어드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1847년에 향년 78세의 고령으로 일생을 마치고 구이면 평촌 하척부락에 묻혔다.
안분와(安分窩)..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며 사는 집...
전남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에 있는 홍기웅의 가옥(중요민속문화재 제151호)안에 있는 편액
임지관월..연못 속에서 달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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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책 : 원교.창암 글씨에 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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