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방 안의 하회탈 장식)
아! 빠진 것이 있었네요.
저녁을 들고 토방에 20여명이 죽 둘러앉았다. 좌장은 60에 가깝고, 5살 어린이를 대동한 젊은 부부 등 남녀노소가 덕담과 술을 나누다 술이 얼큰하자 한 양반이 돌아가면서 노래를 시키니 어색한 기분에 제대로 진행될 리 없다.
그때 좌장이 한마디 하신다.
낮에 차를 타고 오다가 들은 농담 좀 하겠다.
“복상사의 주지스님 이름 아는 사람?.......절정스님
그럼, 그 옆에 있는 허탈사의 주지스님은? ......조루스님“
그러자, 킥킥거리더니 누가 이어 받는다.
“으악새가 새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
또, 복상사가 절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하니
웃음소리가 더 커진다.
이때 누가 또 거든다.
“복상사는 애인 위에서 돌아가시는 거고..
본부인 위에서 돌아가시는 것은 뭔지 아시나요?
...
순직이요!!”
모두 뒤집어진다.. 이후는 분위기 풀업..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서편; 멀리 하얀 건물 왼편이 서애라고 불리고, 그 뒷산이 원지산이다.)
하여간, 뜻뜻한 토방에 잠을 푹 자고 평소처럼 새벽에 일어났다.
화천의 백사장를 거닐다 서애(西厓) 앞까지 다다랐다. 고목나무 옆 벤취에 앉아 서애를 바라보는데 귓가에 모래시계의 테마음악 “백학”이 흐른다.
문득 시상이 떠오른다.
서애(西厓)를 바라보며
화산(花山)을 등지고
부용대(扶蓉臺) 옆에 끼고
하얀 백사장을 강 따라 걸었네
새날이 뒤따라와 같이 걸어서
물 감도는 꼭지에 다다라
세 그루 고목 곁에 앉아
서애(西厓)를 바라보며
늙은 신하의 한스런 눈물을 생각하네
귓가에는 모래시계의 백학이 흐르고
왜병에 도륙당하고 명군에 시달리던
백성의 아픔 위로하듯 들리니
삼동의 이른 아침
추운 줄도 모르겠네.
서애 류성룡은 21세 때 형과 함께 이황 선생을 찾아가 공부를 배웠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가 31세 일시 고향에 내려와 하회마을 서쪽에 서당을 짓고 자신에 호를 서애(서쪽 언덕)라고 지었다 한다.
이순신을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로 천거하였으며,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고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전군지휘관)가 되어 승전으로 이끌었으나 관직에서 물러난 뒤 하회 마을에 기거하며 옥연정에서 “징비록”을 집필하여 자신의 반성과 후세의 불망(不忘, 잊지 않음)을 바라는 심정을 남기고 있다.
아침은 “안동 간고등어”를 반찬으로 들었다.
그리곤 하회마을을 돌았다.
동네를 돌다보니 겸암파(형 류은룡의 후손) 후손인 탈랜트 류시원의 문패도 보인다.
동네의 구조는 삼신할미를 모시는 삼신당을 기준으로 대종가인 겸암 류운룡의 종택인 양진당이 남향으로 감투봉(문필봉)을 바라보고 있고, 그 옆으로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이 서향으로 서애와 원지산을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으며, 또한 서애파의 후손 중에 남촌댁과 북촌댁이라는 소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겸암의 서재인 빈연정사, 서애의 서재인 원지정사 등이 주요 관람지이다..
(삼신당 신목 : 소원을 비는 쪽지가 가득 걸렸다. 나도 아이들 성취를 기원하는 글을 써서 줄에 묶었다)
삼신당의 신목 옆에 선 남근..불끈.. 이런 정기와 삼신할미의 정성이 결합하여 잘난 후손들이 계속 이어지나 보다..)
사람마다 보는 눈이 있고 마음 가는데가 다른 것 처럼 나는 주로 옛시나 현판의 글씨 등에 주로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병이다.
(남촌댁 벽에 붙은 계오덕도)
머리에 쓰고잇는 큰 관은 文이요
발에 난 날카로운 며느리발톱은 武요
적을 맞아 용감히 싸우는 것은 勇이요
농사를 위해 새벽에 때를 알리는 것은 信이요
먹이를 보면 동료들을 불러 함께 먹는 것은 義라!!
(북촌댁에 걸린 현판 : 화경당 - 한석봉의 글씨를 모아 판각한것 같다)
(북촌댁에 걸린 현판 : 북촌유거)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다.
고종 때의 문관으로 서예에 뛰어났으며 필체는 미남궁체(米南宮體)였다.
<미남궁체란?>
북송(北宋)의 서예가·화가인 미불의 글씨체를 말한다.
미불은 자 원장(元章). 호 남궁(南宮)·해악(海岳).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출신. 관직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에 이르렀고 궁정의 서화박사(書畵博士)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수묵화뿐만 아니라 문장·서(書)·시(詩)·고미술 일반에 대하여도 조예가 깊었고, 소동파(蘇東坡)·황정견(黃庭堅) 등과 친교가 있었다.
글씨에 있어서는 채양(蔡襄)·소동파·황정견 등과 더불어 송4대가로 불리며, 왕희지(王羲之)의 서풍을 이었다.
(대종가인 양진당)
(충효당내 현판)
미수 허목이 전서로 쓴 "충효당"
허목은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사위이다. 경기도 연천의 향리이고 서울에서 성장하였지만 이황의 학통을 이은 남인의 거두 정구(鄭逑)에게 학문을 배웠다. 남인의 거두로 노론의 송시열과 정적관계였다.
전서(篆書)에 독보적 경지를 이루었다.
그러니, 남인의 뿌리격인 류성룡의 후손의 거택에 그의 글씨가 붙어있는 내력을 알겠다.
(원지정사 안에 있는 연좌루의 현판)
연좌루(燕坐樓)의 연(燕)은 예기에서 '기쁘다, 편안하다'라는 뜻의 안(安), 혹은 희(喜)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연좌는 '편안하게 앉아있다. 고요히 앉아 마음을 존하다'라는 뜻으로 풀이되며 예기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문에 따르면 서애가 이곳에 머무를 당시 이 연좌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제연좌루(題燕坐樓)라는 시도 남아있다. 현재의 기록에는 정조 5년(1781)에 중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판의 글씨는 일성(一聲) 권응룡(權應龍)이 썼다.
(원지정사의 현판)
서애가 지은 원지정(遠志亭) 시는 이러하다.
門掩蒼苔竹映堂 문에는 푸른 이끼 덮였고 대나무 그림자 마루에 비치는데
栗花香動午風凉 밤꽃 향기 한낮의 서늘한 바람에 움직이네,
人間至樂無他事 인간의 지극한 즐거움 별 것 없으니
靜坐看書一味長 고요히 앉아 책 읽는 재미 가장 유장하네.
서애가 직접 남긴 원지정사 기문에 나오는 작명의 내력은 이렇다.
"정사를 북림(北林)에 지으니 무릇 오칸 집이다. 동쪽은 당(堂)이라 하고 서쪽은 재(齋)라고 하였으며 재로 말미암아 북으로 나가다가 한번 꺾어 서쪽 높은 곳에 누(樓)를 지어 강물을 굽어볼 수 있게 하였다.
편액의 이름을 원지(遠志)라 하니 객들이 내게 그 뜻을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원지는 본래 약초이름으로 일명 소초(小草)라고도 한다. 옛날 진나라 사람이 사안(謝安)에게 묻기를 '원지와 소초는 하나의 물건인데 어찌 두 가지 이름인가' 하니, 어떤 이가 답하기를 '산중에 처해 있을 땐(은거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을 닦을 때) 원지라고 하고 세상에 나오면(벼슬을 할 때) 소초라고 한다' 고 하니 (대답을 못한) 사안은 부끄러운 빛을 나타냈다.
나는 산중에 있을 때도 진실로 원대한 뜻(遠志)이 없었고 세상에 나와서는 소초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와 서로 닮은꼴이다.……이러한 것을 유추하여 그 뜻을 당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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