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쨋날..아침 8시 50분 내가 주차장 빈자리 찾아 주차하는 사이 동행이 뛰어가 선표를 샀다..
무사히 9시 서호동 여객선터미날에서 한산도 제승당행 배를 탔다.
한산대첩의 바다를 지나고..
거북등대를 지나면 바로 한산도 제승당이다..
한산도는 충무공의 그 자체다..
한산대첩후 이곳에 통영을 설치하고 한때는 군민 2만명이 거주하였던 섬..
충무공을 억울하게 무군지죄로 다스리는 사이...
정유재란이 벌어지고 한산도는 불타고..조선 수군은 패퇴하였다..
입구에 거북선 음수대가 정겹다..
한산문을 지나고..
해변길을 지난다..
꽃댕강나무 하얀 꽃에 검은 나비가 춤을 추고..
제승당 입구 대첩문을 지나면..
충무공 당시 한산도 통영의 지휘소 이름은 운주당이다.
운주(運籌)'는 “장량이 군영막사 안에서 계략을 짜내어(運籌策帷幄之中 운주책유장지중) 천리 밖에서 승리를 얻게 했다.”
말에서 따온 것으로 충무공의 지략을 중시한 좌우명 같은 이름이다..
제승당은 그뒤 영조 15년(1739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이 재건한 건물이다..
'제승(制勝)'은 손자병법의 허실편에 나오는 제승지형(制勝之形)에서 따온 말인데.."승리할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을 파악하고 관찰하여 최적의 조건들을 결합시키는 방략"을 이른다..
운주당이던, 제승당이던 한산도의 절묘한 위치와 지형에 맞는 이름이라..
건물 편액이 바로 조경의 글씨다..
제승당 안의 또 다른 현판
낙관글씨에"崇禎三丙午仲春統制使望八醉筆”(숭정삼병오중춘통제사망팔취필)이라고 썼다..
‘崇禎三丙午’란 숭정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해서 세 번째 병오년(丙午年)이라는 뜻으로 1786년이다.
仲春은 2월.."望八" 은 그의 나이 71세..그의 이름은 정조 때 제140대 통제사 김영수(金永綬: 1716~1786)..
해석하면 "1786년 2월 통제사 71세에 술김에 쓴 글씨"이라는 뜻이다..
그는 청나라 연호 건륭을 쓰지 않고 명나라 연호를 쓴 강골 무장같다..
충무공의 친필글씨..
제승당 안의 그림..
사천에서의 팔에 부상 당한 모습..
한산대첩..
16c의 해전은 배끼리 부딛치고 상대의 배에 올라 싸우는 인파이터 전투방식인데..
이순신은 포위 전술로 총포로 적선을 공격하는 아웃 복싱형식으로 셰계최초의 해전을 승리로 장식한다..
게다가 학익진으로 화선을 집중하여 포격후 배를 돌려 포격하는 방식으로 연속 포격 방식의 개념을 창안하였다..
그래서 셰계 해전사에 빛나는 전투라고 한다..
노량의 마지막 전투..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간의 소소한 전투로 자신을 얻은 이순신은 적을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낸다..
"넓은 데서 한판 붙자!!"
이때 일본군의 지휘자 와끼자까는 용인 전투에서 1600명의 병력으로 조선군 5만병력을 격퇴한 일본 챔피언..
그러나..이번 한국 챔피언과의 맞짱대결에서..
왜선 73척 중 47척을 격파당하고 17척을 포획당하였으니..복수 지데루 했다...
무려 9000여명의 왜적을 수몰시키고..아군은 18명이 전사하였다는 그야말로 대첩..
수루..국민학교 시절 외웠던 한산도가가 걸려있다..
저기 보이는 거북 등대 밖에서 수루 쪽을 보면 잘 보이지않지만 수루에서는 밖이 훤하게 보이고..
더구나 포구가 W로 넓어서 조선연합함대 100여척을 모두 정박 시킬 수있는 공간이 있으며..배후지에서 둔전도 가능한 이곳..
더구나 거제도 앞 견내량을 제압하여 부산으로 진격이 언제든지 가능한 이곳이 천혜의 요새임을 간파..
한산대첩이후1593년 이 곳에 통영을 설치한다..
그뒤 통제사에서 해임되고 체포되어 한양으로 붙잡혀가던1597년 2월 26일까지 머물런 던 곳이다.
바다에서본 수루..
수루에서 역사탐방팀들이 가이드의 열강을 경청한다..
이곳의 통영을 기리기 위하여 초등생까지 성금을 모아 건립한 한글비..
충무사에 참배하고 방명록에 "만고에 빛나는 별..감사합니다.."라고 쓴다..
한산정이다..충무공이 활쏘기 연습하던 곳..
마치 배위에서 쏘는 듯..145m 거리에 과녁이 있다..
난중일기를 보면
임진년(1592년) 3월 중에 8일 정도 활을 쏘았는데, 1일에 대략 10순(50발)에서 15순(75발) 정도 쏘고 있다.
임진왜란 발발 보름 쯤 전인 3월 28일에는 활 10순(50발)을 쏘았는데, 5순은 모두 관중, 2순은 4중, 3순은 3중으로 총 42발을 명중하고 있으니, 명중률 84%(42/50)이다.
참고로 대한 궁도협회 1단 자격은 56%의 명중률(25/45), 8단은 82%의 명중률(37/45), 9단은87%의 명중률(39/45)을 보여야 한다.
충무공은 현재방식으로 따지면 8단쯤 되는 활쏘기의 고수이고, 고전적 표현으론 백발백중의 신궁은 아니더라도 십중팔구의 명궁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활을 쏘는 것이 내 소망 중의 하나 였는데.
활이 없으니 그저 마음의 활을 당긴다.. 관중이요!!
마음의 화살은 145미터를 날아가 5시 5중 몰기..
화살을 주으러 간다..
염소가 방목되어 있네..
활을 줍고 건너편 활터를 바라본다..
참 좋은 활터다...
한산도가 넓다는 것..이번에 알았다..
한 때 섬 중학교 전교생이 600명이었다는 사실이 대변한다..
그레서 마을 순환버스를 타고 추봉도로 간다..
다리 입구에 내려 한산도와 다리로 이어지는 추봉도로 건너간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다리만한 물고기가 어슬렁 거리는 것이 다보인다..
마을 수퍼를 지나니 바로 몽돌해변이다..
파도가 밀려나갈 때 자글 자글 몽동 소리가 정겹다...
몽돌해변의 둘레길을 돌아나와 아쉽지만..
12시 55분에 도착하는 마을 버스로 선착장으로 간다..
한데..이버스 선착장으로 간다는 것이 제승당이 아니고...한산대첩비가 선 문어포를 지나더니 의항에 선다..
의이하게 묻는 나에게 마을 주민이 말한다..
1시반에 제승당을 떠나는 배가 이곳에 들러 통영으로 가니 안심하라고..
한산대첩의 현장을 지나 통영으로 돌아온다..
현재의 통영은 임진왜란후 거제도에 설치되었다가 604년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고성 두룡포에 통영을 이설하면서 역사가 시작된다..
<참고 걷기> 한산도 역사길(덮을개- 망산 -진두 - 추동도)을 걸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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