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고택의 사랑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이르니, 집앞 연못 배롱나무 붉은 꽃에 가려진 이쁜 한옥이 나타난다..

배롱나무는 어느 정도 자라면 껍질이 없어진단다..그래서 겉과 속이 같다고 여겨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나무로 삼는다..

그런 이유로 선비의 집에 배롱나무를 심는 모양이다.

 

흔히 윤증고택이라 불리는 이 집은 명재 윤증이 눌러 살던 집은 아니란다..

본인은 원래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단촐한 집에서 살앗는데, 제자들이 주선하여 이 집을 지었으나, 정작 본인은 분에 넘친다고 생각한 듯 이곳에서 살기를 싫어하여 아들이 살았고, 가끔와서 묵기는 하였단다.

 

명재 윤증은 개성과 소신이 뚜렷하다.

그는 무실과 실심을 강조한 실용주의자 같다고나 할까?

특히 허례허식을 싫어하여, "제상에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 것이며, 일꺼리가 많은 유밀과 기름이 들어가는 전도 올리지 말라”고 한 유언할 정도였단다.

그의 집안 제사상에는 조기도 한마리가 아니라 토막으로 올린단다..

음식은 종이를 입에 물고 남자들이 장만한다..

추석 제사상의 경우 앞줄에 과일, 2번째 줄에 김치, 3째줄에  백설기..

이렇게만 딱 차린다..

송편 대신 백설기를 올리는 것은 "변하지 않는 마음"을 뜻한다던가?

설날에는 백설기 대신 떡국를 올린다..

그뒤 후손들은 이 정신을 계승하여 기제사도 한밤중이 아닌 저녁에 지내고, 구한말에는 이미 양력으로 제사날을 정했다고 한다..  

이런 실용, 간이의 정신은 정통파 내지는 교조주의적 성리학자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안채 뒤편 언덕에 있는 전통의 장독대)

 

명재 집안의 장맛은 몇백년의 전통이 있단다..

전에 350년전통의 보성선씨 종가의 간장이 1리터에 500만원씩 팔렸다하여 화제가 되었는데, 이 집의 간장도 백화점에 출시되는 간장은 위 장독대 것이란다..

찾는사람이 많아 사랑채 옆 빈터에 많은 장독을 두고 간장의 생산을 늘렸단다.. 

(사랑채 옆 장독대)


(안채 대청에 있는 글씨)

 

대청마루에 "청백전가"라 쓰여진 편액이 있다..

"청백의 기상이 전해오는 집안" 쯤으로 번역될까?

 

명재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이고, 그 아버지 윤선거는 송시열과는 동문수학한 친구 사이다.. 

명재는 벼슬을 한 적이 없고, 임금이 벼슬을 내리고 불렀어도 나가지 않았단다..

10차례 벼슬이 내려지다가 우의정 벼슬까지 내리며 불러도 사양하였으니 백의정승이라 할 만하다.

 

왜 그는 그의 스승 송시열과 반목하고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을까?

 

우선 우암 송시열은 교조주의적이고 보수적 성리학자 같다. 주자전서의 1자 1획도 고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백호 윤휴가 "중용"에 집주를 달면서 독창적인 견해를 내자,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이단자)으로 몰아 부쳤다..

이때 윤선거가 윤휴를 긍정적으로 보아주자, 송시열은 윤선거의 과거사(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고, 동지인 김익겸이나 자신의 처 등이 순절하였는데, 본인은 탈출한 사건)을 들먹이며 힐난하면서 이른바, 회니논쟁이 벌어졌다.

그뒤, 윤선거가 죽자 아들인 윤증이 아버지의 친구이며 스승인 송시열에게 비문 작성을 부탁하자 성의없게 작성해주었고, 재차 요청하는데도 거절하면서 스승과 제자는 갈라섰다.

 

이 두사람의 관계를 보면서, 이황과 기대승의 관계가 떠오른다..

두 사람도 "사단칠정론"으로 논쟁이 붙었으나 서로 존중하였고, 안동사람인 이황이 죽으면서 자신의 비문작성을 호남의 기대승에게 부탁하였고, 기대승은 흔쾌히 성의껏 작성해주었다..

 

그러니 스승과 제자로서 반목하는 두사람이 해동 18현으로 불리는 것은 좀 뭐한 느낌이다..


(안채 대청에 있는 제사상)

 

논산의 3명문가에 대한 "삼치례" 이야기가 잇다..

 

광산 김씨는 먹치레

파평 윤씨는 묘치레

은진 송씨는 집치레 

 

연산의 광산 김씨는 제사를 모시는데 성의를 다하고 제수를 푸짐하게 장만하고 제물을 1자씩 괴고 각종 음식도 많이 만들어 밤중에 제사가 끝나면 나누어 먹고 아침엔 각자 봉게도 싸주어 보낸단다..

노성 파평 윤씨는 조그만 제사상에 조촐하게 제사를 지내지만, 묘을 단장하고 석물을 잘 꾸미는 전통이 있단다..

은진 송씨는 좋은 집을 짓고 단장하는데 관심이 많단다..  


 (사랑채에서 보는 배롱나무 연못)

 

해설하시는 분이 16:9 비율의 화면은 이 집 사랑방에서 나온 것같다고 농담한다..

정말 그럴 듯하다..


(종학당)

사진 속 저수지 건너편 언덕에 묘치레한다는 노성의 파평 윤씨의 묘소가 잇다..

 

 

명재가 벼슬에 나가지 않은 이유는 세가지..

첫째, 서인들이 남인들의 쌓인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외척의 세도를 막지 못하면 안 된다.

셋째, 당론이 다른 자는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만 등용하는 풍토도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전제들이 해소되지 않는한 정계에 진출해보아야 진흙탕 싸움에서 벗어 날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대화를 함께 하며 명재를 지지했던 박세채는 훗날 영조 때 탕평책을 뒷받침하였던 것을 보면 명재가 탕평책의 선구였음을 알겟다.. 

 

결국 조용히 은거하며 집안에서 세운 사립학교격인 종학당에서 후진을 양성한다..

그 결과 집안의 후손중 42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일단 과거에 급제해야 사람행세를 하니..


(종학당의 정수루)

 


종학원의 정자 정수루.. 일종의 휴식공간..

여기서 공부하여 과거 급제한 사람들의 시가 기둥에 써잇엇는데, 보수과정에서 다 지워졌단다..

 

안동의 하회마을의 병산사원과 비교해보면,

병산서원은 그 곳 풍광처럼 속이 깊은 사람을 키워낼 것 같고,

이곳은 툭터진 풍광이어서 가슴이 넓은 인재를 배출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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